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영화 < 캐롤 >, 잃어버린 이름을 찾아서

글 입력 2018.06.07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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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만난 지인은 나에게 남자친구와는 잘 되어가냐고 물었다. 설마 아직 남자친구가 없어? 라며 묻는 질문은 권태로웠다. 오랜만에 나한테 궁금한 게 그것 밖에 없어? 라면서 조심스레 요즘 사람을 정리하고 있다고 답했다.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게 확실한 답일 것이다. 두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이 부럽지 않은 것은 아니다. 두 사람 사이에 얽힌 복잡한 문제들을 피하고 싶은 것만도 아니다. 복잡해져야 깊어지는 거니까. 그러나 혼자가 어느 때보다 좋다. 사람이 그립기도 하지만 때때로 찾아오는 외로움으로 사람을 만날 수는 없다. 나를 찾고 싶다. 어느 때보다 더. 사랑에 흔들리고 싶지 않다. 나는 안다. 그 두 가지를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티가 나지 않아보여도 나의 초점은 온통 상대방에게 기울어져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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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캐롤>이 아름다운 이유가 캐롤과 테레즈 둘의 사랑 때문이라고만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 둘은 누구보다 자신에 대해 고민했다. 테레즈는 백화점에서 일을 하면서도 사진을 늘 찍고 싶어했다. 백화점의 경영진은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면서 산타모자를 준다. 일할 때 쓰라고, 참 좋은 전략이다. 그녀는 초반엔 우유부단해 보인다.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친구는 사랑한다 말하지만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좋아하기는 할 것 같지만. 물론 그가 싫은 건 아니다. 하지만 그와의 유럽여행은 그렇게 신나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싸구려 사진기 앞에서 그녀는 눈을 빛낸다. 리처드, 나는 왜 테레즈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지 알겠어. 결혼은 더더욱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걸. 당신은 테레즈가 좋아하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지. 오히려 비웃었잖아. 아마 그녀와 여행을 가는 효과적인 방법은 카메라를 사주며 프랑스의 곳곳을 누비며 사진을 찍자고 제안하는 것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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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롤 역시 자유와 행복, 정체성을 찾고자 어연 10년간 겉돌며 살았다. 우아한 몸짓, 강렬한 눈빛,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옷차림이 채워주지 못하는 것들. 그녀는 존재하지 않고 남편과 시댁식구들에게 끌려다니는 삶. 지겨운 토마토젤리같은 삶. 그녀가 그 집에서 유일하게 생기있었던 건 딸과 있을 때뿐이었다. 나는 남편의 말을 비꼬아 들었다. 억지로 데려온 파티, 여기서 제일 빛나는 게 당신이란 말. 그는 왠지 그걸 즐기는 듯했다. 그게 바로 내 아내고, 내 가족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처럼. 궁금해졌다. 그녀가 빛나지 않았다면 그는 그녀를 사랑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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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롤의 남편 하지와 테레즈의 남자친구 리처드. 두 남자에겐 두 여자처럼 공통점이 있다. 사랑이란 명목으로 그의 방식으로 그녀를 휘두르려 하는 것. 남녀 구분하지 않고 세상의 모든 사람이 그에겐 연적이니까 더 불안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게 사랑하는 이에게 할 짓인가. 리처드는 지금 딴 여자에게 눈이 돌아가서 자신을 버리는 거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하지는 더하다. 그녀를 집 안에 가두기 위해 아이를 걸고 싸운다. 이건 솔로몬의 선택처럼 현명한 의도가 아니다. 캐롤이 하지와 헤어지려 하는 게 성 정체성 때문인지 자유롭게 주도적인 삶을 살고 싶은 갈망 때문인지 확신할 수 없다. 큰 틀에서는 캐롤이 원하는 모든 것, 더 자연스러운 그 모든 것들이 그녀를 이루는 정체성이란 생각이 든다.

하지는 분명 캐롤을 떠나려는 그녀를 붙잡고 가두고 싶어한다. 애비에게 외치는 단발성의 'I love her(Carol)'라는 말에 애비는 I can't help you with that. 이라고 답한다. 어차피 문제의 꼬리는 하지가 쥐어감고 있다. 그가 정말 그녀를 사랑했다면 그녀가 원하는 사이로라도 곁에 있을 수 있지 않았을까. 사랑하는 사람은 더 큰 마음으로 품을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원하는 관계가 아니더라도 상대가 더 행복할 수 있는 사이라면. 그는 사랑하는 사람은 되지 못하더라도 좋은 아버지와 친구는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정신적으로라도 든든한 사람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를 두고 캐롤이 대담하게 애비와 '노닥거린 게' 아니라, 하지가 애비처럼 터놓고 솔직한 이야기들을 받아줄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유일할 탈출구로 애비를 곁에 두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는 캐롤을 한번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에 그녀는 그를 떠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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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롤의 매혹적인 눈빛과 테레즈의 신비로운 분위기, 둘의 사랑을 보면서도 이번에는 계속 다른 생각이 들었다. 이 둘은 모두 자신을 찾으려고 애쓰는 사람이라는 것. 좀 더 명확해지고 싶었던 사람들이라는 것. 캐롤은 테레즈를 만나고 여성인 테레즈에게 매혹되고 그녀를 사랑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했다. 테레즈는 캐롤이 사 준 멋진 카메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사진이라는 또다른 정체성을 깨달았다. 캐롤이 아이와 함께하는 엄마로 남고 싶어 했지만, 테레즈를 사랑하는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싶지 않았기에 사랑하는 아이의 양육권을 넘겼다. 테레즈는 캐롤에 있어서라면 고민하지 않고 Yes를 외쳤다. 그녀를 사랑하고 돕고 싶은 마음이 확고했기 때문이다. 잘 다니던 백화점을 때려치고 모아둔 돈을 털어놓고 떠나는 미국 여행. 캐롤은 테레즈에게 사진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단순히 사진기라는 존재가 아니라 풍경 말고도 담고 싶은 사람, 그 사람을 어떻게 담을지에 대한 생각을 불어넣어준 것이다. 끌림에는 이유가 없겠지만 둘은 분명 각자 서로를 더 자기 자신답게 만들어주는 존재였던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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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과의 원치 않는 이별이란 클리셰같은데도 매번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제3자로서 둘의 이별은 생각보다 좋은 시점에 좋은 선택이었다. 이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캐롤과 테레즈가 만나는 건 이혼과정은 물론 둘에게도 갈등만 주었을 것이다. Dearest, 로 시작하는 캐롤의 담담한 편지. I miss you,  테레즈의 전하지 못한 그리움은 시간이 지나도 계속된다. 그러나 이 둘은 완전히 자신을 찾고 홀로 섰다. 남편 하지와 이별하고, 아이를 기르진 못해도 정기적으로 꼭 볼 수 있는 엄마이자, 그리고 테레즈를 사랑하는 캐롤.  어느 때보다도 긴장한 느낌으로 함께 지냈으면 좋겠다고, 사랑한다고 외치는 그녀에게 테레즈는 처음으로 망설이며 거절한다. 오만가지 생각이 다 났겠지. 한번 떠난 사람이 다시 떠나지 못한다는 법 없다는 두려움, 그렇게 아프고 슬퍼하며 그리워한 시간을 그녀가 알까하는 야속함, 여전히 그녀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고 의지만 할 것 같은 걱정. 캐롤이 없는 곳에서 그녀는 아무도 그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걸, 그녀 역시 그 공간의 누구도 필요하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계속 마음에 걸렸던 캐롤, 그리고 예전과는 달라진 자기 자신도. 리처드와 헤어지고, 수많은 인물을 사진에 담을 수 있고, 여전히 캐롤을 사랑하는 테레즈. 그녀의 심장은 발자국 소리처럼 피아노 건반을 쿵쿵 울리며 캐롤 앞에 선다. 눈빛이 많은 것을 말할 수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테레즈를 발견한 캐롤의 생기있는 눈빛, 불안한 듯 단호한 테레즈의 눈빛. 그들은 이제 함께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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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제목은 캐롤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부르는 그녀의 이름. 남편 하지가, 시댁 식구들이, 딸이, 애비가, 테레즈가 부르는 캐롤은 같은 언어지만 다른 역할과 감정, 호흡을 담고 있다. 그녀는 테레즈를 flung out of space, 우주에서 툭 튀어나온 사람이라고 했지만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테레즈만큼이나 캐롤에게 그런 수사를 붙여주고 싶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 수많은 캐롤 중에서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오래 기억되는 게 그녀가 직접 부른 자신의 이름, 캐롤이었으면 좋겠다. 상처를 한껏 받고도 아무일 없는듯 여유롭게 웃고 있는 캐롤. 다시 만난 테레즈를 어느 때보다도 눈빛으로 수많은 마음을 가득 표현하는 캐롤. 이윽고 먼 길을 돌아 그녀가 되찾은 그녀 자신, 그녀의 이름. 캐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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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피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끌림은 때와 장소를 가리란 법 없이 찾아온다. 하지만 아주 소중한 사람을 만났을 때 나는 내가 좀 더 내 자신에 더 가까워져 있었으면 한다. 그 사람을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그런 마음으로 이별을 고했다. 물론 캐롤과 테레즈와는 많이 다를 수도 있지만 나에겐 그게 맞다는 생각이 든다. 상대에게 기대기만 하는 건 서로에게 힘들 뿐이다. 눈을 마주치는 걸 잘 못한다. 하지만 다시 만난다면 많은 말하지 않고 눈을 지긋이 바라보려 한다. 그간의 모든 감정을.




[장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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