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view] 말로 표현되지 않는 것을 말로 표현하는 사람들

도서 < 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 >
글 입력 2018.05.27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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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조금이라도 공들여 써 본 사람이라면 다들 공감하겠지만, '적확한' 표현을 찾아 쓰는 것은 글쓰기에서 상당히 많은 시간을 잡아먹고, 또 그만큼 중요하다. 마치 이 문장에서도 ‘정확한’ 대신 ‘적확한’이 선택된 것처럼 말이다. 어떤 표현을 사용하는지는 단순히 글쓴이의 어휘력을 자랑하거나 문장을 좀 더 매끄럽게 만들어주는 것을 넘어서, 나의 생각을 정확하고도 충분하게 전달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인상 깊다’와 ‘기억에 남는다’ 사이에서, ‘뚜렷한’과 ‘선명한’ 사이에서, ‘조금’과 ‘좀’ 사이에서, ‘-이다’와 ‘-인 것이다’ 사이에서 글쓴이는 보다 나은 표현을 위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다. 심지어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크고 작은 표현들이 거듭 수정되고 있다.

수많은 단어 후보들 중에서 무엇이 간택되는지는, 물론 글쓴이의 개인적인 취향과 스타일도 적극 반영되겠지만, 기본적으로 단어들이 가진 뜻과 어감의 미묘한 차이에 의해 결정된다. 이는 해당 언어의 원어민이나 그와 유사한 수준으로 그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 그 중에서도 언어 능력이 상당히 훌륭한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이를 표현하는 재미있는 독일어 단어가 있다. 슈프라흐게퓔(sprachgefühl), 번역하면 어감 내지는 언어 감각이다. “쉽게 설명하기 힘든 미묘한 용법 차이가 있다는 걸 알려주는 머릿속 기묘한 윙윙거림”이라고도 한다. 기묘하고도 위윙거리는, 어감에 민감한 사람이라면 많이들 공감할 법 한 재미있는 표현이다.

그런데 이 ‘슈프라흐게퓔’이 꼭 필요한 직업이 있으니, 바로 사전 편집자다. 이들은 온종일 오직 단어만 생각한다. 어떤 단어를 사전에 넣을지, 넣은 단어는 어떻게 정의할지, 문법 체계상의 분류는 어떻게 정할지, 예문은 뭐가 좋으며 유의어와 반의어는 무엇으로 해야 이 단어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을지. 이런 골치 아픈 고민들로 그들의 머릿속은 빽빽하게 채워져 있다. 그러면서도 행여나 사전에 오류라도 난다면 이용자들로부터 무시무시한 반발과 비난이 돌아온다. 사전은 언제나, 당연히, 옳을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한 영국 시인의 말처럼 사전 편찬자는 “성공해봤자 박수갈채는 받지 못하고, 성실함에 보답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참고로 이 말을 한 새뮤얼 존슨은 1755년 혼자 힘으로 8년 만에 『영어 사전(A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을 완성해 사전 체계를 정립했다고 한다.

사실 실생활에서 모국어의 사전을 이용하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다. 어휘를 학습하는 과정부터가 사전보다는 대체로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처음 보는 생소한 단어도 사전적 정의보다는 그것이 쓰이는 문장이나 발화의 문맥 속에서 이해되는 경우가 더 많다. 글을 쓰거나 말하는 과정 역시 마찬가지로, 단어의 사전적 정의를 하나하나 찾아가며 표현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어쩌다 한 번 자기가 쓴 단어의 의미가 헷갈릴 때, 혹은 어디에선가 본 멋진 단어라 한 번 써보고 싶긴 한데 뜻을 잘 모를 때, 그럴 때에나 사전을 이용할 뿐이다. 대부분의 경우는 수많은 경험 속에서 체득한 무의식적인 ‘슈프라흐게퓔’을 통해 적확한 표현을 골라내고는 한다.

사전 편집자는 바로 그 슈프라흐게퓔을, 그 무의식적인 언어 감각을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머릿속에서 활자로 끌어올리는 사람이다. 글쓰기나 말하기를 통해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모호한 생각들을 가시적으로 표현하는 것과 같다. 사전 편집은 우리가 사용하는 수많은 표현들 사이의 설명하기 힘든 미묘한 차이들을 정확한 말로 풀어내는 과정이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을 말로 표현하는 일, 실로 대단하고 어려운 일일 것이다. 게다가 언어 체계의 유지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잘 사용되지 않지만 없어서는 안 되는 이 존재, 사전을 위해 오늘도 사전 편집자들은 조용히 치열하게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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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전 편집자 중 한 명인 코리 스탬퍼의 솔직하고 유쾌한 사전 이야기를 담은 책이 있다. 저자는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사전 제작사인 메리엄 웹스터에서 20여 년 넘게 일해 온 사전 작가이자 편집자이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사전뿐만 아니라 언어와 표현, 문법과 문맥, 나아가 사전을 만드는 ‘일’과 사전 ‘업계’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포괄한다. 매일같이 더 나은 표현을 위해 사전을 뒤적이는 사람들, 사전은 안 보더라도 수많은 말과 단어를 수집하는 사람들, 혹은 사전도 안 보고 ‘슈프라흐게퓔’ 같은 것에도 관심 없지만 매일 말하고 글쓰며 ‘표현’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즐거운 사전의 세계를 향한 안내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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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랑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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