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가끔은 이름의 무게를 내려놓고 [시]

김승일 시, "대명사 캠프"
글 입력 2018.06.07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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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불길해하는 사람들. 윤곽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를 나라고만 소개하고, 너를 너라고만 부르는 사람들. 우리는 대명사 캠프에서 만날 거예요.

갈대를 그것이라고 하고. 바람도 그것이라고 하고. 그것이 그것에 흔들린다고 하면, 주문을 웅얼거리는 기분이 된다. 주문을 그것이라고 하고 기분을 무엇이라고 하면. 우리는 그것을 웅얼거리는 무엇.

당신은 어디서 살다 왔나요? 저기서요. 이럴 수가. 나도 당신처럼 저기서 왔어요. 당신의 저기와 나의 저기가 같다고 생각합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위로가 되죠. 우리는 빙 둘러앉아서. 캠프파이어의 대명사가 되려고 한다.

황당하군. 여배우더러 이름도 없이 살라는 건 사형선고죠. 그녀를 그녀라고만 불러서 속상한 사람이 생겼다. 서운하면 돌아갔다가. 돌아오고 싶을 때 돌아오세요.

이름을 많이 부르면 빨리 죽는대. 엄마, 엄마, 자꾸 부르면 빨리 죽을까봐. 나는 엄마한테 너라고 한다. 공교롭게도, 너도 나를 너라고 부르지. 죽음, 죽음, 자꾸 불러서 죽음은 더 유명해지고. 나는 나를 나라고 소개하네. 우리가 우리 속으로 더 깊숙이 들어갈 때.

대명사 캠프는 캠프의 대명사. 우리는 빙 둘러앉아서. 캠프의 윤곽만 남길 것이다. 캠프를 그것이라고 하고. 윤곽도 그것이라고 하고. 그것의 그것만 남을 때까지. 우리는 캠프파이어의 대명사. 우리는 그것에 흔들리면서. 우리는 그것을 중얼거린다.


- 김승일, “대명사 캠프”


그러고 보니 캠프를 안 간지 얼마나 되었지. 캠프파이어는 언제 마지막으로 봤더라. 사실 캠프파이어에 대한 기억은 그것 하나뿐이다. 너무 순수해 세상이 매끈매끈하기만 했던 마냥 좋았던 때, 학교 친구들과 선생님과 함께 거대한 모닥불을 만들었다. 지금 다시 보면 그 불도 조그맣겠지만, 어린애 눈에는 뭐든 크고 따뜻하게 보이는 법이니까. 어두운 밤공기는 차가워서 좋았고, 활활 타오르는 캠프파이어는 따뜻해서 좋았다. 기억 속에서만 희미하게 타오르고 있는 내 유일무이한 캠프파이어가 이 시로 인해 조금 간절해진다.

대명사 캠프에 온 사람들은 이름을 덜어낸다. 이름과 함께 이름에 얹혀진 무게도 덜고, 어깨의 짐을 덜고, 마음의 피로와 상처를 덜어내고, 윤곽만 남긴다. 대명사 캠프는 캠프의 대명사. 그 어느 캠프보다 편안하고 따뜻한 캠프여서가 아닐까. 이곳이 편안한 이유는 단지 다 같이 모여 위로를 나누는 캠프여서만도 아닐 것이고, 이곳이 따뜻한 이유는 단지 둘러앉은 한 가운데 캠프파이어 불이 타오르고 있어서만도 아닐 것이다.



#1. 안녕, 나야


나는 나를 나라고 소개하네. 전화를 걸어 나라고만 말해도 누군지 알 수 있는 사이는 가히 경이롭다. “여보세요. 응, 나야.” 얼굴을 수화기 너머에 둔 채 오직 목소리만으로 나를 소개할 때 그 ‘나’가 이 ‘나’인 줄 알아내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물론 이제는 전화번호마다 이름들을 따박따박 저장해놓을 수 있어서 이런 낭만이 많이 사라졌지만(편리함은 종종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도 때로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에서 이름을 듣지 않고도 상대가 누군지 알아챘을 때에는 나와 그 사람을 연결하는 알 수 없는 내밀한 끈이 느껴진다.

굳이 이름을 대지 않아도 나의 고유함을 아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내 이름 석자도, 내 신분도, 성별도, 소속집단도 다 필요 없다. ‘나’만 있어도, 아니 그 어떤 설명 없이도 단박에 나를 알아내는 사람들이다. 가장 추상적인 대명사로 나를 부르는 사람은 가장 구체적으로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이다. 이름을 통해 다른 이들과 나를 구별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나를 마음 속 특별한 자리에 둔 사람들이기도 하다. 많은 시간을 함께하지 않고서야 이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사람들만이 수화기 너머에서 밑도 끝도 없이 “나야”해도 나를 알아봐 줄 사람이다. 고마운 사람들.



#2. 이름의 무게


너도 너에게는 ‘나’이다. 지구 반대편에 사는 A씨도 A씨 자신에게는 ‘나’이다. 대명사란 이런 것이다. 이 수많은 ‘나’들 중에 오직 나 하나를 구별해내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니고서야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이름을 사용한다. 내 이름은 나를 ‘나’들로부터 구별해주는 편리하고도 효율적인 수단이다. 남들이 잘 알아채지 못하는 나의 고유함을 즉각적으로 각인시키는, 그래서 이름은 고유명사가 아닐까.

이름을 많이 부르면 빨리 죽는대. 처음에는 이들이 왜 이름을 불길해하는지 몰랐다. 생각해보니 이름이 너무 무거워서 깔려 죽을까봐 걱정하는 것 같기도 하다. 탁월하게도 시인은 가장 무거운 이름 하나를 가져왔다. 엄마. 엄마라는 이름에는 수많은 기대와 역할과 의무와 희생이 낙타의 짐처럼 얹혀있다. 이 짐이 줄기는커녕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망할 모성애. 그래서 엄마를 자꾸 엄마, 엄마 하고 부르면 엄마가 그 무게에 깔려 죽을까봐 두려워서, 이 시는 엄마를 대신 ‘너’라고 부른다. 엄마도, 아니 너도 나를 너라고 부른다. 엄마와 자식이 아닌 너와 나, 나와 너는 깔려 죽을 무게가 없어 자유롭다.

이름을 좋아하는 나도 가끔은 내 이름이 무겁다. 정확히 말하면 이름들이다. 내 주민등록상의 성명 말고도 나에게는 많은 이름들이 있다. 맏이, 학생, 친구, 연인, 학교 이름, 전공 이름, 무슨 무슨 직책 이름들…. 어떤 이름은 사라져가고 어떤 이름은 새로 생긴다. 거쳐가는 이름도 있고 내가 얻어낸 이름도 있고 평생을 꼬리표처럼 달고 사는 이름도 있을 것이다. 그들 이름이 때로 나를 옥죄어올 때 나는 이렇게 묻고 싶어진다. 도대체 맏이답게 굴라는 것은 무슨 명령인지. 친구 사이 혹은 연인 사이에 ‘당연한’ 법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이고, 남자답고 여자답다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말인지. 내가 속한 사회의 이름에 ‘걸맞은’ 행동을 하는 게 무슨 뜻인지, 도대체, 나다운 것과 나답지 않은 행동은 무엇인지. 어쩌면 이미 스스로도 스스로를 이렇게 목졸라왔을지도 모르겠구나.

나를 나로만 봐주세요. 이건 나 자신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알게 모르게 나는 수많은 족쇄들을 자아의 목에 채워놓았다. 가장 무거운 족쇄는 내 이름 석 자다. 20여년의 생 동안 내 이름에 쌓인 나의 성격, 인격, 습관들이다. 자아정체성은 생각보다 덜 필요하고, 덜 좋고, 의외로 괴로운 것일 수도 있다. 가끔은 내 이름의 무게를 내려놓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좀 다르게도 생각해보고, 다르게도 살아보고, 이상하고 멍청하게 저지르며 사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존재하니까, 괜찮다. 어느 이름도 붙지 않은 나는 윤곽만 남은 ‘나’ 속에서 굴레 없이 자유로울 것만 같다.



#3. 언제든지 돌아오세요


나는 이름을 좋아한다. 내 이름부터가 특별하고 멋지다고 생각한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나의 사랑을 듬뿍 받는 중이다. 또 내가 얻어낸 이름들도 많다. 내 갖은 힘과 노력과 진심으로써 쟁취해낸 이름들. 그래서 이름을 부르지 않는 이 대명사 캠프는 서운한 걸 넘어서 이해가 안 되는 수준이었다. 내 이름들이 얼마나 소중한데. 황당하군.

그런 이름들이 내 숨을 막을 정도로 무겁다는 것을 알게 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이름의 무게가 너무 커다랗고 무시무시해서 저항 한 번 못하고 짓눌려버린 적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조금만 떨어져서 숨 한번만 쉬면 이름에서 벗어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 또한 알아가는 중이다. 정신없이 이름을 쫓다가도 어느 순간 그 이름이 버거울 때,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나의 캠프를 만드는 중이랄까. 그곳은 나에게, 이를테면 이렇게 말한다. 서운하면 돌아갔다가, 돌아오고 싶을 때 돌아오세요.



#-1. 괜한 사족


정말 마음에 드는 작품을 만나면 그에 대한 글을 쓰기가 두려워진다. 나의 생각이, 나의 말이 작품을 오염시키는 기분이 든다. 작품이 상하지 않게 조심 조심 쓰다 보니 오히려 두서도 없고 맥락도 없어져 버린 것 같다. 부족한 글이지만 작품에 대한 나름의 애정 표현이랄까. 창의적이다, 기발하다, 노련하다, 깊다, 오만가지 수식어를 붙여 애정을 표현하고 싶었지만 이런 ‘평’들은 시 앞에서는 초라하다. 말 그대로 공허하다. 그래서 사족같은 수식어들은 담지 않으려 노력했다. 아, 그래도 한 마디만. 마음에 들었다.




[김해랑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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