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따금 부끄러워지는 나의 글쓰기에 대하여 [도서]

글 입력 2018.05.25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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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나의 글은 언제나, 아니 거의 언제나 시간의 제약 속에서 쓰였다. 글을 쓰는 것에 대해 별다른 의식이 없던 고등학교 시절 교내 대회에 써냈던 글부터가 그렇다. 한 시간 몇 십 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서 끝의 끝까지 분초를 다퉈가며 그래도 어떻게든 내 마음에 드는 글을 써내겠다고 힘을 쏟았던 것 같다. 말하자면 ‘완성’에 대한 의지이다. 수상 여부와는 큰 상관없이, 내가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글을 완성시키고야 말겠다는 투지 비슷한 게 있었다. 그 투지를 가두는 시간의 제약은 내겐 늘 아쉬운 부분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마치 전력질주를 할 때와 같은 스릴감도 있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쓰는 글도 시간의 족쇄에서 자유롭지만은 못했다. 논술형 시험을 치거나 기한 내에 레포트를 제출하는 것, 공모전에 지원하는 글을 쓰거나 오피니언을 쓰는 것 까지 모두. ‘시간을 원하는 만큼 줄 테니 어디 한 번 할 수 있는 데까지 써봐라’하는 기회는 거의 없다. 물론 시간 제약이 있어도 부지런한 사람들은 넉넉하게 시간을 잡고 여유롭게 글을 마감할 수 있겠지만, 나는 아무리 부지런을 떨어도 결국에는 제출 기한 전까지 무한 퇴고를 거듭하게 되기 마련이었다.

시간 제약이 있는 글을 쓸 때 가장 의미 없는데 가장 많이 하는 후회는, ‘시간이 조금만 더 있으면 더 잘 쓸 수 있을 텐데…’하는 종류의 것이다. 그 생각을 하는 순간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런 후회 속에서도 꾸역꾸역 글감을 쥐어짜내고 어떻게든 글을 써나가면 그럭저럭 B+짜리 레포트는 가능할 것이다. 어쩌면 한정된 시간 안에 수준이야 어떻든 글 같은 글을 만들어냈다는 성취감도 있을지 모른다. 진짜 문제는 시간의 제약에 ‘하기 싫음’까지 보태진 경우이다. 글은 막막하고, 기한은 다가오는데, 그래서 더 하기 싫어지고, 결국 아까 있던 그 자리에서 몇 발짝 떼지도 못하고 있다. 여느 날처럼 이 ‘하기 싫음’에 몰린 나는 책장 속을 방황하다가 한 에세이집에 도달하게 되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jpg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는 우리에게도 이미 유명한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자전적 에세이다. 하루키 자신의 소설쓰기에 대한 개인적인 기록이고, 스스로도 보편화하기는 힘든 글이라고 종종 말하는데, 나로서는 오히려 그 점 때문에 더욱 재미있고 의미 있게 읽었다. 원래 보편타당한 말일수록 재미가 없지 않은가. 여하튼 이 책은 작가 자신이 생각하는 소설쓰기에 대한 것이고, 따라서 이 글에서도 하루키와 그의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분명 좋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읽은 하루키의 글은 장편 소설 두 편뿐이라는 사실이 그것을 망설이게 만든다. 또 무엇보다도 지금은 소설쓰기보다는 글쓰기, 그리고 하루키 보다는 나의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당연하게도 하루키의 책에 비해 나의 생각과 표현은 스스로 보기에도 아직 설익은 면이 많지만, 읽으면서 조금 떫어도 널리 이해해주기를 부탁드린다.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법?


요즘 글쓰기에 대해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화두들이 있는데, 이것도 그 중 하나이다. 물론 나는 글쓰기가 좋다. 그래도 쓰기 싫은 순간들이 있기 마련이다. 글을 억지로 쥐어짜내는 기분이 들 때, 혹은 주객이 전도된다는 생각이 들 때가 그렇다. 주객의 전도는 사실 이 오피니언에 주로 해당하는데, 말하자면 공연이나 영화나 책을 볼 때 그 자체를 감상하기보다는 글을 쓰기 위해 감상하는 경우이다. 대상을 감상하는 와중에 글감이 떠오르고 이에 대해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좋은 경우지만, 반대로 감상하기 전에 미리 다른 목표나 의도를 가진 채로 대상을 대하는 것은 아무래도 아직 힘들다.

그러다보면 도대체 전문 작가들은, 아니 세상의 모든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어떻게 이를 해내는지가 경탄스럽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좋아하고 미치는 일이어도 하루 종일, 한 달 내내, 몇 년 씩 그 일만 하면 싫어지기 마련 아닌가? 심지어 많은 작가들의 경우처럼 마감 기한이 있는 상황이라면 더욱 힘들 것이다. 기한은 다가오는데 글이 써지지 않는 상황은 또 얼마나 괴로운가. 그러나 어쩌면 진정한 프로는 하기 싫은 순간에도 마감에 맞춰 해내는 것 아닐까, 내가 고작 글을 쓴 지 몇 달 밖에 안 된 아마추어여서 이러는 것 아닐까, 이런 자기 반성적인 의문도 든다.


‘자, 이제부터 뭘 써볼까’ 하고 생각을 굴립니다. 그때는 정말로 행복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뭔가 써내는 것을 고통이라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만일 즐겁지 않다면 애초에 소설을 쓰는 의미 따위는 없습니다. 고역(苦役)으로서 소설을 쓴다는 사고방식에 나는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소설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퐁퐁 샘솟듯이 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루키의 답은 간단하다. 쓰고 싶을 때 쓰고, 쓰기 싫을 때에는 쓰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글 쓰는 것이 싫어질 수가 없다. 물론 이는 하루키 개인의 특수한 상황과 성향의 오묘한 조합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그에게만 해당하는 ‘한가한 얘기’일 수도 있다. 현실의 우리에게는 내 마음대로 묶였다 풀려났다 할 수 없는 제약들이 존재하니까. 그러나 기본적으로, 즐기지 못하는 것에 시간을 쓰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에는 나 역시 ‘개인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다.



이 시간을 넘어서


이 이야기를 들으면 조금 웃을지도 모르겠다. 전문 작가도 아니고, 이제 막 글쓰기에 빠져들었다는 사람이 너무 야심찬 꿈을 꾼다고 말이다. 사실 나도 엄청 대단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 아닌데, 표현이 좀 거창해 보이는 건 맞다. 무어냐면, 영원불멸하는 글을 쓰고 싶다는 소망이다.

내가 공을 들여 쓰면, 좋은 글이 나온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잘 쓴 글은 남들도 인정해주는 것 같다. 사실 이건 정말 대단한 일이고, 엄청난 행운이다. 마음먹는 대로 어느 정도 굴러간다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위와 같은 소망은 욕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내가 공들여 잘 쓴 글도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에게 그리고 나에게조차 잊혀지는 것을 보면 어디에선가 두려움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영원에 대한 욕심으로 탈바꿈한다. 아마추어 중에도 아마추어 단계인 지금은 짧은 관심을 받았다는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이겠지만, 그 관심이 조금 더 길어지면 어떨까, 길어지다 못해 후대에도 길이 남는 글이 되면 어떨까. 생각만 자꾸 비약한다.

그러나 그런 글을 쓰려면 많은 시간동안 많은 생각을 해야 하고, 그 많은 생각들을 더 많은 공을 들여 활자로 옮겨야 할 것이다. 시간 제약을 탓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 ‘많은’이라는 것은 시간, 생각, 경험 어느 면에서 보나 나에게는 아직 들어맞지 않는 단어인 것 같다(물론 ‘아직’은 종종 ‘그러나 언젠가는'을 함축한다). 그런데 한편으로 무엇이든 많아야만 되는 일은 또 아닌 것 같고, 자기에 얹혀진 ‘남들’의 것을 덜어내고 깎아내는 작업도 필요해 보인다. 흔히 비유하듯이 원석을 제련해 보석을 만드는 과정처럼, 불필요한 것들을 계속 쳐내면서 자기만의 무언가를 갈고 닦는 것이다. 심지어는 과거의 나도 지금은 불필요한 ‘남들’ 중 하나가 되어버려 나로부터 쳐내야 하는 상황이 오기도 한다. 그리고 이건 여담이지만 후대에 길이 남는 작품의 많은 경우는 동시대에는 인정받기는커녕 무시되고 비난받았다는 사실도, 당장 사람들이 보내는 관심에 연연하는 나로서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실제로 나는 지금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그런 사람들을 봐왔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주 눈에 띄게 참신해서 ‘와아’하고 감탄하지만 어느샌가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 그런 사람들에게는 아마 지속력이나 자기 혁신력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얘기겠지요.


지속력. 영원불멸의 다른 말이라고 생각한다. 하루키는 지속력 있는 글을 쓰려면 작가의 ‘몸집’이 커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작품 한두 개 갖고는, 설령 그것이 아주 뛰어나고 독창적이라 하더라도 망각의 위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오래 기억되는 작품의 힘은 대게 그 작품 하나가 아닌 작품이 담긴 세계 전체로부터 온다. 그리고 작품세계는 작가의 스타일, 독창성, 개성, 이런 것들의 종합이다. 한 두 작품을 넘어서 작가의 스타일이나 개성같은 것을 유의미하게 논하려면 최소 일정 수 이상의 작품들이 있어야 하는 건 당연하다.



“개인 자격”



내가 여기서 가장 말하고 싶었던 건 작가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개인의 자격’이라는 점입니다.


무슨 문학상 수상자나 베스트셀러 작가로서가 아닌, 오로지 나 자신으로서 글을 쓰는 것을 하루키는 ‘개인 자격’이라 부른다. 이 개인 자격이 어쩌면 영원불멸이나 독창성에도 많은 기여를 하는 것 같다. 작가 자신에게 충실하게 쓴, 더없이 구체적인 글이 때로 시대 초월적이고 보편적인 가치에 가장 근접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나도 어쩌면 개인 자격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 중인지도 모른다. 그 어떤 외부 자격들에도 재단되지 않은 글, 남들은 쓰지 못하는 나만의 글, 모든 곳에 빈틈없이 ‘나’가 들어있는 글, 그런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다. 그렇게 해서 내가 진정으로 ‘완성한’ 글을 써내면, 설령 그것이 남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후대들도 몰라줘 결국 잊혀진다 해도, 그런 것 따위 아무래도 좋지 않을까.





꿈만 커서 조금은 부끄럽다. 물론 내 글 중에는 스스로 만족스러운 글도 있지만, 어떤 글은 모든 부분에 내가 들어있다고 자신하기 힘들고, 또 어떤 글은 꼼꼼히 검토되지 않고 머리속에서 튀어나오는 그대로 써 내리는 바람에 일필휘지의 나쁜 예가 된 경우도 있다. 그래도 가야할 길이 멀다는 것은 나쁜 일만은 아닌 것 같다. 그만큼 길을 멀리까지 보고 있다는 뜻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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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랑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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