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angle] Episode 1. 해방

제목은 이미 시작부터 해방이었다.
글 입력 2018.05.29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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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른 해방되고 싶다.
매일 해방을 꿈꾼다.
그림 제목은 이미 시작부터 해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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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ntangle }
Episode 1. 해방



[ 4월 2일 ]

내가 자괴감에 빠졌을 때.

내가 한 실수들로 멍울진 자괴감. 그래도 꾹꾹 이겨내며 잘해오다가 갑자기 나를 붙드는 걸림돌 같은 고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면서 나를 방황의 끝으로 몰아버린 상황이 되어 버렸다. 누가 나를 여기까지 밀어낸 거지? 지금은 아무것도 안 보인다. 내가 잘못한 일만, 그것만 보였다. 잊어버리고 다시 힘내보자며 괜찮다며 쉽게 일어났다면 지금 펜을 들고 이 글을 쓰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낭떠러지가 이런 건가 싶었다. 떨어져서 충돌해버릴 그 끝조차 보이지 않았다. 나 얼마나 높이 있는 거지, 여긴 어디지. 그냥 떨어지면 안 돼? 음 아니야 조금 무섭네.

모든 게 자괴감이라면 내가 그나마 잡을 수 있는 건 그림밖에 없었다. 조금 억지스러운가. 하지만 뭔가를 하기엔 두렵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기 싫은 나에게 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무작정 종이를 폈다. 그냥. 적어도 흰 종이가 내게 부담을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아무런 조건도 달지 않은 것이기에.

무엇을 그릴지 고민하는 것 보다 갑자기 떠오른 아이디어를 좋아한다. 그래서 특별히 떠오른 이미지 없이는 종이를 잘 안 펴는 편인데 오늘은 그냥 펼친 것이었다. 정말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다. 뭐 그리지. 멍하게 종이를 보고 있을 때 하나가 떠올랐다. 꽃. 꽃이 그리고 싶어졌다.

그냥 꽃이 좋아서, 더 정확히는 꽃을 그리는 것이 좋아서 하루에 한 페이지씩 그리던 한 달 전이 떠올랐다. 겨우 5페이지? 정도 채운 어설픈 꽃 드로잉 북을 오랜만에 펼쳤다. 꽃이 가진, 그것만의 곡선을 그리고 싶어졌다. 생각해보니 꽃을 그리는 건 내가 사랑하는 것 중 하나였다. 한동안 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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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만 그리기에는 만족스럽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원하는 걸 더 상상해봤다. 지금의 내가 원하는 것.

요즘처럼 힘들 땐 하루에도 몇 번씩 탄식한다. 힘들어 죽을 거 같다고. 그러니까 진짜 죽고 싶다는 게 아니고 일상에서 그냥 너무 힘들어서 '아, 나 죽을 거 같아' 라고 진심인 듯 아닌 듯 흘려 말하는 뉘앙스의 말이었다. 뭔가를 하긴 해야 하는데 해결되지 않고, 어떻게 해야 할지조차 몰라 답답함의 끝을 찍을 때 이런 험한 말을 입에 담곤 했다.

하여튼 뻥! 뚫리고 싶었다. 답답함과 고민이 구겨지고 뭉쳐지고 엉켜서 세상에서 제일 높은 밀도로 나를 막아버리는 것만 같았다. 이걸 한 번에 치워버리든지, 태워버리든지 어떻게든 날려버리고 어떻게든 했으면 좋겠다. 진짜 진짜로. 여전히 나를 괴롭히는 답답함에 한숨이 크게 쏟아진다. 그러다가 떠올랐다. 총, 이었다. 그냥 떠올랐다. 예전에 리볼버 모양이 좋아서 그냥 낙서로 그리던 짧은 시간들이 있었는데, 그게 튀어나온 걸까. 총이라는 물건이 가진 아슬아슬한 속성이 뭔가 좋다. 단 한 방이다, 그러나 그 단 한 방이라는 그 위험함을 다룰 수 있어야 한다. 가장 통제력 없이 진행되는 물건이고 그래서 그것을 잡기 위해서는 가장 단단한 통제력이 필요한 그런 극과 극의 관계를 요구하는.

음, 총과 꽃 이 정도면 되었다.

그리고 세상에서 제일 느린 속도로 그려야 한다고, 금방 그리면 안 되는 그림이라고 미리 내게 말한다. 내가 힘들 때마다 펼쳐야 하니까, 금방 끝내버리면 안 된다. 앞으로 내가 얼마나 더 답답함을 겪을지 모르는 일이니까. 어쩌면 지금의 나를 위한 휴식처를 마련한 것이었다.


*


총을 두고 타원이라는 도형으로 차원을 나누었다. 요즘 도형으로 공간이 나누어지는 게 너무 좋다. 그냥 내가 세상을 가르는 힘을 가지게 된 것만 같다. 이 백지에서라도. 마음껏. 현실에서는 쉽지 않은 말.
   
피지 못한 꽃들. 그것은 나의 방황이라고 불러본다. 지금의 나.
그리고 방황이 끝났을 때 필 것이라고 꿈꿔본다.
닫혀있는 꽃들만으로는 불충분했다. 마지막에 나는 끈으로 감싸버렸다. 피고 싶지만 피지 못하는,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나를 방황하게 하고 답답하게 만드는 것. 그 끈은 총의 방아쇠에 걸쳐있다. 이 그림에 내가 표현한 나의 욕구였다. 방아쇠를 당겨 다 끝내고 싶다. 이 죄책감을, 혼자 파고 있는 괴로움을.

그 차원의 반대는 개화다. 온통 개화한 꽃들이다. 숨이 막히도록 피어있다. 내가 현실에서 꿈꾸는 것이자 그림에서 나보다 먼저 실현될 꿈이다. 어차피 뿌옇게 피어오를 거라면, 연기보다는 내가 사랑하는 구름이 총구에서 피어오르길 원한다. 구름만큼은 세상에서 제일 빠르지만 정성스레 꽃들 위에 얹어 그렸다. 나와 구름 사이 코드에 달린 푸근함을 살짝 더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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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내가 총으로 형상화한 '어떤 것'이 다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해방, 도망, 포기 같은 것들 말이다. 있다면, 어쩌면, 늘 해방과 나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얇은 창문을 두고 늘 깨고 싶은 마음을 품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깨면 안 되는데, 깨면 안 되는데. 그렇게 생각보다 가까이 있던 게 아닐까, 그랬으면 좋겠다는 질문이다.

근데 왜?

생각해보면 사실은 아무도 그걸 깨면 안 된다고 내게 말한 적이 없었다. 나 혼자서 그러고 있었을 뿐이다. 뭐지. 뭘까. 물음표만 잔뜩 달며 오늘 나는 처음으로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그 유리를 두드려 본다. 의외로 맑은 소리가 나는 것만 같다. 기분 탓인가.

해방, 유리창을 치우고 너를 가득 안으며 살 수 있는 시간이 올까, 내가 너를 감당해낼 수 있을까.
그 숨 막히는 향기를.


*


왜 항상 꼬이는 일은 한꺼번에 일어나는 걸까. 단순히 기분 탓인 걸까. 또 답답한 일이 생겼다. 휴. 순간적으로 머리가 어지럽고 수축되는 느낌까지 들었다. 호흡이 조금 많이 빨라진 것 같다. 예전 같았으면 어쩌지 하면서 몸은 멈춘 채 세상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진전 없는 고민들을 돌리고 있었을 텐데, 나는 다 미루고 종이를 펼쳤다. 휴식처로 도망 왔다. 휴식처가 있으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숨 막힌다.
이 그림의 개화를 그리기 딱 좋은 순간. 숨이 막히도록 피어있는 꽃이라는 상상과 현실의 내가 반대의 의미로 어울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가장 잘 떠오르는 순간은 내가 그 순간을 맞이하고 있을 때이기 때문에, 잊히기 전에 그려야 했다. 도망 반, '바로 지금이다' 반 마음을 겨우 추스르며 펜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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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모르게 긴장해서 그런지 손이 살짝 떨리지만 그대로 그리기로 한다. 오히려 꽃이 가진 자연스러운 곡선에 내가 담고 싶었던 감정을 더해줄 수 있을 것 같은 믿음이 생겼다. 숨이 막히는 내 상태가 선으로 승화되어 새겨진다. 짧고 긴 선들이 조금은 규칙 없이 얽혀있는 모습. 하지만 별로 혼동되지는 않았다. 빨리 이 부분을 완성하고 싶었다. 지금만큼은 빠르게 그리고 싶었다.

미리 구상한 것을 다 그리고 나서도 부족한 것 같아서 빈 공간에 아무렇게 떠오르는 꽃들을 더 피웠다. 빈틈은 약간의 숨구멍만큼만. 나머지는 꽉 차야 한다. 지금 숨 가쁜 나처럼. 꽃향기에 숨 못 쉴 만큼 채워 넣어야 한다.

어느 시점부터 펜이 더 가질 않았다. 멈춘 그 상태로 가만히 있다가, 아무런 욕구가 생기지 않는 것은 다 채웠다는 뜻인 것 같아 뚜껑을 덮었다. 꽃잎에 결을 그려 넣고 음영을 조금씩 더하면 더 숨 막힐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남겨진 빈 공간의 수가 딱 좋았다.



[ 4월 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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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다 따고 조금씩 채워 넣는 단계를 거치고 있다.
이 때 부터는 단 두 가지의 색으로 모든 것들을 구분하기 위한 고민이 시작된다.

시작이 어렵다. 어디를 검은색으로, 어디를 흰색으로, 어디를 그 중간으로 남길지, 내가 담은 이 이미지들이 겹치면서 사라지지 않게 무의식적으로 계속 인식하고 그려야 한다. 줄다리기의 시작이다. 다행히 지금은 어려움 없이 손 가는 대로 채우고 있다.



[ 4월 10일 ]


그림에 마음을 둘 여유가 더 없어졌다.
얼른 해방되고 싶다. 매일 해방을 꿈꾼다. 그림 제목은 이미 시작부터 해방이었다.

종이를 펼치고, 펜을 꺼내고, 잠시 그림을 그려온 지난 기억을 더듬어보며 천천히 그림을 그릴 준비를 한다. 그렇게 마치 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마음을 준비한다.
사람을 만난다. 이 의미는 설렘과 함께 '다 알지 못함'에서 일어나는 막연한 감정을 의미한다. 이미 알고 있더라도, 항상 오늘의 그 사람이 어떤지 모두 알 수 없는 채로 만나니까. 함부로 알 수 없으니까, 그래서 첫인상이든 여러 번이든 함부로 그 사람의 순간을 판단하면 안 되는 것처럼.

그러니까 다시 그림을 이어 그릴 때 완전히 그 순간에 가진 내 마음대로 이리저리 뻗어가는 그림이 아니다. 그림을 다음날 이어갈 때 다시 천천히 이것을 담으려고 했던 이유와 마음을 준비한다. 소중한 사람을 대하듯이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나도 내 그림을 계속 기억하고 바라봐야 한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를 다 알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그냥 습관인지 종이를 펼칠 때 마다 계속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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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는 설렘과 막연한 무언가의 그 사이, 다행이 종이를 펼칠 때마다 나는 두근거린다. 가끔은 그리다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림도 하룻밤 지나면 다시 사랑스러워질 때가 있기도 하다. 쉽게 그만 둘 수 없고 일부러 오랜 시간 두고 그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딘가에 마음을 둔다는 것이 이런 의미인가 싶기도 하다. 절대 함부로, 나의 순간적인 생각에 너를 결정하지 않는다.

생각을 마무리 지으니. 이제 정말 완성만 남았다. 이 그림의 여정도 조금씩 매듭지어간다.



*


완성했다. 나의 "해방"이 완성됐다.
마음에 든다. 다시 봐도 꽃이 잔뜩 개화한 부분을 보면 그냥 내 마음이 숨 막히게 꽃으로 가득 차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좋다. 내게 뭔가를 가득 안겨주는 언어가 담겨진 그림. 그림 그리는 과정의 끝이 났음은 내가 나의 해방을 비로소 정의하는 시간을 의미하기도 했다.

나의 해방은 다른 것도 아닌 오로지 나를 위한 것으로 온전히 채우는 것. 도망칠 수 없을 때의 나의 해방은 그런 모습이었다.

마지막으로 펜을 옮겨가면서 다른 사람들의 해방은 어떤 모습일지 질문을 떠올려보기도 했다. 해방,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해방은 어떤 것인지. 도망칠 수 없는 현실에 있다면 그 속에서의 해방 말이다. 매일 꿈꾸는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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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안 되는 그림들을 다시 보다가 내가 그림 그리기로 마음먹고 두 번째로 그렸던 그림을 찾았다. 아마 이 그림을 그린 이유도 탈출, 즉 해방을 원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문득 내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 자체가 내가 머무는 세상에서 도망치고 싶던 것이 아닐까 싶다. 잠깐만이라도. 내가 아닌 다른 것을 열심히 해야 하는 그런 세상에서 말이다.

그 때의 나는 어떻게든 뛰쳐나가고 싶었는데, 그렇게 뛰쳐나가는 것 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지금의 나는 머무름의 해방을 알게 된 건가 싶었다. 머물고 있지만 나로 가득 채우는 해방. 숨 막히게 뒤섞인 꽃향기들 속에서 나의 것을 찾고 망설임 없이 피워나가는 것. 그게 지금의 내가 피울 수 있는 해방이었다.

둘을 같이 느껴보니 나의 해방은 더 멋진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이걸 그림으로 옮겨가기 시작한 과거의 나에게도 고맙다. 앞으로의 나의 해방은 어떤 모습일지 물음표를 달아 놓으며 그림을 온전히 마무리한다.

제목은 이미 정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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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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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28일 ]


나는 이 그림을 마칠 때까지만 해도 이 때 완성한 해방이 나를 지독하게 위로해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아니, 지독하다니 아니지 이토록 향기롭고 숨 막히게 나를 위로해 줄은 상상도 못했다.



*

next.

"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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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예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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