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금기가 된 피를 이야기하다

책 '생리 공감' 리뷰
글 입력 2018.05.23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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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피의 연대기'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극장에서 개봉했을 때, 온라인에서나 오프라인에서나 꽤 화제가 되었던 기억이 난다. 감독이나 배우가 아닌 '월경'이라는 소재가 눈길을 끌었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다. 월경, 즉 '생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인류의 절반이 경험하고 있는 일이지만 극장과 같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논해졌던 적이 거의 없다. 나만 해도 '피의 연대기' 시놉시스를 보며 좋은 시도고 모두에게 꼭 필요한 영화라고 생각하는 한편 어딘가 껄끄러운 마음이 남아 있었으니 말이다. 우리 사회가 생리를 취급하는 방식에 불만을 품고 있으면서 나 역시도 그 통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 이유 때문은 아니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영화를 보지 못해 아쉬워하던 차에 '피의 연대기'의 김보람 감독이 쓴 <생리공감>이라는 책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생리 공감>은 감독이 다큐멘터리를 완성한 후 다큐멘터리 내용을 포함해 제작 과정, 감독의 경험담 등 못다 한 이야기를 풀어놓은 책이다.



금기가 된 피_생리혈은 원래 빨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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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세사 면생리대


가임기의 여성이 매달 일정 기간 피를 흘린다는 건 꽤 극적인 일이다. 그러나 인류의 절반이 경험하는 일인 데 비해 그만큼 많이 이야기되지는 않는 게 생리다. <생리 공감>은 생리를 하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생리에 대한 모순된 시선을 작가의 경험을 담아 풀어낸다. 임신과 출산을 신성시하면서 그 과정에서 빠질 수 없는 생리는 부정하고 껄끄럽게 여기는 사회 분위기에서 다른 사람, 특히 남성에게 생리하는 걸 들키는 일은 수치스러운 것으로 생각된다. 가게에서 생리대를 사면 요청하지 않아도 검은 비닐봉지에 생리대를 넣어준다. 남자에게 생리대를 사 오라고 부탁하는 건 아직도 많은 사람에게 '생각이 짧은 일'이라 여겨진다. 생리는 일종의 금기와 같다. 그런 과정에서 생리에 대한 인식은 마치 시간이 지나 변색된 생리혈과 비슷해진다.

다큐멘터리를 찍을 때 감독이 가장 고민했던 지점이 '생리혈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였다고 한다. 생리를 하는 주체임에도 생리혈이 다른 피와 다를 거라 생각하고 생리혈을 재현하기 위해 당시에 탁하고 어두운 갈색을 만들려 했다고 고백하는 감독의 말은 우리가 생리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이야기하지 않으면 내 몸에서 일어나는 일에도 무지해진다. 급기야 잘못된 사회통념에 기대어 생리를 받아들이기에 이른다. 생리대를 보고 생리혈이 다른 피보다 어두운 색이라고 생각하는 일, 탐폰을 알면서도 용어부터가 잘못된 '처녀막'이 손상될까봐 사용하기를 꺼리는 학생들, 생리는 몸에 좋지 않은 피가 나오는 현상이므로 생리혈은 더럽다는 고정관념 등이 그러하다.  남성은 물론이고 여성조차도 자신의 몸을 잘 모른다. 생리가 공공연하게 이야기되는 주제였다면 생리혈이 본래 다른 피처럼 선명한 붉은 색이듯 생리와 관련된 정보 역시 왜곡 없이 전달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왜 제대로 된 정보조차 알지 못할 정도로 생리 이야기를 금기시하게 되었을까?



여성의 몸은 '말한다'



여성의 임신과 출산을 가장 고귀한 생명 활동으로 여기는 세상에서 생리는 왜 이렇게 비참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을까?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한 현대사회에서 왜 아직도 우리는 생리에 관해서는 초라한 정보만을 가지고 있을까? 세상은 오랫동안 남성의 언어로 기록되어 왔다. 생각해 보면 전체 인류 역사에서 여성이 직업을 갖고, 참정권을 갖고, 대학에 가기 시작한 역사는 길지 않다. 특히 의학과 철학, 문학이 태동해 발전하는 과정에서 여성의 목소리와 사유는 철저히 배제되었다. 철저히 남성 중심으로 학문과 문화가 정착된 이후에 태어난 세대의 여성들은 남성들이 다져 놓은 언어로만 학습해야 했다. 그로 인해 남성 중심 사회는 더 공고해졌다.

59-60쪽


생리가 금기시되어온 이유에 대해, 저자는 단적으로 '생리가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요약한다. 남성 중심사회에서 여성의 몸은 미지의 대상이다. 사람은 알지 못하는 것에 공포를 느끼고, 공포는 쉽게 혐오와 금기로 이어진다. 생리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종교 경전을 통해 바라본 생리는 여성이 흘리는 피가 얼마나 남성 중심적인 시각에서 해석되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책에서 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과 동아시아 불교에서 유래한 경전 <혈분경>을 예로 들었다. <신학대전>에서 생리는 '불경한 피'로 묘사되며, <혈분경>에서는 여성이 생리나 출산 중 흘린 피로 강물을 오염시키는 죄를 짓기 때문에 혈분경을 읊어 죄를 용서받아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무지는 사람을 잔인하게 만든다. 모르기 때문에 상대가 겪게 될 공포를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성의 몸은 이제껏 수많은 금기와 출처를 알 수 없는 미신에 시달렸고, 타자(남성)의 욕망으로만 해석될 수 있는 기호로 여겨져 왔다.

119쪽


생리를 보는 부정적인 시각은 곧 사회가 여성의 몸을 보는 시각과 관련되어 있다. 남성 중심사회에서 너무나 많은 학문과 미디어가 여성의 몸을 대상화한 결과, 여성의 몸은 일종의 '기호'가 되었다. 따라서 여성의 몸은 남성의 편의에 따라 '생명을 잉태하는 모성으로서의 몸'과 '남성의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성적대상으로서의 몸' 크게 두 가지로만 분류되었다. 남성과 달리 여성은 자신의 언행이나 사회적 지위보다는 '몸' 그 자체로 표현되며 몸과 동일시된다. 영화나 만화, 또는 게임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가 남성 캐릭터와는 달리 몸매가 드러나거나 불필요한 노출이 있는 의상을 입고 있다는 걸 예로 들 수 있다. 여성의 몸은 남성의 시선에 따라 가치가 매겨지고 의미를 부여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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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매되는 생리컵 중 가장 오래된 생리컵, '키퍼'


이러한 맥락에서 생리는 여성의 생식기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이유로 성적인 것으로 해석된다. 실제 성적인 행위와는 무관하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위가 음식을 소화하듯 그저 몸이 하는 일인데도 말이다. 남성 중심사회에서는 남성의 시선이 곧 사람의 보편적인 시선으로 환원된다. 여성조차도 자신의 몸을 타자로 바라보게 되는 이유이다. 남성의 시선으로 몸을 바라보기 때문에 질 속에 삽입해 사용하는 탐폰, 생리컵 등의 생리용품에 거부감을 갖는 게 자연스럽다. 생리를 금기시하는 사회분위기는 인류 역사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여성혐오의 결과이다. 만약 남성이 생리를 했다면 누구나 공공연하게 생리를 얘기하며 거리마다 생리대 자판기가 넘쳐났을 거라는 우스갯소리가 책을 읽고 나면 더이상 우스갯소리만으로 들리지 않는다.

알아야 할 것은 그저 한가지, 여성의 몸도 남성의 몸과 마찬가지로 그저 존재할 뿐이라는 것이다. 여성의 몸은 남성의 시선으로 읽히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과 고민, 꿈을 말할 수 있는 존재다. 저자는 생리컵을 사용하기에 앞서 자궁까지의 길이를 재 보기 위해 자신의 질 속에 손가락을 넣어 보면서 자신의 몸을 더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었다고 한다. 남성의 시선이 주를 이루는 사회통념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여성은 자기 자신을 몸의 주체로 인식할 수 있다.



생리를 '선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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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 탐폰


'금기가 된 피'를 넘어서 생리가 지극히 일상적인 일이며, 숨기거나 껄끄럽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걸 받아들이고 나면 자연스레 궁금증이 생긴다. 생리는 원하는 때에 원하는 모습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생리를 하는 여성이라면 유난히 예민하고 짜증나는 어느 생리기간에, 한번쯤 생각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대로 생리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매달 피를 흘릴 수밖에 없는 걸까?'

나는 '한 달에 6일씩 1년이면 72일...' 이런 식으로 날짜를 헤아려 보기도 했다. 어림잡아 봐도 여성이 피를 흘리며 살아가는 시간은 꽤 길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다가도 이내 체념했던 까닭은 별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 나 역시 생리에 관한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에 생리를 안하는 삶이나 더 나은 생리용품를 생각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저자가 만난 '샬롯'이라는 이름의 네덜란드 여성은 생리대 파우치를 선물로 준 저자에게 자신은 자궁 내 장치를 삽입해 생리를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샬롯의 동생 역시 임플라논 시술을 받아 생리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반영구적인 방법이므로 주기적으로 새롭게 시술을 받아야 하지만 매 달 생리를 하는 것보다 낫다고 결론 내린 후에 샬롯이 한 '선택'이다. 생리를 하고 안 하고에 선택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니. 독자인 나와 마찬가지로 저자는 충격을 받았고, 샬롯과 나눈 대화는 이후 '피의 연대기'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된다. 물론 생리를 하지 않도록 하는 시술은 아직 국가나 문화권이나 학자에 따라 의견이 분분하다. 인위적으로 생리를 멈추는 일이 여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다방면으로 살피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연구와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작가 역시 같은 이유로 다큐멘터리에는 해당 내용을 넣지 못했다고 한다.

아직 생리를 하고 안하고를 선택하는 일은 다소 이르더라도 생리를 하면서 선택할 수 있는 항목은 많다. 단지 정보가 부족해서 알지 못할 뿐이다. 어떻게 하면 생리기간을 더 쾌적하고 편안하게 보낼 수 있을까 고민하는 독자에게 책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일회용 생리대 외에도 다양한 종류의 탐폰, 생리컵, 면생리대 등을 소개한다. 심지어 생리 중 삽입섹스가 가능한 탐폰도 있다고 하니 생리용품의 세계는 무궁무진하다.



우리는 모두 스토리텔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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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브롱크스 예술고등학교에서 진행된
무상 생리대 법안 통과 기념식


한 사람의 진솔한 이야기만큼 강력한 힘을 지닌 서사는 없다. 이제껏 한쪽으로 치우쳐 해석되던 여성의 몸에 관한 이야기가 더 다양하고 더 큰소리로 들려져야 하는 까닭이다.

163쪽


여성을 비롯해 장애인, 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의 말은 종종 그 말 그대로의 의미로 전달되지 않는다. 듣는 사람은 그들의 이야기를 몰라도 별다른 불편함이 없기 때문에 힘들게 꺼낸 이야기도 곡해해서 자신의 편의에 맞게 받아들인다. 여성은 이러한 흐름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오랫동안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스스로를 검열해야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여성만이 경험하는 생리통을 이야기할 때도 엄살을 피우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을지, 자신만 유별나게 예민한 것은 아닌지 걱정한다. 여성은 자신의 경험이 아니라 사회통념에 근거해 스스로를 해석하고 거기에 들어맞게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재단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을 살아가는 여성은 역사가 어떻게 여성의 목소리를 지워왔는지 깨닫고 더 크게 목소리내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 참는 것이 여성의 미덕으로 여겨지던 시대가 저물고, 나를 비롯한 새로운 세대는 윗세대보다 더 많이 '말하는' 세대가 될 것이다. 각자의 파편화된 경험이 무수히 모여 큰 파도가 만들어진다. 여성이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 작게는 인식의 전환부터 크게는 사회 제도의 변화까지 이끌어낼 수 있다. 대부분 문제의식이 없었던 저소득층 여학생의 생리대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 게 대표적인 예다. 불편을 이야기할 때 그 불편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도 생기기 마련이다. <생리 공감>은 그 시작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책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목으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그렇게 나는 내가 보고 싶었던, 여자들의 경험이 직조된 이야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구원을 발견했다. 구원이란 그 피를 드러내는 것이고 그 피를 우리만의 문화로 만드는 것이며, 그 힘을 기반으로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다!

63-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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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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