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켓북마크] 재현하려는 자여, 실화의 무게를 견뎌라 : 연극 < 그때, 변홍례 >

글 입력 2018.06.04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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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ial #2 재현의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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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재현의 윤리와 <그때, 변홍례>




허구는 허구일 뿐 오해하지 말자더니

여름이 왔다. 불쾌지수가 치솟는다. 맞닿은 옆 사람의 살결이 유쾌하지 못하고, 발엔 땀이 차 끈적거린다. 이 불쾌한 여름을 사는 누군가의 궁상맞은 하루. 장기하의 노랫말 하나엔 그날의 감각이 오롯이 담겨 있다. “눅눅한 비닐장판에 발바닥이 쩍 달라붙었다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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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눅한 비닐장판 ⓒ 장기하와 얼굴들 <싸구려 커피> 뮤직비디오


아, 듣기만 해도 짜증이 난다. 눅눅한 장판에 땀이 찬 발이 질척이다 떨어지는 그 기분, 느껴본 사람은 알 거다. 이 불쾌하고 눅눅하고 궁상맞은 감각은 한국 서사의 인기 소스가 되어왔다. 일명 ‘노란 장판 감성’이라 부른다. 한국 문학과 한국 영화에 넌더리를 내는 대중은 흔히들 그렇게 평한다. 가령 이런 식이다. 우리의 가난한 남자 주인공, 돈도 없고 권력도 없다. 궁상떨기론 세계 1등이다. 예쁘고 젊은 여성을 욕망하지만, 비루한 현실을 바꿀 순 없다. 그가 처한 노란 장판의 현실은 더없이 찌질하고 구질구질한데, 끝내 이 자기혐오는 곧 자기 모에화에 대응된다. 이 결여는 상업 영화로 가면 낭만파 조폭으로 탈바꿈하고, 외부의 폭력에 대항하는 소시민 남성으로 확장된다. 대개 이런 서사에선 유구한 전통 관념을 답습하고, 이를 너무나 당연한 전제로 제쳐놔 버린다.

‘비루하고 찌질하지만 살아있는 나’에 빠져버린 자의식 과잉, 이에 대한 대중의 신물은 당연하다. 특히 이 감성은 서사적 허구로 그치지 않는다. 2018년에 이르러 증명되었다. 위와 같은 서사를 만들어 거장의 자리, 대배우의 자리에 올랐던 수많은 예술인들. 그들 중 일부는 단단한 카르텔 속에서 성폭력 가해자란 혐의를 지워버렸다. 흥미로운 건 이들의 변명이다. 변명은 하나같이 ‘눅눅한 비닐 장판에 발바닥이 쩍 달라붙었다 떨어지는’ 서사를 닮았다. “괴롭다.”, “폭로로 인해 고통스럽다.”, “그럴 줄은 몰랐다. 관습이었다.” 마치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이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억울함과 괴로움을 호소하기에 바쁘다. 을의 위치에서 고통받았던 피해자들의 외침은 은근히 덮고, 그 위에 자기 연민에 빠진 변명만 잔뜩 늘어놓는다. 관습 속에서 어쩔 수 없었던 나, 지금에 와서 괴로운 나, 폭로로 인해 고통스러운 나, 그래서 불쌍한 나. 자신의 비루함에 푹 빠져버린 나르키소스들의 얼굴은 허구가 허구로 끝나지 않음을 재확인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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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공연계 #METOO #WITHYOU 운동 ⓒ 김나윤


노란 장판이 허구에만 깔려 있지 않다는 걸 확인한 이상, 사회적 약자를 지우는 유별난 자기애를 더 이상 두고 볼 순 없다. 이제 관습적으로 사용해왔던 도상들 -비체로서의 피해자, 섹슈얼하게만 표현되는 여성, 개그의 소재가 되는 성 소수자-은 서사의 변명 뒤에 숨지 못한다. 일부에선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거냐’, ‘이렇게 예민하게 굴면 예술의 다양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반박도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하지만 허구가 허구로 끝나지 않으며, 서사 속에 담긴 개인적·사회적 자기연민이 얼마나 기만적인지를 확인한 대중은 눈감고 넘어가 줄 아량을 소진했다. 개그는 개그일 뿐, 오해하지 말자. 영화는 영화일 뿐, 예민하게 굴지 말자? 이제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재현의 딜레마


허구 속에 담겨 있던 조악한 현실. 이와 같은 지평에서 현실을 담는 허구의 조악함 역시 지적되고 있다. 이제 서사엔 재현의 윤리가 요구된다. 공동체의 아픔을 재현하는 것, 현실의 폭력을 재현하는 것에는 강한 저항이 따르며, 대중적 촉각이 곤두세워진다. 일차적으론 상업적 성공을 위해 실화가 부수적으로 이용되는 건지를 살피고, 이차적으론 재현의 그 자체의 폭력성을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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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토일렛> 시놉시스 ⓒ 스토리제이


흥미로운 건 두 번째 지적이다. 이 시대에 이르면 재현에 대한 담론은 실화가 어떻게 이용되는가를 넘어서, ‘재현 그 자체의 의미는 무엇이냐’로 확장된다. 작년, 영화 <토일렛> 논란과 영화 <세월호>의 클라우드 펀딩 논란은 이 같은 맥락 위에 있다. 영화 <토일렛>은 강남역 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삼았다는 의혹을 받아 (감독이 해명하긴 했지만) 날카로운 비판을 받았고, 영화 <세월호>는 세월호 참사를 대형 블록버스터 영화로 제작한다는 사실로 인해 분노의 물결을 일으켰다. 전자가 택한 스릴러, 후자가 택한 블록버스터란 장르가 일차적으로 지적되었다. 그리고 사회적 비극을 이야기로 재현하는 것에 대한 반감 역시 심심치 않게 발견되었다.

두 번째 지적은 재현의 한계와 맞닿아 있다. 재현이란 곧 현실을 모사하는 것을 이르며, 응시하는 자의 시선을 통해 현실이 재구성된다는 점에서 폭력성을 내포한다. 탈식민지 문화비평가인 가야트리 차크라보티 스피박의 주장을 잠시 빌려보자. 그는 타자의 삶을 대상화하고 스스로를 객관적인 재현 주체로 세우는 지식인과 예술가는 오류와 환상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지적한다. 재현 주체는 언제나 제삼자의 입장에서 재현 피사체를 바라본다. 그리고 이 재현은 완전무결한 모사일 수 없다. 인간의 감각과 이성으론 철저한 현실 재현이 불가능하거니와, 거기엔 창작자로서의 욕망이 투영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완벽한 현실의 모사란 판타지에 불과하며 이는 재현 피사체에는 일종의 폭력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그렇담 비극적인 사건은 이야기가 재현할 수 없는 것일까. 그 재현 불가능은 ‘당장’의 아픔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사회적 제도 마련과 인식 변화를 거친 후에 이야기화 될 수 있는 것일까. 정치적으로 옳게 재현된다면 그 재현은 바람직한 재현일까. 상대적 인식 때문에 실화 속에서 놓친 건 어떻게 되는 걸까. 이야기가 그 모든 것을 신경 써야 하는 걸까. 그럼 무엇이 이야기될 수 있을까. 고민만 부유한다.

허구가 더 이상 허구로 그치지 않고 이야기가 이야기 안에서만 작동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한 상태로선 혼란스러울 따름이다.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는 부디 ‘더 신중해 주길’, ‘누군가의 아픔을 생각해 주길’ 바랄 뿐. 어떻게 해야 한다는 명확한 방향성 제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럼 예술은, 이야기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때, 그 사람의 이야기

그때, 흥미로운 연극 하나를 만났다. 연극 <그때, 변홍례>는 재현의 결여를 발견한다. 그리고는 이야기의 한계를 말한다. 시작은 1931년 실화에서부터다. 마리아(변홍례) 살인 사건이란 실화를 가져와 놓고, 관객에게 신문기사를 보여주며 연극의 근원이 어디인지를 분명히 짚어준다. 신문기사의 문자는 다음과 같다. 조선인 하녀 변홍례(마리아)가 자신이 일하던 철도국 관사에서 처참히 살해당했다. 수사 당국이 수사 중이다. 연극은 1931년 7월 31일 자 신문기사에서 키워드를 뽑아내어, 실화를 재현하고 거기에 살을 붙여 서사를 만들어 나간다.

이 작품은 무성영화 방식을 차용하여, 이건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라는 것을 비유적으로 못 박는다. 현실의 영역인 기사에서 시작하여, 허구임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무성영화 방식으로 변홍례 사건을 이야기화하는 것이다. 주제와 방식의 연결은 온당하다. 다만, 이는 양날의 검이다. 무성영화 방식이 선사하는 초장의 흥미로움과 독특함은 분명한 공이지만, 이로 인해 극중극이 말하는 욕망은 다소 희미해진다. 형식의 흥미로움이 극중극의 이야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고민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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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그때, 변홍례> 공연 사진 ⓒ 극단 하땅세


극중극은 탐정소설을 닮았다. 변홍례의 사건을 추적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실패한 탐정의 뒷모습으로 마무리된다. 변홍례를 죽인 범인은 법의 심판을 받지 않았고, 조선인과 내지인이 유별한 사회에선 탐정도 더는 힘을 쓰지 못한다. 그렇게 허무한 극중극이 끝나고 배우와 스탭은 자축한다. 음악을 연주하고 하하 호호 웃으며 연극이 끝났고 선언한다. 단 두 사람, 변홍례 역의 배우와 탐정 역의 배우만이 이대로 끝내선 안 된다고 반박한다. 하지만 연출은 연극이 ‘필사활동(必死活動)’했으면 그만이라며, 변홍례 역의 배우만 두고 무대를 빠져나간다. 빔프로젝터는 사건 기사를 비추고 그 앞의 변홍례 역의 배우만이 무언가를 뻐끔거리는 채 엔딩. 현실에서 시작한 작품은 무성영화 방식을 차용한 탐정 서사로 극중극을 메우곤, 다시 현실로 빠져나가 버린다. 남는 건 관객과 변홍례 역의 배우, 단 둘 뿐이다.

엔딩이 주는 허무함은 연극의 한계, 즉 예술의 한계를 환기한다. 결국 작품은 그때, 변홍례의 실화를 연극이 가져왔을 때의 가능성과 한계를 말한다. 기억되지 않는 조선인 하녀의 일화를 가져와 관객과 배우에게 이해시켰다는 건 연극의 가능성, 변홍례 사건을 제대로 밝혀낼 수 있는가, 제대로 재현해냈는가 하는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건 연극의 한계다. 이야기를 완성시키면 그뿐이라는 작품 속 연출의 태도. 그 연극인으로서의 욕망은 다시 극중극 속 욕망과 맞닿으며 이 작품은 거대한 욕망의 총체로 거듭난다. 다시 말해, 일제강점기 당시 인간 군상들의 욕망이며, 이를 현재에 소환하는 이야기꾼들의 욕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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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그때, 변홍례> 공연 사진 ⓒ 극단 하땅세


그럼 연극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야기는 힘이 없는가. 투덜거림 끝에 도달한 건 그 한계를 인정하는 태도다. 스피박의 표현을 따르자면 완벽한 재현은 오류고 환상임을 인식하는 것. 모든 건 인정에서부터 시작한다. 이야기는 현실을 완벽하게 모사할 수 없고, 필사활동 끝에 다다른 곳은 연극적 허구라는 것. 우린 변홍례를 완벽하게 파악할 수 없으며 연극 이후의 이야기 역시 알 수 없음을 연극이 말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연극의 가능성을 상기시킨다. 비록 그것이 완벽한 모사가 되고 복원이 되진 못하겠지만, 재현의 존재 이유 역시, 재현의 윤리 속에 있다. 조선인 하녀의 욕망이 우리 시대에 재현되었듯, 거대 담론 밖으로 스러져간 작은 서사들을 끊임없이 궁금해하고 천착할 때 이야기의 재현은 비로소 자리를 찾게 된다. 재현이 무언가를 망각하지 않기 위한 투쟁에서 비롯된다면, 현실의 완벽한 카피본이 되진 못해도 유의미한 패러디가 되지 않을까. 그게 <그때, 변홍례>를 통해 확인한 재현의 가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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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그때, 변홍례> 공연 사진 ⓒ 극단 하땅세


허구의 조악함 속에서 현실의 비극을 읽어내고, 허구가 현실을 완벽히 모사하지 못함을 확인한 때다. 노란 장판 영화엔 신물을 내고, 그 날의 아픔을 재현하겠다는 홍보 문구에 의심의 눈길부터 보내게 된 작금엔, 재현 불가능성을 말하는 게 훨씬 유쾌하게 느껴진다. 지금껏 오류와 환상에 사로잡혔음을 인정하고, 한계를 속 시원히 털어놓는다면 허구의 가능성은 무한히 확장될 테다. 우리가 재현해야 할 목소리는 무엇인지, 재현하여 기억해야 할 입자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재현할 때의 한계는 무엇인지를 이야기 스스로가 인식한다면 말이다. 그리고 이 끊임없는 자기반성과 미끄러지는 곳을 향한 관심은 연극을, 이야기를, 예술을 사랑하게 만드는 단 하나의 이유다.



<참고>
박형준, 재현의 윤리: 타자의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
영화부산 vol 23(통권 63호), 영화부산,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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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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