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라이프 오브 파이》 파이는 무엇을 갈망했을까 [영화]

글 입력 2018.05.31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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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가 지난 4월 재개봉하였다. 영화를 재개봉하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다시 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이 영화를 다시 보고 싶어 했을까? 단지 작품성이 좋은 영화를 보고 다시 감동을 느끼기 위해서였을까? 혹은 자연의 아름다운 경관을 생생하게 담은 시각적 연출을 큰 화면으로 보고 싶어서였을까?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는 어떻게 보는지에 따라 완전히 다른 영화가 된다. 이 영화를 봤음에도 또다시 얼마 안 되는 상영관을 찾아 나선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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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크백 마운틴》, 《헐크》, 《색, 계》, 《와호장룡》 등 장르를 넘나들며 많은 대작을 만든 이안 감독의 또 다른 수작, 《라이프 오브 파이》는 소설 《파이 이야기》를 원작으로 하여 재탄생시킨 영화이다. 충격적인 반전으로 해석되는 이야기와 뛰어난 시각 연출로 개봉했을 때에도 많은 사랑을 받았던 영화이다.
 
이 영화의 가장 놀라운 점은 관객에게 영화 해석의 선택지를 건네준다는 점이다. 관객의 해석에 따라 결말이 달라지는 ‘열린 결말’의 경우, 혹은 반전을 통해 관객의 기대를 뒤엎으며 카타르시스를 주는 경우는 많았어도 이 영화처럼 두 시간 동안 관객을 이끈 영화 전체의 서사를 전복시킨 후 그렇게 해석할 여지와 그렇게 해석하지 않을 여지를 동시에 제공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 현대의 예술이 관객 중심 패러다임을 추구하는 가운데 그 패러다임의 변화를 가장 명료하고 탁월하게 드러낸 영화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이 영화의 위대함을 설명할 수 없다. 선택지를 제공하는 것 자체도 참신한 서사를 만들어내는 요인이 되지만 그게 전부였다면 그것은 그저 하나의 영화적 재미에 불과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시종 ‘선택의 주체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선택에 목말라 하던 주인공 ‘파이’가, 선택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 경험을 제시하며, 끝에는 선택을 종용한다. 영화가 끝나고 난 후 관객으로 하여금 선택의 고민에 휩싸이게 함으로써 관객이 곧 파이가 되게 하는 것이다.

 

파이의 선택들


이 영화의 중심 줄거리라고 하면, 벵갈 호랑이와 단둘이 바다에 표류한 소년이 가까스로 생존하는 이야기가 주로 주목받는다. 그러나 사실 진짜 주된 것은 표류하기 전 유년기부터 청소년기까지의 파이의 인생 경험이 제시되는 과거 회상 장면이다. 바다에서의 생존 이야기는 선택을 갈망했던 소년이 맞닥뜨린 경험의 예를 든 것뿐이라고 볼 수 있다. 앞에도 언급했듯 시종 선택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이 영화는, 파이가 선택에서 주체가 되는 모습을 이 부분에서 계속해서 보여준다.
 
파이는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가기를 원했던 아이다. 파이의 선택은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놀리는 또래들에게 놀림 받고 싶지 않아 학기 초에 다른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한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어린 시절 이름으로 놀림 받은 경험은 대부분 흔히 가지고 있지만 대충 화를 내거나 속상해하는 것으로 멈추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에 대응하여 이름을 바꾸어 소개한 것은 퍽 대단한 발상이다. 게다가 새로 지은 ‘파이’라는 이름을 급우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해서 파이 수의 무한한 소수점 숫자를 외우는 노력까지 해낸다. 이때 파이가 외운 무한정의 숫자들은 그가 가진 선택의 가능성이 무한함을 복선처럼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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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가 마주한 또 다른 선택의 기로는 종교였다. 인도인인 파이는 기본적으로 힌두교 신자이지만, 자신을 희생하여 인간을 구원했다는 예수의 이야기에 감동을 받고 동시에 기독교 신자가 된다. 여기에 이슬람교까지 믿게 된다. 종교의 본질은 배척이다. 무얼 믿는다면 무얼 포기하는 것이 상식적이다. 그러나 파이는 왜 힌두 신도 좋고 예수와 마호메트도 좋은 자신이 어떤 것을 포기해야만 하는지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 혹자는 이러한 파이의 모습이 사춘기 소년의 불안함과 호기심에서 비롯된 종교에의 의존이라고 해석하지만, 선택의 기로를 확장해나가는 모습은 그 누구보다 주체적이다. 사람들은 선택지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어떤 선택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 선택의 주체가 내가 될 수 있냐는 것이다.
 
인생이 선택의 연속이었던 파이는 마침내 자신의 선택으로 거스를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민이다. 처음으로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은 상태로 인생의 변화를 결심하게 된 파이는 다른 나라로 가는 배에 올라타자마자 선택의 폭풍을 맞이한다.

 

파이와 호랑이, 써스티와 리처드 파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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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파이와 호랑이에 대한 관객의 생각을 뒤집으면서 끝나는데, 영화가 전개되는 내내 역동적으로 변하는 파이와 호랑이의 관계 역시 선택의 주체성을 암시하는 메타포를 지닌다.
 
어린 파이가 호랑이와 조우하는 장면은 아직 그의 선택이 주체성에 있어 불완전함을 보여준다. 파이는 호랑이에게서 친근함을 느끼며 가까이 만나려 하지만, 곧 아버지의 제지로 그만두게 된다. 여기서 파이의 아버지는 호랑이와 사람은 엄연히 다르다고 못 박는다. 아버지의 호된 꾸중이 정도가 심해 보여도, 관객들의 생각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당연히 호랑이는 파이가 될 수 없고 파이는 호랑이가 될 수 없다.
 

"you must be thirsty (목마른가 보구나)"


파이가 성당에서 성수를 마시고 이를 본 신부에게 들은 이 말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 파이가 정말 목말랐다는 것이다. 그게 물이든 어떤 것을 상징하는 것이든, 자신을 제한하는 상황에서 갈망하는 무언가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둘째, 파이가 곧 호랑이가 될 수 있음을 암시하는 복선이라는 해석이다. 파이와 표류하게 되는 호랑이의 이름은 ‘리처드 파커’로, 서류상 실수로 호랑이를 원래 관리하고 있던 사람의 이름과 바뀐 것이다. 바뀌기 전 호랑이의 원래 이름은 ‘써스티(thirsty)’였다. 이러한 복선들은 결말을 결정하는 관객들의 최후 선택에 힌트로 작용하기도 하면서, 호랑이와 파이가 일치할 수 있음을 암시하며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조소한다.

 

그리고, 아버지


파이의 아버지는 일반적으로 주목받는 인물이 아니지만 매우 중요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파이의 아버지는 선택의 시야를 당연하게 제한하는 일반적인 사람들을 의미한다. 파이가 여러 개의 종교를 믿는 것과 호랑이와 자신을 일치시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 불가능한 발상이며 아버지 역시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일반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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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의 관객은 아버지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마지막 장면에서 파이가 호랑이가 곧 인간일 수도 있다고 진술하는 대목으로부터 충격을 받게 되는 것이다. 영화는 그러한 인지적 혼란을 의도적으로 불러일으키고, 선택의 시야를 당연하게 한정하고 있던 관객들은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선택지가 여러 개인 ‘낯선 상황’에 처하며 주체로서 서게 된다.
 


파이는 무엇에 목말랐을까


파이는 선택을 갈망했다.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그 선택지들에 대한 존중을 목말라했다. 물이 가득한 바다에서도 제대로 된 물을 마시지 못하여 갈증을 느끼는 파이의 모습은 마실 수 있는 물과 그러지 못하는 물로 가득할 자신의 바다에서 선택의 주체로서 성장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사람들은 어떤 결말이 진짜인지에 대해서 열띤 토론을 벌인다. 하지만 이전에 언급했듯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선택지 자체가 공존한다는 것과 그 선택에서 나 자신이 주체로서 설 수 있냐는 것이다. 결말을 결정하기 위해서 영화 속 복선을 뒤지고, 사건을 찾아내고, 서사 구조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관객은 재미와 감동을 느끼는 것에서 더욱 나아가 진실에 대한 ‘갈망’을 느끼게 된다. 아마 이것이 영화가 의도한 관객의 반응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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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망을 느끼지 못한다면, 'thirsty'하지 못한다면 인간은 물을 마시지 않게 되어 죽게 된다. 선택의 바다가 무한정으로 펼쳐져 있는 세상에서 정작 우리는 무엇을 갈망하고 있는지, 그게 무엇이든 갈망을 하고 있는 것은 맞는지, 주체로서 서고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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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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