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 [도서]

매일, 단어를 사랑하려고 노력합니다
글 입력 2018.06.17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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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온 지 꽤 오래 되었다. 어렸을 땐 ‘일’이라는 개념이 그리 크지 않았고, 단지 좋아하는 ‘것’을 하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러나 조금 자란 뒤 그 ‘것’이라는 구체적인 실체는 돈을 벌 수 있는 ‘일’이 되어야 마땅하고, 그렇다면 ‘일’ 앞에 가장 최고의 수식어는 ‘좋아하는’ 혹은 ‘잘 할 수 있는’이 붙어야 한다는 걸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렇게 생각한 이는 나뿐만 아니라 내 친구들도, 내 친구의 친구들도 그랬다. 더 자라고 보니 ‘좋아하는 일’은 일부 사람들에게는 추구하는 이상이기도, 일부 사람들은 ‘그런 게 어딨어’라고 포기해버린 환상이기도, 일부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그래야 한다’고 외치는 구호나 상품이 되어 있었다. 모양은 여러 가지지만 하나는 확실해졌다, 살면서 모두는 ‘좋아하는 일’에 대한 생각을 한 번씩 해본다는 것.
 
*

결과적으로 지금은 조금씩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 조금씩 그렇다고 느끼는 가운데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건 좋아하게 된 첫 마음을 떠올리자는 것이다. 그리고 ‘좋아하는 일’에 대한 이상을 품는 건 좋지만 환상은 버려야 한다는 걸 책 <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를 통해 더욱 생각해보게 되었다. 어떤 일에 매력을 느끼고 막 시작한 순간이 아마 가장 쉬울 것 같다, 마치 연애처럼. 그래서도 책 표지의 ‘20년째 언어와 연애 중’이라는 문구가 있는 것일지도.
 
 

p.30 모두에게 슈프라흐게퓔이 있는 것은 아니며 영어에 무릎까지 담그고 그 진흙탕 속을 헤쳐나가려고 애써보기 전까지는 자신이 그것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알기 어렵다. 나는 일부러 ‘사로잡혔다’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슈프라흐게퓔은 결코 가질 수 없고, 오로지 사로잡힐 수만 있는 것이니까.
 
 

연애처럼, 일과 사랑에 빠지는 과정에도 어떤 단계가 있는 것 같다. 이 책에서는 ‘슈프라흐게퓔’을 예로 들고 있다. ‘진흙탕 속을 헤쳐나가려고 애써보기 전까지는’ 그 일의 진가를 알기 어렵고, 사실 이 책 전체는 저자가 진흙탕 속을 헤쳐나가는 과정에 대한 기록이다.
 
 

p.106 지금까지 내 일을 가장 잘 요약한 사람은 내 딸의 친구다.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설명하자, 그 애는 입을 떡 벌리고 말했다. “세상에 맙소사. 제가 살면서 들은 제일 재미없는 일이네요.” 그러나 그 일이 천국의 직업이라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책 전반부에서 묘사되는 사전 편찬자들의 작업 환경은 살갑지 않다. ‘토끼 사육장’같거나, ‘시대착오적인 커피’를 마시고, 점심에 먹을 메뉴를 ‘카드’에 적어 소통한다. 그럼에도 그 일이 천국의 직업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어쩌면 진로를 고민하는 청춘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다수가 좋다고 말하는 합당한 기준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기질이 뭔지 파악하고 일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좋은 진로가 아닐까.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담담한 마음으로 읽고 나면 용기가 생기리라 확신한다.
 
 

p.101 물론 ‘irregardless’는 자꾸 쓰여서 사전에 올라간, 만들어진 단어가 맞습니다. 사전에 오르는 단어란 게 원래 그래요. 모든 단어는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p.146 정의되는 단어는 결코 ‘정의되는 단어’라고 부르지 않는다. ‘표제어headword’라고 부른다. 정의는 ‘정의definition’라고(어휴) 부르고, 특히 정의가 여럿일 때는 ‘의미sense’라고 부른다. 서로 다른 의미는 의미 번호(1,2,3 등등)로 표시한다.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의미는 ‘하위 의미subsense’로 묶어서 의미 번호 뒤에 문자를 붙여 표시한다.
   
p.185 이상하게도, 나는 정의가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불완전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정의란 특정한 관습들을 이용해 어떤 단어의 의미를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이고, 이때 단어의 의미와 정의는 구별됩니다. 의미는 단어 안에 사는 것이고 정의는 그것을 기술하는 것이죠. 정의는 인공적이에요.
 
 

이 책은 사전 편찬자들이 하는 일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로 엮여 있다. 문법에 관하여, 틀린 단어에 관하여, 정의와 예문, 작은 단어, 나쁜 단어에 관하여 등등. 유익한 내용들 중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바로 ‘정의’에 관한 내용이었다. 무의식중에 나는 사전이 단어에 대한 정답 쯤 되는 책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모든 단어는 만들어진’ 단어이며, 그 단어에 붙이는 ‘여러 종류의’ 정의도 그래서 ‘인공적’이라는 것. 사례로 사람들이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ir-’라는 접두어는 원래 단어의 뜻을 뒤집는 역할을 해야 하지만 강조의 뜻을 가지게 되었다는 걸 사전 편찬자도 스스로 납득하게 되는 과정은 매우 흥미로웠다.
 
구체적인 사례라 집중해 읽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었다. 집중해 읽지 않으면 길을 놓치기도 하고, 저자가 제시하는 사례가 금방 이해되지 않아 여러 번 읽게 되는 부분도 있었다. 그러나 전문적인 영역이기 때문에 시간을 투자해 읽으니 유익한 내용들이 많았다. 그리고 이 어려움은 만약 한글 사전을 만드는 한국의 사전 편찬자들의 이야기였어도 비슷하게 겪어야 하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서 동시에, 과연 한국의 사전 편찬자들의 이야기도 저자의 경험과 비슷할까, 자꾸 궁금해졌다.
 
자신의 일과 진정한 사랑에 빠지고 싶은 분들, 그런 노력을 배우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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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명: 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
원  제: WORD BY WORD
지은이: 코리 스탬퍼 | 옮긴이: 박다솜
분  야: 에세이, 인문학, 책읽기/글쓰기
발행일: 2018년 5월 20일 
펴낸곳: 윌북
면수: 388면 | 가격: 16,500원



[이서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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