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직접 판단을 내려 보라, '다른 방식으로 보기' [도서]

기존의 보는(그래야 할 것 같은) 방식 뛰어넘기
글 입력 2018.06.03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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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얼마간 모 미술관에서 도슨트 활동을 한 적이 있다. 처음에는 미술 작품에 담긴 이야기를 관객에게 설명할 수 있다는 보람 때문에 시작한 일이었다. 그런데 도슨트 활동을 하며 가장 즐거운 순간은 관객이 미술 작품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 할 때,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그들에게 전해 듣고 감상의 지평이 넓어질 때라는 걸 깨달았다. 작품을 설명해주어야 하는 도슨트인 내가 관객의 감상을 들을 때 기쁘고 즐거웠다는 건 다소 모순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이었다.

이때 느낀 즐거움은 줄곧 생각하던 예술 감상의 자유로움을 맛보는 데서 비롯된 감정이었다. 작품이 주는 감동에 대해 틀릴까, 맞을까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속에 떠오르는 이야기를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는 과정이 일어나기를, 나는 은연중에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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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 외 4명이 공동으로 만든 책 <다른 방식으로 보기>의 원제 ‘Ways of Seeing(여러 가지 보는 방식)’이 뜻하는 함축적인 의미는 내가 지난날 생각했던 감상자의 태도와 비슷한 맥락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 그의 제안은 지금으로부터 40여년 전, 모두가 표준적인 보는 하나의 방식(The way of seeing)이 있다고 당연하게 믿을 때였다. 그래서 역자의 말에 따르면, 1972년 비비씨BBC에서 방영된 존 버거의 강의 시리즈 <다른 방식으로 보기(Ways of Seeing)>는 거의 난폭하다 할 정도로 영국의 제도화된 강단 미술사학의 암묵적 전제를 공격하는 일이나 다름 없었다. 그가 보는 방식에서 '다른 것'을 제안하는 순간 자연스레 보수적인 미술 시가의 ‘보는 방식’을 전복시키기 때문이다.


시각예술은 언제나
어느 정도의 보호영역 안에서 존재해 왔다.
그 영역은 신비스럽고 성스러웠지만
물질적이기도 했다.
 … 
현대의 복제 기술이 해낸 것은
예술의 권위를 파괴하고 예술을
-혹은 새로운 기술로 복제한 예술 이미지를-
그 어떤 보호영역으로부터 떼어낸 일이다.
… 
하지만 이런 변화를 인식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39쪽
 

존 버거는 카메라의 발명으로 예술 작품을 보는 방식도 한 차례 변화를 겪었음에도 "이런 변화를 인식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며, 서문에서 "사십 년 전에 이 책을 썼지만 나는 아직도 이 책에 담긴 생각들을 믿고 있다"고 말한다. 그가 제안한 생각을 스스로 '아직도', '믿어야' 한다는 서술은 지금의 예술 감상 활동이 그리 자유롭지 않다는 방증이 아닐까?

그렇다면 왜 자유롭게 보는 것이 어려운가? 혹은 자유롭게 보지 못하도록 만드는 외력은 무엇인가? 존 버거는 이와 관련하여 특권을 지닌 소수가 지배계급의 역할을 정당화할 수 있는 빌미를 만드는 과정으로 ‘신비화’를 언급하며, 한 가지 재미있는 예를 든다. 바로 프란스 할스(Frans Hals)에 대한 연구서 사례인데, 연구서는 할스에 관해 가장 권위 있다는 저작이지만 존 버거는 미술사 연구로서는 그저 ‘평균 수준의 평범한 책에 불과’하다고 평가한다.


조화로운 융합(harmonious fusion)이라든가
잊기 힘든 놀라운
콘트라스트(unforgettable contrast),
 딱 알맞은 굵기로 비할 데 없이
힘차게(a peak of breadth and strengh)
등등의 단어들은

이 그림의 이미지가 불러일으키는 정서를,
체험된 삶의 차원에서 벗어난,
이른바 ‘미술 감상(art appreciation)’이라는
차원으로 이동시킨다.

그럼으로써 모든 갈등과 분쟁의
골치 아픈 문제들은 사라지고,
우리에겐 영원히 변함없는 ‘인간 조건’만 남는다.
그리고 그림은 정말 놀라운 물건이 된다.

- 17쪽
 

존 버거가 연구서를 비판하는 이유는 할스가 그림을 그릴 당시, 대상에 품었을 수 있는 어떤 감정도 작품 해설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연구서 저자는 주장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단지 그림의 구도나 구성이 어떤지 살피며 그림을 ‘신비화’하는 과정에 집중한다.
 

화가와 그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말해 주는
정황적인 증거 같은 것도 없다.
그러나 그림들 자체가 그런 증거가 될 수는 있다.
즉 한 그룹의 남자와 여자들을
타인인 화가가 보았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이 증거를 검토하여 당신 스스로 판단을 내려 보라.

- 17쪽
 

이 ‘신비화’된 그림에 대해 존 버거가 비판하는 지점도 흥미롭지만, 그의 대담한 권유는 더욱 흥미롭다. “당신 스스로 판단을 내려 보라”고 말하는 그는 독자가 그럴 수 있도록 정황적 증거까지 제시한다.

그림을 그릴 당시 프란스 할스는 이미 여든을 넘긴 노인이었으며, 가까스로 연명해가는 처지였다. 그는 평생 빚에 쪼들려 지냈으며 자선기관이 제공하는 자금으로 추위를견뎌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자선기관을 운영했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초상화를 위해 할스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존 버거는 이 상황 자체를 “화가와 피사체 사이의 관계에 대해 말해주는 증거”로 보며, 독자가 주체적인 감상을 해낼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이 연구서를 쓴 저자를 일컬어 “작품을 보고 직접 판단 내리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존 버거의 말은 전문가의 권위를 일반 독자에게 위임하는 것 같아 매우 과감하게 느껴졌다.

*

관객의 감상을 길을 열어주는 것이 도슨트의 역할임을 깨달은 이후부터 나는 도슨트로서 준비할 수 있는 내용은 준비하되, 관객이 최대한 자유롭게 감상할 수 있도록 자주 질문하곤 했다. 하지만 그 '자유로운 감상의 길'은 생각만큼 잘 열리지 않았다. 질문을 던지면 때에 따라 아무 답이 없을 때도 있었고, ‘잘 모르겠다’는 답변이 돌아온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충분한 시간 동안 작품을 감상하지 못했다면 정말 머릿속에 떠오르는 감상이 없을 수도 있지만 그런 경우를 제외하더라도 나는 감상에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을 종종 보았다. 그래서도 존 버거가 언급하는 ‘두려움’의 실체가 새로웠다. 그림을 신비화하는 과정에서 개입하는 권력, 그 권력이 은연중에 만들어버린 예술과 감상자의 거리, 그 거리를 탄탄히 뒷받침하는 실체가 어쩌면 ‘두려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술작품 앞에서 감상자는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아마 감상자가 예술 작품 앞에서 은연중에 느끼는 두려움을 벗어버리는 정도와 비례하지 않을까. 카메라의 발명 이후 원작의 아우라가 파괴되었을 때 사라질 것 같던 '신비화' 과정이 다른 방식으로 개입하는 걸 보면, 예술작품과 감상자의 거리를 만들어내는 외력의 힘은 그만큼 강한 것 같다. 그래서 그 두려움을 쉽게 허물기는 어려울 것이다.
 

과거의 예술은
더 이상 과거의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권위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이미지의 언어가 들어섰다.

이제 중요한 것은
그 언어를 누가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는가 하는 것이다.

- 20쪽


하지만 핵심을 파악하면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 존 버거가 제안하는 '다른 방식으로 보기', 혹은 '여러가지 보는 방식'의 핵심은 감상자의 주체성이다. 과거의 예술이 더 이상 과거의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보는 방법'에 표준적인 하나의 방식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누가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는가'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게 됨을 기억하면 된다.

*
 
책 <다른 방식으로 보기>는 차례로 번호가 매겨진 일곱 편의 에세이로 이루어져 있다. 네 편은 글과 이미지를 같이 사용했고, 세 편은 이미지만을 사용하여 이미지를 보고 더 심층적인 논의로 넘어가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전문적인 예술서를 어려워하거나 부담스러워하는 이들도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좋을 것 같다. 필자는 주로 1장에 대한 내용을 다루었지만, 다음 장에서 차례로 예술에서 페미니즘, 자본주의 사회에서 유화의 문법과 유화의 문법을 닮은 광고와의 관계 등 그림을 보는 방식에 대해 날카로운 통찰을 얻어갈 수 있다.


부자들을 위해
새 눈에 대해 너절한 글을 쓰는 것은
예술이 아니다.

계속 싸워 나가시기 바랍니다!

2012년 6월
존 버거
 

서문에서 그가 일본 시인 고바야시 잇사의 짤막하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시를 인용하며 “계속 싸워 나가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한 이유를, 책을 읽고 난 후 알 수 있었다. ‘다른 방식으로 보는’ 행위는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던 기존의 방식으로 보는 행위에 대항한 싸움과 같기 때문이다. 사십 여년이 흐른 지금에도 그가 제안한 '다른 방식으로 보는 법'은 보편적인 방식으로 대중에게 인식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싸움은 현재 진행 중이다.




이서연 (1).jpg


[이서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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