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종교라는 이름으로 여성에게 행해지는 속박 [영화]

영화 < 아쉬람 >을 보고
글 입력 2018.06.22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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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주된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글입니다. 

 오늘날의 수많은 여성 이슈들을 보면서 예전엔 별생각없이 받아들였던 성경의 구절도 불편하게 느껴졌다. 예수님은 언제나 소수자와 약자의 편이었고 소외당하고 고통받는 약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라는 것이 주된 메시지라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여성은 남자와 동등한 통치권을 지녔다기보다는 여성이 남성을 보필하는 존재로 쓰였다는 한계도 함께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종교의 경전들이 그렇다. 여성이 자신의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했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지나치게 남성적인 시선으로 쓰여있다. 그것은 때론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여성을 향한 수많은 속박들 역시 지금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그런 종교적인 속박과 오래된 인습에 관한 이야기이다. 여성에 관한 속박들을 근거로 하는 힌두교의 경전 구절로 영화는 시작된다.


‘과부는 평생 수절하면서 인고의 삶을 살아야 한다.’
‘정숙한 아내는 남편과 사별하면 수절한다.’
‘정절을 지키지 않으면 자칼의 자궁에서 환생한다.’

힌두교 마누법전 5장 156~161절


 영화 속 주된 배경은 아쉬람으로 아쉬람은 일찍 남편을 여의고 과부가 된 이들이 남은 죄를 속죄하며 살아가는 곳으로 외부와 격리된 공간이다. 이 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과부들의 이야기를 여과 없이 보여주며 자기만의 이야기를 가진 여성 인물들이 등장한다. 영화를 보면서 누구 한 명을 주인공이라고 꼽을 수 없었고 등장하는 모든 여성 인물들이 주인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8살 쭈이야의 시선으로 바라본 아쉬람


 쭈이야는 이발기로 머리를 깎고 영문도 모른 채 아버지의 손에 이끌리듯이 ‘아쉬람’이라는 과부촌에게 오게 된다. 쭈이야는 아버지한테 버림을 받은 것도 혼례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도 자신에게 붙여진 ‘과부’라는 명패가 어떤 의미를 지닌지도 모른다. 그저 자신에게 행해지는 속박들이 싫을 뿐이다. 과부는 그런 행실을 가지면 안 된다며 주의를 주는데 쭈이야는 '그런 멍청한 과부는 되기 싫어'라며 도리어 소리친다. 어린아이 조차도 그것이 불합리한 관습이라는 것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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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수한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본 아쉬람은 그러한 여성에게 가해지는 악습들을 더 두드러지게 볼 수 있었다. "그럼 홀아비는 어디서 살아요?"라고 해맑게 물어보는 쭈이야에게 아쉬람의 다른 과부들은 남성은 혼례에 있어 자유롭지만 여성은 재혼이 불가능하고 평생 과부로 살아가야 한다는 불합리한 이치를 어린 쭈이야가 받아들이기엔 어려운 일이었다.

 쭈이야의 모험담을 펼치기에 아쉬람은 어둡고 희망이 없는 지옥 같은 공간이지만 악동 꾸러기 쭈이야가 이곳저곳을 헤치고 다니며 말썽을 피우면서 어두웠던 아쉬람에 잠시나마 활력을 준다.



순수해서 더 슬펐던 사랑


 깔랴니는 쭈이야가 아쉬람에서 처음으로 친구가 된 여인이다. 아쉬람의 다른 구성원들의 생존을 위해서 아쉬람의 어린 여성들에게 매춘이 강압적으로 이루어지는데 깔랴니 역시 이에 해당되었다. 강 너머의 바리 나시의 유력자들에게 자신의 몸을 팔아가면서 재정을 위해 힘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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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랬던 깔랴니에게도 봄바람이 찾아온다. 쭈이야가 말썽으로 시장가에서 길을 잃어버리는데 나라얀이라는 남성이 쭈이야를 아쉬람으로 바래다주면서 깔랴니를 만나고 거짓말처럼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영국 유학파 법학도로 브라만 계급의 남성과 과부라는 신분 차이 때문에 깔랴니 역시 마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쉽사리 마음을 열 수 없었다. 그럼에도 끝없는 나라얀의 구애 끝에 서로 마음을 확인하며 연인이 되었다. 거기에는 쭈이야의 역할도 컸다. 나라얀의 편지와 이야기를 깔랴니에게 대신 전하는 등의 두 사람의 사랑의 메신저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렇게 낙관적으로 이야기가 진행될 수 있을 줄 알았다.

 뜻하지 않은 반전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나라얀은 반대해도 깔라니와 평생을 함께할 거라면서 어머니를 설득해 깔랴니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다. 나라얀의 집으로 가는 배를 함께 타고 가는데 깔랴니에게는 매우 익숙한 목적지가 보인다. 깊은 절망과 견딜 수 없는 슬픔을 느끼게 된다. 자신이 몸을 팔아왔던 상대가 나라얀의 아버지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배는 그렇게 나아가지 못하고 되돌아가게 되고 나라얀은 존경했던 아버지에게 이를 물었지만 깊은 관계를 맺지 말라는 아버지의 대답에 관습에 대한 염증을 느끼고 인도를 떠나기로 마음 먹는다.

 나라얀은 아쉬람으로 돌아가 깔랴니를 찾았지만 깔랴니는 자신의 죄의식을 이기지 못하고 갠지스의 강물 속으로 영원히 잠겨버린 뒤였다. 애절한 사랑은 그렇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끝나게 된다.



이제껏 믿어왔던 세계를 깨트리는 것


 샤꾼딸라는 묵묵하게 힌두교의 교리를 따르며 아쉬람 내에서 강인한 사람으로 묘사된다. 불가촉천민과 같은 과부로서의 삶이지만 그것조차도 신도로서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굳건한 믿음을 보여준다. 쭈이야나 꺌라니를 포함한 많은 과부들이 의지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한치의 의심 없이 자신의 믿음을 가꾸며 수행했지만 서서히 자신의 믿음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된다. 과부의 재혼에 대한 호의적인 법이 통과되었음에도 정작 과부인 자신들은 모르고 있었다. 깔랴니가 신앙에서 오는 죄의식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리고 그것에 대한 애도를 다음 생에는 '남자로 태어나기를'이라고 기도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더군다나 깔랴니가 사라지자 재정에 어려움을 느끼게 된 아쉬람의 간부들은 그보다 더 어린 쭈이야를 어머니를 찾아준다고 속이며 브라만에게 데려간다. 샤꾼딸라가 이 사실을 알고 분노하며 쭈이야의 행방을 물었지만 이미 쭈야니는 기절한 체로 돌아온 뒤였다. 어린아이 조차도 악습으로 인해 고통받는 모습을 보면서 이제껏 자신이 믿어왔던 세계에 대해 회의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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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과 함께 진보 사상이 전역으로 펴져나갔을 격동의 시기였다. 그 중심에는 간디가 있었다. 간디의 투쟁이 승리하면서 영국은 간디를 석방했고 기차역에서는 간디가 연설한다는 이야기를 샤꾼딸라는 듣게 된다.


"나는 오랫동안 신은 진실이라고 믿었지만 오늘은 진실이 신이란 걸 알았다. 진실의 추구에는 절대로 값을 매길 수 없다"


 샤꾼딸라는 기차역에 쭈이야를 안고 가 간디의 연설을 들으며 자신이 생각한 믿음에 대해 다시 확신하게 된다. 자신의 믿음은 곧 자기가 바라본 세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자신의 믿음은 바로 어린 쭈이야를 아쉬람이라는 공간에서 구출하는 것이이라고. 간디와 함께 떠나가는 기차에 쭈이야를 안고 '이 아이를 간디 선생님께 데려다주세요. 이 아이는 9살이에요. 그런데 과부로 살고 있어요.'라고 외치며 달려나간다. 기차 안에서 이를 우연히 보게 된 나라얀이 쭈이야를 받아안고 기차가 떠난다. 그렇게 아쉬람에 홀로 남은 샤꾼딸라의 강렬한 눈빛으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이 장면을 보고 샤꾼딸라가 영화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메시지를 보여주는 장본인이라고 생각을 했다. 어쩌면 감독이 샤꾼딸라를 통해서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여성에게 가해지는 수많은 관습들에 대하여


 쭈이야가 인도의 미래를 대표한다면 꺌랴니는 억압받고 고통을 받았던 과거의 여성들을, 그리고 샤꾼딸라는 살아남은 인도의 여성들을 보여주며 영화는 우리에게 의문을 던진다. 이제껏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믿음들은 과연 신의 의지인 것인 걸까? 아니면 경전을 자기 식대로 해석하는 신도들의 의지인 것인 걸까? 무엇 하나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아직도 인도의 수많은 과부들은 교리에서 말하는 여성의 삶을 지키기 위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단순히 힌두교의 교리, 1930년대 인도 사회에서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를 막론하는 문제라는 것. 우리나라에서도 남편을 잃은 미망인에 대한 사회적 억압은 과거에 존재했었고 여전히 여성에게만 가해지는 수많은 관습들과 억압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제껏 쌓아왔던 믿음을 깨트리는 것은 어렵다. 당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들에 '왜'라고 질문하는 것에는 불편한 감정도 함께 동반한다. 그러나 이 영화가 인도의 어두운 면만을 보여주면서 희망 없이 끝난 게 아니라 희망을 느낄 수 있었던 건 '왜'라는 의문을 던지는 이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이토록 당연한 게 당연하지 않다고 받아들여지는 세상도 언젠가 올 수 있을까?


[박선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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