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어디 남자가 여자 말하는데 안 거들어? [문화전반]

참.페.미 - 참을 수 없는 페미의 즐거움
글 입력 2018.06.19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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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발적인 제목에 이끌려 들어온 사람도, 어디 또 여자한테 잘 보이려 하는 남자 놈이 있구나 하며 들어온 사람도, 반복되는 내용에 짜증이 유발되는 사람도 모두 환영한다. 오히려 들어오지 않은 사람들이 아쉬울 만큼 꽤 좋은 이야기를 전하려 하니까. 여기서는 세간에서 행해지는 여성 주체의 수많은 페미니즘이 아니라 남자의 입장에서 함께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하는 페미니즘에 대해 말하려 한다. 당신이 페미니즘을 우선적으로 인정하고 ‘어떤 방향에서 힘을 실어줄까’라고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더할 나위 없지만 적어도 이런저런 점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페미니즘의 발목을 잡는 상황은 막아야 하니까 말이다. 믿기지 않겠지만 페미니즘은 남성인 당신의 삶을 윤택하게 하니 차분한 호흡으로 끝까지 버터보길 바란다.

사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남자치고 ‘한남충’이 아니긴 어렵다. 여자 형제가 있건 없건, 딸이 있건 없건 ,사랑하는 여자친구가 있건 없건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뱉어내는 언사들은 자연스럽다 못해 당연하다고 부추겨졌으니까. 남성의 여성 억압 역사가 비단 한국뿐만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였음을 자각한다면 온라인 상에서나 개개인 스스로를 그리고 남성 사회가 한남충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음을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에서 논의된 시민의 참정권과 소유권 운동에 여성의 권리는 빠져있었고 1944년에 와서야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45년부터 투표 참여)했으니 말이다. 이제는 서양의 Misogyny라는 단어가 ‘여성혐오’라는 말로 번역되면서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혐오라는 말에 새로운 의미가 추가되었다. 언어로 불려지지 않아 흩어질 수 있었던 사례와 현상들은 명백한 개념을 갖게 되었고 징그러운 것을 연상케했던 혐오는 이제 차별, 이방인, 소외된 타자, 2등 시민 혹은 다른 지표로 평가받는 존재를 내포하는 말이 되었다. 그 예로 상당수의 여성이 아니 대부분의 여성이 ‘여성이기에 겪는 문제’를 경험한 적이 있다. 엘리베이터를 같이 탄 남성에 대한 불안을 야기하는 사회와 일상 속에 마주하는 성희롱, 문화적 성별과 권력 차이 그리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선 여성들에게 브레이크를 거는 백래시와 펜스룰. 이토록 피해자성을 띨 수 밖에 없는 그러기에 타파하려 노력하는 여성사회와 여성 개개인에게 남성 사회와 남성 개개인은 과연 가해자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지 묻고 싶다.

많은 수의 남자가 다음과 같은 수사법을 이용한다. "남자라고 다 그러는 것은 아니야"라며 개인이 안전할 수 있는 전략을 취하고 "남자만 그러냐?"라며 남성 사회를 보호하려는 이중 전략을 취한다. 그런 언사가 자기는 여성의 인권을 위해 싸우는 페미니스트인지 아닌지 혹은 지금까지는 그러지 않았지만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 것이란 것을 보여주지 못한다. 6월 14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경찰이 여성 모델 비공개 촬영이 조직적 범죄임을 인지하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남성 모델이 몰카에 찍히면 뉴스와 실시간 검색 1위에 오르고 여성 모델의이 야동 사이트, 커뮤니티 1위에 오르는 현상을 제대로 꼬집는다. 가만 있는 당신은 여성 인권을 위해 무엇을 하였고 할 것인가?
 

유리천장.jpg
OECE가 발표한 2017년 유리천장 지수.
대한민국은 꼴찌 수준이다.


페미니즘은 2015년 일반 대중들의 수면 위로 다시 드러났다. #나는_페미니스트다 라는 해시태그부터 시작해 아이유의 제제 및 나의 아저씨 논란, 배우가 아닌 ‘여배우’로 소비된 수지의 영화 ‘도리화가’, 불법성인사이트 소라넷의 폐쇄, 남성들이 빛아인이라고 부르는 유아인에 대한 비판과 베스트셀러가 된 82년생 김지영, 홍익대 모델 몰카에 대한 경찰의 발빠른 대응에 대한 비판, Tumblr 사이트에 올라오는 지인 제보, 여자화장실에 뚫려있는 수많은 몰카 구멍, 권력형 성폭력에 대한 폭로 미투(ME TOO)운동 그리고 강남역 살인사건. 이 외에도 통계가 보여주는 수많은 지표와 일상 속에서 숨쉬듯 느껴지는 여성 혐오/차별에 대해 여성들은 분노했고 더 이상 좌시하지 않았으며 공개적으로 행동했다.

대한민국의 차별 지표를 보여주는 것은 다음과 같다.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소득격차에 따르면 여성은 남성의 3분의 2수준이다. 2017년 기준 12명의 대통령이 나오면서 11명은 남성이었고 1명만 여성이었다. 대한민국 400대 부자 중 370명이 남성이며 30명의 여성은 어떤 남성의 재산을 상속 받았기에 가능한 숫자다. 국회의원의 경우 249명이 남성이며 51명이 여성이다. 이마저도 성별의 50%를 인정하는 비례대표 제도 덕분에 성립된 것이다. (출처- EBS 까칠남녀 손아람 작가편)

연령별 소득격차는 30대 이후부터 늘어나기 시작한다. 10대부터 30대까지 남성들이 여성들하고 비슷하게 벌어 그 차이를 못느낄 수 있지만 그 이후부터 차이는 현격하게 드러난다. 출산으로 인한 경력단절, 유리천장 지수 그리고 남성보다 많은 비정규직에서 오는 문제일 것이다. 더 나아가 역사와 문화로부터 전승된 기준도 존재한다. 남성에게는 지적 능력, 재산, 사회적 역량을 요구하고 이러한 것들은 이전 사회도 그러했다. 그에 비해 여성들에게 적용되는 것은 앞선 기준들을 박탈당했기에 강요된 외모 기준이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는 하나 남성의 재력과 여성의 외모를 거래 관계로 파악하게 되는 것은 여전히 자연스럽다. 또한 동일한 현상에 대해 평가가 갈리는 것도 재밌는 사례다. 남성이 열정적으로 또는 호전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칭찬받을 일이나 여성은 "기가 세다, 드세다"라고 표현이 된다. 전라도 사람들은 어쩌네 하는 대한민국의 뿌리깊은 지역차별에서도 보지 않았는가? 부모들이 남녀공학에 남자애들을 보내지 않으려는 이유도 여자애들이 독하게 공부하기 때문이란다. 뿐만 아니라 남자 배우가 페미니즘 공부를 인증하면 칭찬받고 여자 연예인이 페미니스트 선언하면 몰매를 맞는다. 이전에는 차이로 받아들여지던 것들도 이제는 조심스럽게 차별이 아닌지 따져보아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런 점에서 페미니즘은 가히 시대정신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페미니즘에 대해 남성 사회가 공유 해야 하는 전제는 다음과 같다.

1. 흑인 운동의 주도권은 흑인에게 있었듯 어떤 운동이든 피해를 보고 있는 사람이 주도한다. 고로 여성 운동의 주도권은 반대 영역의 허가나 지도가 필요 없이 여성에게 있다.

2. 자극적인 혹은 기존의 통념에 반하는 언행에는 필연적으로 시위와 운동이 포함된다. 그것이 일반인 혹은 반대 세력에게 불편하거나 새롭지 않다면 시위가 아니라 문화행사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3. 중립은 하나의 정치적 입장 표명이며 대개의 경우 현 상태의 유지나 기존 제도에 암묵적 동의로 이어진다. 어느 것도 맞지 않다는 양비론이나 싸우지 말고 잘 지냈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은 순진하거나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 바보 같은 짓이다.

4. 페미니즘은 필연적으로 젠더 감수성을 필요로 한다. 감수성이란 사회적 약자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드는 사회적 감수성과 더불어 권력 차이에서 오는 차별을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사회적 약자를 보며 "저런 사람이 되지 말아야지"가 아니라 "저런 사람도 잘 살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지"가 정상적이지 않은가?

5. 역차별은 사실 페미니즘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역사로부터 내려오는 문화의 파생물이다. 남성들이 역차별이라 말하는 것은 사실 남성 사회가 부과한 차별이 낳은 차별 비용이다. 여성이 군대를 안가게 만든 국방부가 누구로 이루어져 있는지 생각해보면 알기 쉽다.

분명한 것은 이 다섯 개에 대해 우리가 시혜적 태도로 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철학자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살해하는 것은 가능해도 희생으로는 바칠 수 없는 존재)라는 개념에 따라 우리가 그들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 여성 사회, 더 나아가 장애인, 성소수자, 채식주의, 외국인 노동자, 노숙자, 소외된 노인, 청년 실업자 등 보편, 정치적 주체로부터 벗어난 사람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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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넘은 2차 가해…해외 포르노 사이트에
'양예원' 검색 횟수 상승 출처 - 부산일보


페미니즘 운동에 대해 반대하는 남성들과 페미니즘이 “여성들의 이미지를 까먹는다” 생각하는 여성들 그리고 남성 사회의 기득권 혹은 성차별에는 동의하나 페미니즘 또는 급진적인 페미니즘에는 동조하지 않으며 중립을 지키겠다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많이 볼 수 있다. 이에 반해 시대, 행동 규범과 이념에 따라 나뉘는 2세대와 3세대 페미니즘, 페미니즘과 성소수자(LGBTQ)들의 연대와 페미니즘과 채식주의의 연합인 비건-페미니즘도 찾아 볼 수 있다. 철학과 사상의 분파가 여러 개이고 각자가 논할 수 있는 영역이 다양한 것처럼 페미니즘에도 다양한 노선과 방법이 존재한다. 모두가 동의하는 초월적 이념에 대한 상정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기에 그 과정에서 이행해가는 것이 사회의 운동이고 정치이다. 평가의 기저에서 무엇을 준거점으로 잡느냐에 따라 현존하는 문제 해결이 달라지는 것처럼 어느 쪽에 힘을 쏟느냐가 곧 문제 해결에 직결된다.

문제는 기존의 것으로 파악이 안되기에 제기가 되는 것처럼 그것에 기계적인 중립이나 도덕적 가치를 붙이며 안전한 자세를 취하는 것은 문제 해결을 유보하거나 평소에 기대왔던 문화와 구조에 편에 서기 쉽다. 여성들의 발화보다 남성의 발화 한 번이 남성에게 더 영향력이 있다는 씁쓸한 상황과 더불어 혜화역 시위가 결국 페미니즘의 실체라는 생각을 중지하고 태어날 때부터 속할 수 밖에 없었던 남성 사회의 일원으로서 우리는 숙고해야 한다. 남성은 태생적으로 그리고 구조 속에서 여성들이 느낀 고통과 멸시에 대해 피부로 느끼는 깊이가 다르다. 따라서 남자페미니스트라는 말도 붙이기 쉽지 않다. 그러기에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그들에게 의무가 아니라 권리만을 원한다는 냉소와 조소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남성 사회로부터 우리 스스로 느낀 불편함과 부당함에 대해 바꾸려는 의지를 표명하는 것이다. 여성에게 복무를 부담하게 하는 것과 ‘기초 군사 훈련을 받아라’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그리고 그 전에 남성 스스로 군대의 인권의식과 복지를 높이며 부조리를 없애는 것이 앞선 두 개에 비해 먼저고 엄청난 의미를 지닌다. 여성들은 사회 구조와 그것을 부당하게 이루는 남성과 싸우는데 왜 남성 사회는 구조와 자기에 대해 비판과 혁명을 하지 않고 여성들에게도 고통을 나누려하는가. 앞서 말한 것처럼 페미니즘이 남성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이유가 바로 이런 남성의 정치 참여 고취와 더불어 여성의 경제 참여율 증대로 남성에게 부과된 부담이 자연스럽게 줄어들기 때문이다. 우리가 배격해야하는 것은 경쟁과 자본의 논리를 부추기는 신자유주의의 구조와 타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소유의 논리다.
 
여전히 받아들이기 어렵다해도 이해할 수 있다. 변화라는 것이 시간이 필요한 것이고 어느 순간 확 와닿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운동은 자율과 강제라는 모순을 수반한다. 자율성을 인정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통제하고 강요하는 모습의 강제성을 필요로 한다. 탈(脫)코르셋에 대해서 강력하게 피력하는 사람이 존재하고 더욱 급진적인 페미니즘을 행하는 분들도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우리가 법의 영향을 받기에 급진적인 운동에 처벌에 내려지는 상황도 있지만 법을 행사하는 의식이 잘못되었다면 그 의식을 바꾸려는 계몽도 여실히 중요하다. 민주주의가 투표만 잘하면 민주주읜가? 그것은 치안을 의미하는 police지 정치를 의미하는 politique이 아니다. 나는 세간에서 말하는 꼴페미가 무엇인도 모르겠다. 이런 공격적인 행동 혹은 이런 공격적인 말을 하면 인권주의자도 여성주의자도 아닌 꼴페미다 정도의 생각에 이전에 온건히 말했으면 들어줬나? 혹은 잘못된 상황이 온전히 개선 되었나?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오히려 그게 불편하다면 잘하고 있는 것 아닌가? 이미 보편에 포함된 그리고 그 보편 경쟁 내에서 밀려있는 사람들은 애초에 보편에 포함되지 못한 사람들의 권리 행사를 부당하게 보면 안된다. 중요한 것은 "나도 페미니스트다"따위의 선언이 아니라 여성 인권과 불평등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행한 행동이 무엇인지'이다.


[김혁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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