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한 문장에 담긴 나의 세계, 김언 시집 '한 문장' [도서]

김언 시집 '한 문장'
글 입력 2018.06.11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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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한 문장」
시인 김언(金言)
발행일 2018.01.08
문학과지성사





“대상을 규정하고 단정짓는 것은
어쩌면 폭력일 수도 있다.”


얼마 전 김언 시인의 특강에서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를테면 ‘나무는 자식을 키우기 위해 뜨거운 햇볕 밑에 서 있다’라는 문장이 그렇다. 이 문장을 쓰기 전에, 과연 나무는 뜨거운 햇볕 밑에 서 있고 싶을지, 과연 나무는 자식을 키우고 싶을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물론 규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시를 쓴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일 수 있다. 하지만 “말하는 방식이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고민하여 나온 말과 그렇지 않은 말은 분명 차이가 있다”고 시인은 말한다.

이처럼 섬세하고도 신중한 시선이 시집 「한 문장」에 녹아있다. 시인은 문장 속에 대상을 가두지 않으려 경계함과 동시에 문장으로써 대상과 닮아가고자 끊임없이 노력한다.


있다

나뭇잎이 푸르고 있다. 짙푸르고 있다. 진푸르고도 있다. 간혹 연푸르고도 있는 나뭇잎이 올라가면서 더 푸르고 있다. 올라가면서 가늘고 있는 나뭇가지가 더 올라가면서 가늘고 있다. 여름 한창을 가늘고 있다. 여름이 가늘고 있다. 낮이 가늘고 있다. 한낮이 사라져 있다. 온데간데없이 있다. 부지런히 도착해 있다.


김언 시인의 「한 문장」에는 도무지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없는 시들이 가득하다. 문장들은 씨실과 날실로 엮인 직물처럼 촘촘히 얽혀 있어, 그중 한 문장을 뽑아내면 올이 풀리듯 시에 담긴 세계가 무너지는 것만 같다. 시 「있다」도 그렇다. 이 시는 낮이 밤으로 바뀌는 과정을 ‘낮이 가늘고 있다’, ‘한낮이 사라져 있다’라는 연속성을 띠는 문장으로 표현한다. 보통 우리는 낮이 밤으로 바뀌는 과정을 ‘해가 졌다’, ‘밤이 되었다’라고 표현하는데, 사실 그 과정은 스위치를 껐다가 키는 것처럼 한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가 눈앞에서 사라졌어도, 지구 반대편 혹은 어딘가에 ‘부지런히 도착해 있’음으로써 낮은 계속 낮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시집 속에서 세상은 문장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 세상은 한 문장으로 쓸 수 없는 문장의 연속이며, 그래서 한 문장 안에는 세계가 담겨 있다. 이러한 생각이 시 「내가 없다면」에 드러난다.


내가 없다면

내가 없다면 누가 있겠는가. 이렇게 말하는 내가 없다면 이렇게 묻는 누가 있겠는가. 누가 있어서 내 말을 하겠는가. 누가 있어서 내 말을 온전히 받아낼 수 있겠는가. 누군가는 한다. 일부라도 한다. 내 말의 일부이자 네 말의 일부이자 자기 말의 일부로서 그가 존재한다. 마치 내가 존재하듯이. 그렇다면 내가 없다면 나의 일부는 어디로 가는가. 나의 일부는 어디에 남아서 누구의 생각을 지배하는가. 나는 이 말에 지배당하고 있다. 이 질문에 감당을 못 하고 있다. 내가 없다면 누구라도 감당할 것 같은 이 말에 지배당하는 누가 다시 있겠는가. 누구라도 있다. 무엇이라도 있다면 그걸 붙잡고 늘어질 한 사람의 일부. 두 사람의 사이. 세 사람의 반목과 오해와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 모든 나의 일부를 누가 이해하겠는가. 나는 못 한다. 너도 못 한다. 그 역시 포기하고 있다. 좌절하기 위해서 내가 있다. 실패하기 위해서라도 네가 있다.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그가 있음을 증명하는 방식으로 내가 있다. 내 말이 있고 너의 말이 있고 그걸 받아서 써 내려가는 누군가의 날랜 손놀림이 있다. 그 손과 함께 내 손이 있다면 일부라도 있다면 네 손 역시 독창성에서 한없이 자유로운 범사가 되리라. 범사의 일부를 이루는 고유한 익명이 되리라. 눈과 함께 내리는 눈의 일부를 받아 적는 여러 사람의 손이자 단 한 사람의 손놀림. 비와 함께 내리는 비의 전부를 받아쓸 수 없는 단 한 사람의 손이자 모든 사람의 기록으로 비가 온다. 눈이 내린다. 내가 없다. 그럼 누가 있겠는가.


이 시에서는 내가 없으면 그도 없고, 그가 없으면 나도 없다. 타인 없이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철학이 시에 담겨 있다. ‘비와 함께 내리는 비의 전부를 받아쓸 수 없는 단 한 사람의 손이자 모든 사람의 기록으로 비가 온다’는 문장과 같이, 결국 비가 오는 것, 눈이 오는 것, 내가 존재하는 것은 모두 나와 타인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더불어 ‘내 말이 있고 너의 말이 있고 그걸 받아서 써 내려가는 누군가의 날랜 손놀림’으로 존재하는, 타인의 타인인 수많은 사람들이 있기에 나는 존재할 수 있다. 그래서 ‘눈이 내린다. 내가 없다. 그럼 누가 있겠는가’라는 마지막 문장과 같이, 눈은 내리고 나는 없다면 세상은 세상으로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김언 시인은 시 한 문장을 쓴 다음에 지금 방금 전에 썼던 문장을 의심하는 것처럼 발로 한참 서서 다져보고 난 뒤, 딱 한 걸음씩만 더 다음 문장을 향해 아주 짧은 보폭으로 조금씩 나아가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어떻게 보면 문장들이 포복을 통해 행진하는 느낌이 드는 거죠.
그러다 보니까 각 문장들도 중요하지만 문장과 문장 사이의 관계들이 중요하게 느껴집니다.”

(영화평론가 이동진) 출처


이동진 평론가의 말처럼 김언 시인은 세상을 써내려가는 데 있어서 한없이 신중하며 견고하다. 세상이 어떤 모습인지, 또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유심히 관찰하면서 세상의 속도에 자신의 보폭을 맞춰본다. 김언 시인의 시 속에서 세상은 제 모습과 닮아간다.

계속 변해가면서 항상 ‘지금’으로 존재하는, 이 글을 읽는 여러분에게 김언 시인의 한 문장을 전하며 글을 마친다.


“지금 말하라. 나중에 말하면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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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언(金言)
출생 1973년, 부산광역시
데뷔 1998년 시와사상 등단
수상 2009년 제9화 마당문학상, 2007년 제19회 봉생청년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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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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