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허스토리 시사회 리뷰 [영화]

슬픔을 제대로 마주할 용기에 대하여
글 입력 2018.06.15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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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면서 몇 차례나 흐르던 눈물을 구태여 닦지 않았다. 
억누르거나 추스를 감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마음껏 울기를 바라며 스크린에 몰입했다. 그녀들의 이야기를, 슬픔과 분노를 영화로 알아가던 나로서는 그게 당장에 할 수 있는 유일한 연대와 공감의 표현이기에 마음껏 울고 나왔다.

HERSTORY. 
고백하자면 영화를 보기 전에 망설였던 게 사실이다. 익히 알고 있는 슬픔을 극으로 확인했을 때의 부담감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 덕분에 나는 모처럼 깨달았다. 지금껏 역사적 진실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건 내게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제대로 마주할 용기가 없어서였다는 사실을. 또한 그렇게 알게 된 진실이 비록 슬픔을 부르더라도 그것은 마음을 짓누르는 부담이 아닌 일종의 해소이자 외침으로 관객들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사실도. 

이 영화, 참 잘 만들었다.
실화가 바탕인 영화를 다소 거칠게 분류하자면 두 종류로 보는데, <허스토리>는 그 둘 사이에서 굉장히 조화롭게 다듬어진 그런 영화라는 느낌을 받았다. 사실 그대로를 재현해 내느라 자칫 어둡고 심각해질 수도 있는 다큐식 무비와, 연출의 힘을 활용하느라 왜곡 논란에 휩싸이곤 하는 반픽션 무비의 단점 모두를 이 영화는 극복한 것이다. 게다가 잊혀져 있던 *관부재판 이라는 역사적 사건마저 생생하게 살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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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부재판 :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일본 정부가 그 책임을 최초로 인정한 소송. 1990년대 후반 당시 동남아 11개국에서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위안부 재판이 소송 중이었으나 관부재판만이 유일하게 일부 승소를 거두는 성과를 냈다. 시모노세키(下關, 하관)와 부산을 오가며 재판이 열려 관부재판이라 불린다.

- 주연 배우 김희애의 관부재판 코멘터리 영상




그렇다. 어렵지 않게 찾아냈으나 그리 흔한 정보도 아니기에 나는 예외적으로 리뷰의 앞단에 사실 정보를 기재하고 관련 영상도 링크했다. 알고 보면 관부재판은 역사적으로 굉장히 의미 있는 사건이지만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문제이고, 그럼에도 여전히 널리 알려지지 않았기에 <허스토리>는 더욱 주목받아야 할 영화다.

"부끄럽게도 영화에 출연하기 전에는
관부재판을 몰랐다"

주연 배우 김희애, 김해숙 씨가 인터뷰에서 털어놓은 고백이다. 이들의 진솔함은 훌륭한 연기에 더해진 어떤 위로와 공감의 보너스와도 같았다. 나 역시 영화 감상을 통해 비로소 관부재판을 알아가며 '왜 이런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된 거지?'라는 자책의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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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극 중에서 위안부 피해 할머님들 중 한 분으로 나오는 배우 김해숙 씨의 재판이 떠오른다. 다른 여러 장면들 중에서도 특히나 기억에 남는 부분이 있다. 그 자체만으로 끔찍한 위안부 피해에 더해 개인의 말 못 할 사연까지 품고 있던 배정길 할머니. 그 고통의 깊이만큼이나 그걸 꺼내어 알리기에 어려움도 있었지만 그녀는 재판의 후반에 이르러 마침내 법정에서 당당하게 외친다.

"내 잘못이라고 여겼는데,
재판을 하다 보니 그게 아니었단 걸 깨달았다.
난 그저 살아남고 싶었을 뿐이다 이 놈들아!"
*정확한 대사 지문은 아닙니다.

철저한 피해자였음에도 가해자들과 그들 국가의 파렴치한 태도뿐만 아니라 조국의 무관심 속에 피해 이후로도 죄인처럼 숨어 지냈던 할머님들. 자신들의 잘못은 하나도 없었으나 스스로를 자책하며 지냈던 할머님들의 한. 이와 어찌 감히 비교할 수 있겠냐만은, 역사의 비극을 잊지 않고 전달했어야 할 후손들이 책임을 외면하고 대를 이어 온 현실이기에 어쩐지 나와 배우들이 했던 자책과의 연관성마저 느꼈다. 우리가 관부재판을 몰랐던 건 앞서 언급한 '마주할 용기'의 문제도 물론 있겠지만 과연 이를 개개인의 탓으로만 돌릴 수 있겠는가?

별로 정치를 언급하고 싶지는 않다만,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인다. 최소한 나는 영화를 통해서나마 나의 무관심과 용기 없음을 자책했기에, 이런 자책조차 하지 않았고 또한 지금도 여전히 하지 않는 사회 지도층 일부의 몰염치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높은 권한과 책임을 갖고도 역사적 진실을 알리기는커녕 은폐한, 아니 한 술 더 떠 역사를 왜곡함으로써 피해 당사자들과 선량한 시민들에게 고통을 안긴 세력들은 일본의 극우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다.


영화를 떠올리며 이토록 감정 그대로를 토로하는 일은 드물다. 
비록 졸고일지언정 후회는 하지 않을 자신은 있다. 적어도 영화 <허스토리>에 있어서는 내용이나 구성에 대한 몇 마디 언급보다 뜨거운 감동과 추천의 문구를 작성하는 게 바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기 때문이다.

<허스토리>는 과거를 다룬 영화이고, 거기서 또 거슬러 올라간 과거의 과거를 담고 있다. 
그런데 이 영화, 그 흔한 과거 회상 씬의 재현은 단 한 차례도 없다. 열입곱 소녀였던 할마님들의 과거 모습을 어떻게든 연기해 낸 아역 배우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야말로 <허스토리>의 연출에 감탄하며 관객들이 슬픈 역사를 확인하고도 일종의 '부담'에 휩싸이지 않을 수 있는 비결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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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지로 보여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리라. 
할머님들을 연기해 낸 훌륭한 배우 분들의 '현재 모습'(영화 속 배경에서의 현재)이 시간 순으로 이어지는 재판의 과정만으로도 <허스토리>는 관객들에게 생생한 역사를 전달하기에 충분했다. 나는 할머님들이 울며 괴로워하는 장면도 슬펐지만, 재판 과정에서 과거를 진술하며 감정을 억누르는 모습들에서 너무나 슬프고 분한 감정을 느꼈다. 관객들이 실제였던 비극을 짐작하며 그 고통을 감히 헤아리도록 하는 연출만으로도 이 영화가 사실로서의 역사를 잘 알리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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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배우들의 연기가 훌륭했으나 역시나 김희애, 김해숙 두 배우를 대표적으로 언급할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이 그 역할을 맡는 걸 생각해 볼 여지가 없을 정도로 각자의 배역이 너무나도 잘 어울렸고, 혼을 담은 연기는 관객들의 마음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덧붙이자면 할머님들의 무료 변론을 맡은 변호인단의 중심 인물(이상일) 역의 배우 김준한 씨의 연기도 인상적이었다. 극 중 이상일 변호사가 재일교포로서 과거에 겪었을 차별과 고충은 할머님들이 겪는 현재의 슬픔에 가려질 수밖에 없지만, 성심껏 할머님들을 변호하는 모습에서 나는 그의 비중을 매우 높이 보았다. 누구보다 극적인 변화를 보이며 관부재판을 가능케 한 원고 단장 문정숙의 강인함은, 어딘지 모르게 유하면서도 심지가 굳은 이상일 변호사와의 호흡을 통해 더욱 빛나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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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처음의 얘기로 돌아가 본다. 
과연 나는 어떠한 슬픔이 두려웠기에 이 영화를 보기에 앞서 망설였던 것인가. 또한 영화가 무척이나 슬펐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관람 후에는 걱정했던 상실감이나 부담감에 빠져있기보다는 만족스럽게(?) 영화관을 나올 수 있었을까.

감정의 해소다. 
서두에 밝혔듯 <허스토리>는 슬픈 역사를 마주하는 관객들에게 잘 다듬어진 방식으로 실화를 재구성해 보여줌으로써 슬픔을 부담에 머물지 않게 해 주었다. 이를 통해 나를 포함한 관객들은 눈물을 닦고 깊은 공감과 연민의 심정으로 할머님들을 추모하며 역사의 민낯을 똑똑히 기억할 것을 다짐할 수 있던 것이다.

다만 안타까운 사실은 작년을 기점으로 영화의 실존 인물인 할머님들이 모두 돌아가셨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또한 분명한 사실은 그녀들의 이야기, HERSTORY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거다.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다함께 확인할 수 있다. 죽어서도 한이 맺혀 계실 그녀들을 위해 후손들이 비극의 역사를 잊지 않고 잘못된 과거를 바로잡겠다는 의지의 불씨를. 

영화에서 다룬 관부재판의 결과(일부 승소)의 덕도 일부 있겠으나 어쨌든 이만한 소재, 현재 진행형인 실화를 다룬 영화임을 감안할 때 <허스토리>의 결과물은 단연 놀라운 수준이라고 하기에 손색이 없다. 역사적 진실을 제대로 마주할 용기를 내게 준 영화, . 이제 더는 슬픔을 피하지 않고 당당히 마주하고 기억할 것을 할머님들께 마음으로 약속드리며, 리뷰를 마친다.





본 리뷰는 무비패스 시사회를 통해 관람한 후 작성한 브런치 개인 채널의 글을 옮겨 적은 컨텐츠입니다.
사진의 출처는 daum영화 사이트 및 카카오TV 코멘터리 영상의 캡처 일부입니다.


[석정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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