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를 고치려면 전부 분해한 다음 중요한 게 뭔지 알아내야 돼

영화 데몰리션(Demolition)
글 입력 2018.06.22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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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스트모더니즘 강의에서, 교수님은 이렇게 말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전부 무너뜨리고, 지저분하게 한 뒤 진실을 보게 하는 것’이라고. 학생들은 언제나 그랬 듯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교수님의 말을 받아 적었다. 그리고 나는 손을 들었다.

 ‘왜 진실을 보게 하나요?’

 물론 내가 문예사조에 깊은 통찰력과 학문적 지식을 가진 건 아니었지만, 내가 이해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은 달랐다. 모든 것을 분해하고, 잡동사니로 만든 뒤 왠지 모르게 신성하게 느껴지는 ‘진실’보다는 그저 망가진 것 그 자체들을 보게 할 뿐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망가뜨림으로써 다시 보게 되는 것은 진실에 돌아가는 것이 아닌, 그저 돌이킬 수 없는 현실 그 자체가 아닌가 하고. 그리고 여기, 아내의 죽음 이후 서서히 자신 주위의 물건들, 그리고 이내 집까지 부숴버리는 한 남자가 있다. 영화 ‘데몰리션’이다.

 주인공 데이비스(제이크 질렌할)은 투자 분석가라는 직업으로, 한 아내의 남편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영화는 시작부터 등장한 갑작스러운 아내의 죽음에도, 주인공의 표정을 일그러뜨리거나 눈물을 왈칵 쏟게 하지 않는다. 그는 다음날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출근을 하고, 일상을 지속해 나간다. 물론 그를 제외한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수근거렸지만. 그는 조립된 장치처럼, 마치 감정이 없는 기계처럼 오직 매뉴얼적인 삶을 이어 나간다.

 그리고 어느 날, 그의 감정들은 가만 있질 못하고 분출되기 시작한다. 주인공이 망가진 자판기에 동전을 넣은 순간부터 그의 감정들은 이내 강력히 표출된다. 필요 이상으로 자판기 회사에 직접 길고 긴 장문의 편지를 써 보낸다. 아내가 죽었으며, 나는 어떤 사정이 있었으며, 그래서 그 자판기까지 오게 되었는데, 마침 망가진 자판기였다는, 그래서 결국 보상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미친 듯 써내려 간다. 그리고, 표출된 그의 감정들은 주변의 것들을 서서히 와해하기 시작한다. 가전제품을 분해하기 시작하고, 냉장고를 열어보더니 갑자기 냉장고를 부수기 시작하다가, 이내 온갖 장비를 동원해 아내와 그의 기억이 잔존하는 집 자체를 부수기 시작한다. 그야말로 영화의 제목, ‘파괴(Demolition)’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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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네가 무언가를 고치고 싶다면, 넌 모든 걸 분해하고, 그리고 뭐가 중요한 지를 알아내야 해"If you want to fix something, you have to take everything apart, and figure out what's important"

 주인공은 길을 나선다. 집의 모든 것들을 부수고, 헤드폰을 낀 채 지하철을 탄다. 그리고 음악에 맞춰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그러나 그 어느때보다도 자유로운 동작의 춤을 추며 지하철과 거리를 활보한다.

 정해진 목적지, 그리고 항상 그래왔듯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앞만 보고 걸어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오직 주인공만이 반대 방향으로 헤드폰을 낀 채 남의 시선에는 상관없이 춤을 추며 나아간다. 우리는 너무 조립된 삶을 살았던 것이 아닐까, 그의 분해들과 이 이상한 동작들은 그동안 억눌렸던 모든 감정들을 자유로이 표출해낸다. 일전에 교수님은 그랬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두 와해한 뒤 진실을 보게 하는 것이라고. 비록 이 영화가 문예사조에 맞췄는지는 모르겠지만, 주인공이 보여준 모든 해체와 그 후 나타난 일말의 자유가 바로 진실의 일면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억눌려 있다는 것. 춤을 추는 그의 모습이 비정상이라기 보다 자유로워 보였던 이유는 바로, 그 모든 표준과 기준들을 무시한 해체와 행위들이야 말로 내가 지금 당장 원하는 표출이자, 자유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남윤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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