[Opinion] 인생의 원점_김영하 [문학]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다.
글 입력 2018.05.19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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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다
인생의 원점_김영하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힘든 순간들을 겪을 때마다 서진은 돌아가고 싶었다. 인생의 원점, 자신이 떠나온 곳, 사람들이 흔히 고향이라 말하는 어떤 장소로. 그가 누구인지 모두가 아는 곳으로.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지점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내가 태어난 곳, 고향, 새로운 삶이 시작된 곳? 인생의 원점은 무엇인가. 우리의 시작이 되는 출발점은 어디일까. 우리는 아마 각자의 원점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서진의 원점

서진은 인아에게 말한다. “네가 내 원점이야.” 서진과 인아는 내연관계이지만, 그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서진은 떠돌이 인생을 살았기 때문에 정착할 수 있는 장소를 갈망해왔다. 그런 그가 '원점'이라는 말을 내뱉을 정도라면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음이 틀림 없다. 그러나 소설의 막바지에 서진은 인생의 원점이라 믿어왔던 인아에게서 멀어진다.

사채업자가 서진에게 경고를 했을 때, 인아가 남편을 죽인 줄 알고 서진을 불렀을 때도 그는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는다. 그는 인아에게 '남편에게 폭행을 당했다는 진단서를 떼 두어라, 자수를 하고 징역을 살고 나오면 결혼을 해 주겠다' 정도의 대응으로 일관한다.

인아를 사랑하지만 그녀를 위한 도박을 하지 않으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자신의 안위를 지켜낸다. 인아에 대한 마음은 서진이 어릴 적 그녀에게 준 스페인 범선에서 잘 드러난다. 어릴 적 이사를 가는 인아에게 만들어 준 엄청나게 큰, 아름다운 범선은 사실은 조악하기 짝이 없는 애들 장난감 수준이었다. 인아에 대한 사랑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그리고 인아의 죽음을 맞은 후에 그는 오히려 인생의 '새로운 원점'으로부터 시작한 느낌을 받는다. 인아는 죽고, 그녀의 남편도 중상을 입은 데다가, 사채업자는 교도소에 가게 된 상황에서 서진은 기가 막히게 위기를 피해간 것이다. 자신의 인생을 지켜냈다는 기쁜 마음으로 서진은 병실을 떠난다. 서진이 갈망하던 인생의 원점은 다른 이에게서 찾을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서진의 원점은 본인에게 있는 것이다.

인아와의 사랑으로 원점을 벗어날 뻔한 서진은 본래의 인생으로 돌아와 안정감을 얻는다.



인아의 원점

“너를 안 만났다면 좋았을걸.”, “역시 널 안 만났어야 했는데, 그럼 그냥 그렇게 살았을 텐데...” 그녀는 행복감을 후회처럼 말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 후회의 전제는 결국 원점으로 돌아가야 함을 알기 때문이다. 인아는 원점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한다.

불행하게도 남편에게 ‘매 맞는 아내’인 인아는 아마 이제까지 서진을 포함한 여러 명의 남자, 즉 도피처에 의지하여 자신의 원점에서 도망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본인(원점)을 포기하면서까지 그녀를 사랑하려는 남자는 만나지 못했다. 자꾸만 버려져 돌아갈 곳이 남편 밖에 없게 된 인아는 이제 원점에서 탈출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인물들은 원하든 원치 않든 자꾸만 원점으로 되돌아간다. 소설을 읽은 후 내 인생의 원점은 무엇일까 고민해보았다. 역시나 쉽게 답이 나질 않아 그냥 '조금 덜 아프고 조금 더 행복한 곳이었음 좋겠다' 생각해버렸다. 어찌됐든 그 '원점'이라는 것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은 일 같아보이니.


[김새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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