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리는 서로의 용기다 [문화 전반]

대한민국 여성들의 연대의 역사
글 입력 2018.05.23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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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19일, 혜화역에서 성별에 따른 불법촬영 편파 수사를 규탄하는 시위가 열렸다. 홍익대학교 회화과 누드 크로키 수업에 참여한 남성 모델의 성기를 몰래 찍어 인터넷에 올린 여성에 대해 유례없이 신속한 수사가 이뤄진 것이 공분을 산 것이다. 어디를 가든 구멍이 나 있지 않은 곳이 드문 여성 공중화장실과 포르노 사이트에서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는 불법 촬영물에서 확인할 수 있다시피 여성을 대상으로 한 불법촬영에 대한 수사는 매우 미온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에 반해 이번 사건에 관해서는 이례적으로 강경한 수사가 이뤄지자, 사건의 피해자가 남성이기 때문에 혹은 가해자가 여성이기 때문이라는 귀납적 추론이 혐오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공감을 사고 있다. 분노 어린 여론을 드러내고자 ‘동일범죄 동일처벌’을 명시적으로 요구함과 동시에 여성에 대한 법적·사회적 차별에 항거하기 위한 시위가 열렸고, 자그마치 1만 2천여 명의 참여자가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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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 참여는 실로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했다. 여성을 타깃으로 한 폭력과 살인이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곳에서 그에 저항하는 집단행동을 하는 것은, 말 그대로 폭력과 살인 수준의 보복에 대한 각오가 선행되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이번 사건으로 인해 바닥에 떨어진 공권력에 대한 신뢰는 참여자들로 하여금 서로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기득권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늘 그렇듯 페미니즘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시위를 향한 시선 역시 곱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열악한 상황 속에서 주최 측은 최소한의 핵심적 취지라도 전하자는 목적으로 조심스럽게 시위를 계획하였다. 표출하고자 하는 의견의 범위를 한정시켰고 언론사 인터뷰 대응 강령을 체계화하는 등 그 어떤 시위보다 엄격하고 체계적인 매뉴얼을 조직했다.
 
시위의 구성은 짧은 준비 기간이 무색할 정도로 완벽에 가까웠다. 주최 측은 염산·황산 테러에 대비하기 위한 식염수, 다과, 비건들을 위한 간식까지 준비하며 참여자 한 명 한 명의 편의를 위하는 세심함을 보였다. 참여자들 역시 사전에 공지된 매뉴얼대로 질서 있게 목소리를 외쳤으며 시위는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었다. 시위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은 주최 측에 음식을 보내주었고 시위를 지켜보던 여성들은 박수를 치고 웃음으로 맞이하는 등 응원의 목소리를 더했다. 시위가 끝난 자리는 1만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있었던 자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깨끗했다고 한다. 참여자들을 몰래 찍어 조롱하고 비웃던 사람들과 이를 방관한 경찰이 보여주었던 미성숙함과 대조되는 성숙한 모습이었다.
 
사실 이러한 완벽한 단체 행동은 갑자기 나온 게 아니었다. 여성들은 오래전부터 약자로서 연대를 통해 저항하는 법을 터득했고 강자 중심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을 설득하는 법을 숙지해왔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싸워오며 연대의 가치를 몸소 느낀 자들의 숙달된 집단행동이었다. 페미니즘이 어느 정도 가시화된 지금, 결코 녹록지 않았던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 여성들은 계속해서 연대해왔고, 투쟁해왔다.
   


강남역 살인사건, 여성으로서의 역사로 연대하다


2016년에 발생한 ‘강남역 살인사건’은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던 한국의 페미니즘이 본격적으로 가시화되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여성에게 무시당했다’는 이유로 여성을 목표한 살인을 저지른 가해자가 한국의 여성 혐오 사회에 내재된 시선을 담지하고 있다는 여론이 형성되면서 페미니즘 논의가 가속화되었다. 이 시기에 널리 쓰이던 ‘여자라서 죽었다’, ‘우연히 살아남았다’는 문구는 이 사건이 단순히 조현병 환자 개인의 발작 행위가 아니라 한국 여성 모두가 맞닥뜨린 현실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단편적 사건으로 규정하지 않고 사건의 본질을 사회적 맥락과 연관 지어 통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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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를 여성 혐오 사건으로 접근하는 견해와 그것을 부정하는 견해는 첨예하게 대립했다. 하지만 어찌 됐든 이미 너무나 많은 위협 속에서 일상을 살아가고 있던 여성의 두려움의 실체를 부정할 수는 없었고, 이에 대한 사회적 검토가 절실했다. 여자라서 죽는 사회에서 죽지 않기 위해 여성들은 개인의 경험들을 하나하나 모으기 시작했다. 개개인의 사건을 이어 붙여 현상으로 정립시키고자 했다. 여성으로서 살아온 자신의 역사로써 연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강남역 입구에는 피해자를 애도하는 메시지가 적힌 포스트잇으로 빼곡했다. 왠지 모를 두려움이 서려 있는 포스트잇들은 떨어지지 않기 위해 유약한 서로의 힘에 의지하여 자리를 버텼다.

 

이화여자대학교 학생들의 시위, 세상을 바꾼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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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 겨울은 유독 추웠다. 학교의 비리를 규탄하는 과정에서 정계의 비리까지 발견한 이화여자대학교 학생들은 집단 시위로 저항하였고, 이에 투입된 사복경찰과 완력으로 학생을 제압하는 부당한 공권력에 맨몸으로 싸웠다. 사실 이화여자대학교 학생들의 저항은 곱절로 고된 것이었다. 우리 사회는 ‘똑똑한 여성’을 싫어하고 이대생은 바로 그 상징이기 때문이다. 역사에 남을 국가적 변혁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이에 대한 반응은 한없이 차가웠고 그들은 서로에 의지하여 고된 싸움을 지속해나가야 했다. 기자들은 허락 없이 학생의 사진을 찍어 매스컴을 통해 소비재로 만들었고 사람들은 그들의 개인정보를 유포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굴하지 않고 마스크를 끼고 시위에 참여했으며 완력을 쓰는 경찰들에 저항하기 위해 서로의 팔짱을 끼고 버텼다. 체력이 떨어지자 다 같이 노래를 부르며 힘을 냈다. 똑똑한 여성을 싫어하는 사회를 비웃듯 공부를 하며 자리를 점거하는 ‘공부 시위’를 단행하기도 하였다. 공권력은 물론 사회적 권력에도 용기 있게 맞선 그들의 연대는 나라를 바꾸어놓기에 이른다.

 
 
미투(Metoo) 운동, 연대의 산실


2017에 SNS에서 시작된 성폭력 가해자 폭로 운동, ‘미투 운동’은 그야말로 연대의 산실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올해 초 서지현 검사의 폭로로부터 촉발되었으며 법조계뿐 아니라 예술계·연극계 그리고 사회 전반에까지 널리 퍼져 잘못된 성 의식에 대해 재고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회의 그릇된 인식으로 인해 자책하기에 급급했던 성폭력 피해자들이 연대를 통해 그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가해자가 처벌받고 피해자가 보호받는 당연한 기제조차 확립되지 않은 사회에서 사람들은 연대를 통해 그것을 바로 세운다.

가해자로 지목된 자에게 마땅한 수사와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를 갖지만, 현재까지 다양한 유형으로 장기화되고 있는 미투 운동은 약자들의 사회적 연대가 사회에 얼마나 큰 압박을 기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를 남기고 있다.

 

우리는 서로의 용기다


페미니즘은 진보적인 움직임이기에 수많은 견해가 공존하고 그 사이 차이와 갈등은 무수하다. 어쩌면 시위에서 만난 친절한 사람이 언젠가 인터넷에서 나와 완전히 다른 견해를 가지고 맹렬히 싸웠던 사람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원체 시끄러워야 할 움직임이다. 중요한 것은 약자에게 언어가 허용되지 않았던 시대에서 싸워 이겨낸 끝에 여성이 나름의 언어를 향유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언어로 논쟁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같은 목표 아래에 있는 견해들이 그만큼 풍부해졌다는 것이다. 무기도 주어지지 않았던 여성이 각자의 무기를 가지고 싸울 수 있게 된 시대가 도래했다. 그 싸움들은 오늘날의 연대를 만들어주었고, 연대는 다시 싸움의 가능성을 창조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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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를 조롱하는 사람들과 방관하는 경찰, 아직도 명확한 해답을 내놓고 있지 못하는 정치 권력. 뭐 하나 쉬운 게 없는 투쟁이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여성들은 순전히 그들만의 연대로 그 모든 것에 저항한다. 여성은 약자로서의 처절한 연대가 필요 없어질 때까지 내부에서 논쟁하고 외부와 투쟁하며 계속해서 연대할 것이다. 수많은 압제 속에서도 굴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우리는 서로의 용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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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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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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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은서람
    • 읽고 또 읽었어요. 조현정 에디터님, 벅찬 공감이 되고 마음 깊이 울리는 글 적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서로의 용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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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지은
    • 에디터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그 날의 벅차오르는 기쁨과 분노가 여전히 선연하네요. 만명이 넘는 여성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며 연대의 힘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체감했던 날이었습니다.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주며 투쟁을 멈추지 않는 여성들에게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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