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웨딩드레스가 더 이상 모순적이지 않을 수 있도록 - 디어 마이 웨딩드레스전

글 입력 2018.06.06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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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비혼주의자면서 웨딩드레스는 입어보고 싶다는 모순된 생각을 가진 사람이다. 제도와 관습을 타파하고 그를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으로 비혼을 추구하면서도 사회가 여성의 로망이라고 말하는, 즉 여성을 그 불합리한 제도권으로 끌어들이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는 ‘웨딩드레스’에 대한 미련은 버리지 못해서 제도권과 비제도권 사이 어딘가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사실 전시를 보러 오면서 걱정이 많았다. 이런 애매한 정체성을 가진 내가 과연 전시가 주는 어느 메시지에라도 공감할 수 있을까.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전시 자체가 취하고 있는 스탠스조차도 제도권과 비제도권 사이 어드매에 있어 어떤 부분에선 매우 공감하고, 어떤 부분에선 자기모순을 심화시켜가며 전시를 즐길 수 있었다. 전시는 결혼의 행복함을 말하면서도 결혼이 여성을 억압하고 있다고 말했고 웨딩드레스가 여성을 옥죄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웨딩드레스의 아름다움을 찬양했기 때문이다.



결혼, 행복과 불행 사이

이사림, Happily ever after, 2018, digital print, 90x60cm.jpg
 

전시장에 들어가자마자, 전시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결혼에 대해서 말한다. 서로 ‘사랑하는’ ‘남녀’들이 있고, 그들은 모두 결혼을 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맺어지는 순간. 서로가 서로에게 법적 보호자가 되는 그 순간. 커플들은 그 누구보다 행복해보인다. 물론 결혼을 하는 순간만으로는 이들의 결혼생활마저 행복하리라고 장담할 수 없다.


주연(47)
“감사해요. 이렇게 예쁜 드레스를 입고 결혼을 한 지 벌써 스무 해 하고도 몇 년이 더 흘렀네요. 가끔 생각나요. 당신과 함께 나누었던 약속과 시간들. 정말 사랑했다고 생각해요 그때의 난. (중략) 가장 예쁘게 웃을 줄 알았던 이십 대의 나에게 좋은 추억 함께 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하지만 이 방의 주인인 ‘주연’이란 인물의 말로 봐서는 아마 결혼생활도 행복했을 것이라 예측 가능하다. 수많은 연애소설, 드라마처럼 “모두모두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결말로서의 결혼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실과 그로인한 행복. 이런 행복이 또 어딨을까. 전시장 초입에서 보여준 ‘결혼’은 만약 실현만 된다면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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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현실은 동화 같지 않다. 동화적인 낭만을 얘기하던 웨딩드레스가 땅에 널부러져 있다. 현실에서 맞닥뜨리는 문제들은 그다지 낭만적이지 않다. 지극히 현실적이라 때로는 냉정하다고 까지 느낄만한 문제들이 산재해있다. 어쨌든 결혼은 현실이고,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오던 두 사람이 함께 간다는 것은. 그리고 아이를 낳을 경우 다른 이의 인생까지도 책임져야한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야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많은 것을 희생하기를 요구받았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던 ‘나’를 지우고, 가정 안에서 아내와 엄마로서만 헌신하기를 강요받은 것이다. 바닥에 널부러진 드레스를 보고 있자니 결혼 이후 여성들의 꿈과 삶이 어떻게 무너져 내렸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아 처참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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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하이신의 ‘Red Carpet Dream #4’은 그 처참한 기분을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해당 작품에서 신부는 결혼을 하며 계단을 ‘올라가고’있지만, 사실은 내려가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여성들이 결혼생활을 소위 ‘평화롭게’ 지키기 위해서 고군분투 하면 할수록, 스스로를 희생시키면 시킬수록 그들의 지위나 위치가 낮아지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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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주의 ‘딸을 위한 책’도 마찬가지다. 해당 작품은 ‘너를 위한 일’이랍시며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언어적인 폭력들에 대해서 다뤘는데,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출산에 대한 말이었다.


“그래도 가정을 꾸리고 아기를 낳아봐야해. 그게 여자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니까.”


여성의 얼굴을 자궁으로 치환시킨 그림은, ‘여성의 삶’을 결혼과 출산 그리고 육아에만 한정 짓는. 즉 여성을 걸어다니는 자궁으로 보는 사회의 시각을 보여준다. 각각의 여성 개개인이 어떤 사람인지, 뭘 원하는 사람인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여성은 집안에 매여서 ‘출산’하고 ‘육아’하길 강요받는다. 그리고 그 강요의 방식은 결혼으로 이뤄진다. 미혼의 여성은 결혼할 것을 종용당하고, 결혼을 한 여성은 출산을 할 것을 종용 당한다. ‘결혼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출산’까지도 당연히 ‘허락’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 사회에서 말하는 결혼이 여성에게 가하고 있는 폭력 중 하나인 것이다.



웨딩드레스, 억압과 선망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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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를 가기 전부터 가장 기대했던 것은 ‘웨딩드레스존’이었다. 사진으로만 봐도 너무 아름답고 황홀하기 그지없어서 꼭 그 공간에 들어가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웨딩드레스’에 대한 전시답게 웨딩드레스존에 가기 전에도 수많은 드레스들을 볼 수 있었는데, 각 방마다 마치 주인공처럼 조명을 받으며 서 있는 웨딩드레스들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그리고 대망의 웨딩드레스 존. 예상대로 황홀하기 그지없었다. 삼면이 거울로 돼있어 웨딩드레스가 끝없이 늘어져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각각의 아름다움에 압도당했다. 웨딩드레스존은 웨딩드레스에 대한 로망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공간이었다. 앙드레김의 웨딩드레스들을 전시해놓은 공간은 말할 것도 없다. 동양풍의 느낌을 적절하게 섞은 웨딩드레스들은. 단순한 감탄을 넘어 웨딩드레스를 선망하게 만들었다. 전시는 꽤 많은 공간을 할애하고, 공을 들여서 웨딩드레스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찬양을 하고 있었다.


네자켓에키시(Nezaket Ekici)_ Inafferrabile_Greifbar Fern Performance Installation 2004_ photo by A.D._ Raumansicht1a.jpg
 

하지만 그와 동시에 전시는 웨딩드레스 그 자체가 여성을 옥죄고 있다고 말한다. 네자켓 에키시의 ‘Inafferrabile’은 폭과, 팔의 너비가 너무 좁게 설계됐지만 밑단만 끝없이 늘어져있는 드레스를 입고 끝없이 자크를 올리려 노력하는 여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팔이 좁게 돼있기 때문에 팔이 제대로 뒤로 넘어가지도 않고, 팔이 뒤로 넘어간다고 할지라도 등 부분의 폭이 너무 좁아서 제대로 닫힐지 의문이다. 구조적으로 절대 잠글 수 없는 지퍼를 잠그려고 영상 속 여성은 애를 쓴다. 마이크를 통해서 생생하게 전해져오는 그의 숨소리는 관객들에게 그 힘겨움을 전해준다.

쓸데없이 길게 늘어진 밑단을 만들 바에야 그 천을 팔과 등의 폭을 넒게 하는데 쓰는게 나았을 텐데. 폭이 넓어 아름다우면서도, 여성을 옥죄는 웨딩드레스는 그 자체로서 여성에 대한 억압이다. 보통 웨딩드레스는 ‘아름답게’ 디자인 돼있을 뿐, 입는 여성에 대해서 배려한 경우가 거의 없다. ‘날씬해야’ 예쁘다며 결혼 전 웨딩 다이어트에 들어가는 수많은 여성들의 모습에서도 에키시의 작품과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아름다움만이 강조된 디자인. 그 자체로서 코르셋이 돼버리는 드레스. 웨딩드레스 그 자체가 여성을 옥죄고, 여성을 억압하고 있던 것이다.

네자켓 에키시의 작품과 마주보고 있던 장지아의 on my mark는 그 억압적인 ‘웨딩드레스’조차도 선택할 수 없는 이들에 대해서 생각게 했다. 결혼이 허락되지 않은(우리나라 기준) 성소수자는 그 답답한 웨딩드레스조차 선택할 자유를 박탈당했다.



사회가 만들어낸 자기모순

전시는 결혼의 행복함을 말하면서도 결혼이 여성을 억압하고 있다고 말하고 웨딩드레스가 여성을 옥죄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웨딩드레스의 아름다움을 찬양한다. 이 아이러니 속에서 나는 씁쓸하게 미소지을수 밖에 없었다. 내가 비혼을 외치면서도 웨딩드레스를 선망하는 그 자기모순적인 마음을 전시가 정확히 짚어낸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비혼을 하고싶어하는 이유는 정말 ‘평생 혼자살고 싶어서’가 아니다. 사랑하는 연인의 법적 보호자가 된다는 건 분명 달콤하다. 하지만 나는 그로 인해서 포기해야할 수많은 것들이 싫다. 나는 ‘나’로서 행복하고 싶지, 누군가의 아내로 혹은 엄마로만 행복하고 싶지 않다. 내겐 나 스스로가 너무 소중하기에, 결혼이란 이름 아래에 나를 포기하길 강요받고 싶지 않다. 그것이 내가 ‘비혼’을 외치는 이유다.

나는 이 사회가 강요하는 ‘결혼’이 싫은 거지 ‘결혼’자체를 싫어하는 건 아니다. 여기서 내 자기모순이 출발하는 것이다. 전시가 말하고자 하는 바도 마찬가지였다. 전시는 결혼은 무조건 나쁜 거라고 말하지 않는다. 결혼은 분명 행복하고 달콤하지만 그 이면엔 수많은 희생들이 존재한다고 말할 뿐이다.

사실 결혼의 행복이랑, 결혼으로 인해서 여성이 받는 억압은 꼭 같이 가야하는 게 아니다. 분리가 충분히 가능하고 결혼을 하더라도 여성으로서 억압받지 않는 방법이 분명 존재한다. 사실 비혼을 외치면서 결혼을 생각하는 나의 욕망은, 그다지 자기모순적이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을 ‘모순’으로 만드는 게 바로 사회다. 내가 ‘나를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외치지 않는 사회가 오기를. 결혼을 한다면, 정말 결혼 그 자체. 나의 배우자와 나와 함께할 삶 그 자체만을 보고 결혼을 고민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본다.




[권희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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