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느림과 번거로움, 아날로그라는 환상 [문화 전반]

글 입력 2018.06.15 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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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몇 주 전 썼던 '느림과 번거로움, 필름 카메라가 좋은 이유(링크)'의 두 번째 편이다. 하지만 '필름 카메라가 좋은 이유 2'는 아니다. 오히려 내가 언급했던 '필름 카메라가 좋은 이유'에 대해 되려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는 글에 가깝다. 1편과 2편은 현재의 내가 필름 카메라에, 필름 카메라로 대표되는 소위 '아날로그 감성'에 대해 갖고 있는 양면적인 생각이다. 해당 글에서 나는 이렇게 썼다.


내가 필름 카메라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인간적인 프로세스에 대한 그리움에 있는 것 같다. 전자책 보다 종이책을 선호하는 이유, 편지만은 손으로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와도 같다. 아날로그 카메라의 물성은 직접 필름을 넣고 레버를 돌리고 조리개와 셔터스피드를 조절하고 찰칵, 하는 과정에 있다. 처음 필름 사진을 찍기 위해선 필름 한 통을 뜯어 살짝 잡아당겨 뺀 후 조심스럽게 카메라에 넣어 고정시키고, 뚜껑을 닫고, 레버를 한 번 감아 마무리해야 한다.


말하자면, 디지털 네이티브인 나는 아날로그 기계에 대한 일종의 향수를 갖고 있는 것이다. 향수(鄕愁)란 본래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라, 내가 겪은 과거의 어떤 것이 대해 느끼는 감정이다. 그러나 내가 갖고 있는 향수는 직접 겪은 과거에 대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태어나기도 전, 혹은 아주 어려서 기억하지도 못했던 시절, 그리고 그 시대를 채웠던 세계의 작동방식에 대한 것이다. 이는 비단 나 개인에게만 국한되는 현상이 아니다. 2018년의 많은 사람들은 목격하지도 경험하지도 못한 세계를 그리워하고 갈망한다. 이 집단적 향수는 하나의 현상이자 유행으로 나타난다. 모두가 함께 그 옛날의 어떤 '감성'을 동경하는 것.

그 감성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영화와 드라마에서 끊임없이 재현되는 과거, 이전 시대를 그리워하는 어른들의 회상, 당대 예술가들에 대한 동경, 현재에 대한 지겨움, 호기심, 과거=추억이라는 공식, 이 모든 것들이 불러일으킨 복고 열풍을 통해서다. 그 감성에 대한 열망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필름 카메라의 유행, LP판을 모으는 취미, 복고 패션, 추억을 파는 오락 예능들, 빛바랜듯한 사진 보정, 흥행 영화 재개봉 등의 형태로다.  '옛날 감성'이란, 현재의 시대를 사는 인간이 향수를 가지고 과거의 유형/무형 문화를 재현하거나, 세월 자체를 형상화하는(빛바랜 보정) 데서 오는 아련한 감정인 것이다.

즉 옛날 감성은 현재 시대가 과거 시대에 부여하는 아우라다. 이 감성은 실제 그 시대가 그 당시에도 가지고 있었던 어떤 것이 아니다. 한 발자국 떨어져서 옛날을 마음속에 형상화할 때 비로소 형성되는 것에 가깝다. 3차원의 형상은 4차원의 세계에서만 지각할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렇다 해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지나간 시대의 절대적인 모습, 양상, 특성, 감성을 철저히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애초에 물리적인 실체가 없는 '시대'에 절대적인 본질이 있는지도 의문이다. 실재했던 과거와 과거의 산물을 하나의 '텅 빈 기호'로 두고 여기에 자의적인(그러나 여전히 현실에 어느 정도 기반한) 해석과 의미를 부여하는 것, 그것이 지나간 시대의 아우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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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디지털 시대 안에 존재하는 내가 20여 년, 혹은 그보다 더 이전의 시대에 대해 느끼는 향수는 무엇인가. 이 질문은 곧 내가, 혹은 나의 시대가 부여한 이전 시대의 기의에 대한 의문으로 치환될 수 있다. 지난 글에서 나는 그것이 '직관적으로 감각할 수 있는 기계의 물성'이라고 썼다. 모든 것이 디지털 신호로, 0과 1로 이루어져 상호작용하는 지금, 옛 시대의 물리적인 기계요소의 작동에서 인간성을 느끼는 것이다. 실제로 나의 일부분은 내 시대가 이전 기계 시대에 부여한 '감성'을 내재화하고 있다. 느림과 번거로움에서 오는 여유, 필름을 돌려 감고 셔터를 누르는 물리적인 과정을 음미하는 데서 오는 기쁨, 이것들은 내가 필름 카메라를 비롯한 온갖 20세기 문화와 그 산물들을 좋아하는 이유다. 그러나 이번 글에서는 시대적 자아를 배제하고 좀 더 높은 층위에서 현상을 생각해보고 있다. 현대인들은 지금의 기술에 비해 직관적인 물리 작용으로 이루어진 이전의 기술에 인간성이라는 기의를 부여한다. 내가 느끼는 20세기의, 필름 카메라의 감성은 지금 시점에 와서야 부여된 아우라다. 필름 카메라에 존재한다고 믿는 인간적 프로세스라는 게 환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잠깐 다른 얘기를 해 보려고 한다. 우연히 팟캐스트에서 들은 얘기다. 나를 비롯한 요즘의 많은 사람들은 '아무래도 국은 식은 걸 전자레인지에 돌려먹는 것보다 가스레인지에서 다시 끓여 먹는 것이 맛있지'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다. 전자레인지로 음식을 데우면 전자파가 나와 영양소가 파괴된다는 얘기도 종종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모두 사실이 아니다. 영양소가 파괴된다는 주장은 선풍기 틀고 자면 죽는다는 것만큼 근거가 없는 얘기라고 한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자레인지로 데운 국과 가스불로 데운 국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연히 믿는 것이다. 전자레인지란 가스레인지보다 현대의 것이고 좀 더 편리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끔 해주는 문명의 산물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전통적인 조리방식보다 무언가가 부족하고 안 좋은 게 있다. 뭔지 모르지만 있다. 재밌는 사실은 여기서부터다. 부엌에 가스레인지와 전자레인지를 갖추고 사는 요즘은 가스레인지를 더 전통적인 조리 도구로 여기지만, 가스레인지가 막 등장했을 시절에는 부엌마다 화덕을 갖추고 있었다. 주부들은 가스불로 조리하는 것이 편리했기 때문에 점차 화덕을 거의 사용하지 않게 되었지만, 일에서 돌아온 (요리의 수고로움을 모르는) 남편들은 '아무리 그래도 화덕불에서 조리한 것이 맛있다'라고 주장했다고. 장작 대신 가스를 쓴다는 것이 뭔가 꺼림칙하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주부들은, 가스불로 요리를 완성해 놓고, 남편이 돌아올 때쯤 재빨리 화덕으로 냄비를 옮기는 꼼수를 썼고, 남편들은 '음 역시 요리는 화덕으로 해야 해'라며 만족했다.

나는 지난번 글을 '모든 것을 디지털로 처리하고 기계가 만들어내는 시대에 과정의 손맛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번거로움도 싫지 않다.'는 문장으로 마무리했다. 손맛이라, 화덕에서 끓인 국과 가스레인지로 끓인 국, 그리고 전자레인지로 끓인 국의 손맛은 어떻게 얼마나 다른가. 인간은 정말 점점 덜 맛있는 요리를 먹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그런 것이라면 너무 슬프다. 요리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장작을 태워 만든 불과 가스 불이 좀 다른 맛을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 불로 조리한 것과 열로 조리한 것 사이에는 그보다 좀 더 큰 차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그 차이를(심리적 차이든 실제 차이든 간에) 맛이 있고 없음으로 규정했고, 현재 우리는 과거보다 편리한 삶을 사는 대신 수고로운 과정에서 오는 대가를 박탈당했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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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생각해보면 기계장치에서 인간성을 느낀다는 것도 참 이상하다. 차라리 지금보다 덜 비인간적인 것이라고 하면 모를까. 내가 인간적 프로세스라며 그렇게 좋아했던 기계식 장치는 찰리 채플린이 그토록 경계했던 인간소외를 조장하는 기계시대의 산물이다. 톱니바퀴는 '직관적으로 감각할 수 있는 기계의 물성'을 가장 완벽히 갖춘 완전체 아닌가. 그야말로 '아날로그 감성'이다. 태엽을 감아 줘야 하는 시계도, 오르골도 지금은 20세기의 향수를 자극하는 물건들이다. 심지어 '칙칙폭폭'소리를 내며 달리는 증기기관조차 이제는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메이션에서나 나올법한 오래 전의 추억이다. 그러니까 필름 카메라는, 가스레인지 같은 거다. 한 세기 전에는 문명의 상징이었으나 이제는 골동품인.

*

이쯤 되니 의문이 더 생긴다. 바로 위에서 '차라리 기계장치를 디지털보다 덜 비인간적인 것이라 하지.'라는 얘기를 했다. 가스레인지는 전자레인지보다, 화덕은 가스레인지보다 인간적인 발명품인가. 모닥불은 그럼, 완전히 인간적인 것인가? 인간 역사란 끊임없이 비인간, 탈인간을 향해 나아가는 중인가?

어쩌면 미래를 편리하고 비인간적인 문명으로, 과거를 불편하지만 인간적인 덜 문명(?)으로 보는 관점 자체가 근대식 역사관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르네상스 때 역사를 고대, 중세, 근대의 삼분법으로 이해하기 시작한 뒤 지금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역사학에서는 역사를 선형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내재했다. 과거는 야만, 미래는 문명이라는 이분법을 갖추고 세계 각국을 타임테이블 위에 줄 세웠다. 기계 문명에 대한 향수는 그 논리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 아닐까. '아마존의 조에족은 야만적이지만 현대인에게는 없는 여유와 넉넉함이 있는 사람들.' '아프리카 소수부족들이 서구 문명의 오염으로부터 자유로웠을 시절에는 훨씬 더 인간적이었을 테지만, 지금 그들은 카메라맨에게 돈을 받고 전통 춤을 춘다니, 가슴이 아프다' 같은 프레이밍은, 결국 나와 요즘 사람들이 필름 카메라에 씌우고 있는 것과 동일한 기제가 작동한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여전히 확실한 것이 있다. 근대식 역사관이 어쩌고 어쨌는지와는 무관하게 조선시대 문헌에서도 '요즘 것들은 버릇이 없다. 옛 시절에는 그러지 않았는데'라고 쓰인 한탄이 발견된다. 중국에서는 전설로 내려오던 요순시절을 태평성대로 칭송하며 그리워했다. 어쩌면 인간에게 '좋을 때'란 그저 과거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자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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