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현실로부터 도피한 그곳에서 내가 발견했던 것은_마르크 샤갈

글 입력 2018.06.03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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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염주의보가 내린 주말이었다. 6월 초에 폭염이라니 앞으로 어떡하나 싶으면서도, 8월 중순보다는 덜 더울 거라 믿으며 강남으로 길을 서둘렀다. 서울은 언제나 내가 살던 지방 도시보다 훨씬 더 덥고 훨씬 더 추운 도시였다. 그런 서울에서도 사람들이 몰려드는 강남의 여름은, 실제로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서울의 다른 곳에 있는 학교에 있을 때보다 숨이 턱 막혔던 기억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날도 태양은 무척이나 뜨거웠고, 햇빛을 먹고 사는 아스팔트는 그보다 더 뜨거운 열기를 뿜어냈다.

 그렇게 푹푹 찌는 날 강남에 갔던 이유는 신논현역 근처에 위치한 M컨템포러리에서 열리는 마르크 샤갈의 전시를 보기 위해서였다. 현실에 발을 딛고 서있는 것 자체가 버거운 요즘,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가진 샤갈의 작품이라면 일종의 도피처가 되어 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1] 러시아 마을 Russian Village.jpg
Marc Chagall, Russian village (1929)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 ADAGP, Paris - SACK, Seoul, 2018, Chagall ®


 이번 전시에서 가장 보고 싶었던 작품은 제1부, 샤갈 인생의 전반부를 다루고 있는 파트에서 볼 수 있는 < 러시아 마을 > 이라는 작품이었다. 유태인이자, 지금은 벨라루스지만 당시에는 러시아제국이었던 비뎁스크에서 그는 유년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비뎁스크에 가보기는 커녕, 그곳에 대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지만 나는 비뎁스크를 그린 < 러시아 마을 >에 자꾸만 애착이 갔다.

 어떤 작품을 볼 때 하늘, 눈(雪), 물결을 주의깊게 살펴보곤 한다. 그들이 그림의 생동감을 결정하는 대상이라고 생각해서 그렇다. 결국 모두 빛과 관련된 것들인데, 작품 속에서 이들이 반짝이거나 아름답게 물들어있을 때, 나는 그 작품에 '감명'을 받곤 하는 것이다. 그런데 < 러시아 마을 >은 그동안 빛이라는 이유로 깊은 감동을 느꼈던 다른 작품들과는 조금 달랐다. 하늘은 누군가 검은 물감을 떨어뜨리고 휘저어놓은 것같았고, 그런 하늘이 비쳐서 그런 건지 마을이 눈으로 뒤덮여 있음에도 '새하얗지'가 않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나는 이러한 비뎁스크의 모습에서 따스함을 느꼈다. 샤갈은 비뎁스크가 아름답지 않았거나 그곳에서 우울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굳이 화려하게 그곳을 묘사하지 않아도 충분하기에 이렇게 그린 것 같았다. 위태로워 보이는 비탈길을 오르는 일도 어린 샤갈에게는 그저 정겨운 놀이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제 1부 꿈, 우화, 종교 - 영혼의 정원展 02.jpg
 
제 1부 꿈, 우화, 종교 - 영혼의 정원展 04.jpg
 

 그러한 따스함은 사실 < 러시아 마을 > 뿐만 아니라 마르크 샤갈의 작품 전체에서 느껴졌다. 전시는 우리가 '마르크 샤갈'하면 떠올리는 유명한 작품들보다는 그가 생전에 남긴 삽화들을 주로 소개하고 있었다. 주제는 다양했다. 라퐁텐의 < 우화집 > 에 들어있는 삽화도 있었고, '자만', '나태', '성욕' 등을 주제로 한 삽화도 있었다. 다른 전시에서는 삽화가 단순하고 작을 뿐만 아니라 삽화가 담고 있는 이야기를 모르면 크게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 쉽게 스쳐지나가곤 했었는데 이번엔 달랐다.

 샤갈이 동물을 좋아했기 때문인지 삽화 속 동물들은 동판화에 에칭으로 그려져 투박하고 거칠었음에도 불구하고 생동감이 느껴졌다.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악함을 표현한 삽화도 마찬가지였다. 동물의 얼굴을 가진, 자만스러운 사람을 그린 삽화는 표정만 놓고보면 사진이라고 해도 무색할 정도로 자만심이 묻어나온 그 순간을 포착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마르크 샤갈의 삽화에는 '온기'가 흐른다고 해야겠다. 살아있지 않기에 혈색이 없고, 흑백이기에 색채도 없었지만 어떤 체온이 느껴졌고, 따듯했으며, 자연스레 시선이 머물고자 했다.

   
4]두개의 파란 옆모습 이중초상과 빨간 당나귀Two Blue Profiles and a Red Donkey.jpg
Marc Chagall, Double profil bleu et âne rouge (1980)
gouache and pastel on paper, Private Collection 
© ADAGP, Paris - SACK, Seoul, 2018, Chagall ®
 

 뿐만 아니라 샤갈의 작품은 당연히 독특했다. 위의 그림만 해도 두 개의 얼굴이 나란히 붙어있고, 빨간 당나귀는 식탁이 되어 이런 저런 음식이 놓여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샤갈의 작품이 전혀 알아볼 수 없는,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과 완전히 별개의 것은 아니었다. 와인잔, 컵, 접시, 나이프, 창문, 바구니, 사람 이 모든 것들은 일상 속에서 흔히, 아니 매일매일 마주치는 것들이지 않은가. 전시에서 만난 샤갈의 작품음 모두 이런 식이었다.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대상을 재료로 삼았으나,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리지는 않았다.

 샤갈은 화폭에서 사람의 얼굴을 상하 반전시켜서 그린다든가, 늘 하늘에 붙어 있는 달을 밑바닥으로 끌어내리는 일 따위를 했다. 그가 보여준 작품들은 온전히 현실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는 그 속에서도 위트있는 상상을 했고, 즐거움을 찾았으며, 그럼으로써 우리에게 신선함과 행복을 선사했다. 그러니 우리가 환상적이라고 여겼던 샤갈의 작품은 현실을 약간 비틀어놓은 것일 뿐이었다. 현실을 희망으로 채우는 일이 살아가는 동안 해야 할 일의 전부라고 했던 그의 말이, 이렇듯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찌는 듯한 도시의 더위 속에서, 삭막한 빌딩숲에서 살아가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오히려 도시가 시골보다 어떤 상상을 하고 낭만을 꿈꾸는 일이 더욱 힘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모든 게 분명하고 정확하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는 도시에서 흐릿하고 실체가 없는 무언가를 추구한다는 건 바보같은 짓, 그 이상으로 여겨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샤갈이 말했듯이 그럼에도 우리는 현실 속에서 반짝이고 아름다운 것들을 찾을 수 있고, 그런 것들로 우리의 삶을 채워나가야 한다. 어려운 일이지만 동시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끊임없는 전쟁으로 점철된 20세기를 살았던 샤갈이 먼저 그 일을 성공적으로 해냈으니 말이다. 그건 단지 '시선'의 문제다. 현실로부터 벗어나고자 들어섰던 전시에서, 내가 현실의 따스함과 상상만을 발견했던 일이 그 증거가 아닐까.


13.jpg


전시기간 및 장소
2018. 04. 28 – 2018. 08. 18
M컨템포러리 아트센터

관람시간 
11:00am-8:00pm(입장마감 7:00pm)
휴관일 _ 매월 넷째주 월요일
05.28(월요일) / 06.25(월요일) /07.23(월요일)

도슨트 
2:00pm, 5:00pm(평일운영)
주말(공휴일 포함) 없음

입장요금 
성인(만 19세 이상) 13,000원 
학생(중/고/대학생) 10,000원 
어린이(만 3세-12세) 8,000원 

주소
서울시 강남구 봉은사로 120
르 메르디앙 서울 1층
 
문의
02.3451.8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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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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