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Define Yourself [기타]

Define의 D
글 입력 2018.06.29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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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막 5학기를 마친 대학생이다. 기말고사까지 마무리했지만 시험의 끝이 진정한 종강은 아니었다. 가장 힘겨웠고 짜릿했던 과목의 과제가 남아있는 탓이었다. 이 수업에서는 한 학기 내내 모든 시간에 글을 썼다. 다시 말하면 제한된 시간, 정해진 조건 하에서 글을 손 글씨로 완성해 제출하는 시험을 경험해야 했다. 매 시간 글을 내고 나면 손가락이 지끈거렸고 얼굴은 몰린 긴장과 흥분으로 터질 듯 붉었다. 특히 첫 시간이 그랬다. 시스템이 낯설었다는 핑계도 한 몫 했겠으나 사실 내 숨을 막은 것은, ‘자기소개’라는 주제 때문이었다.

자기소개는 나를 아는 듯이 적어야 한다. 내가 보장하는 나를 소개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나의 어떤 모습도 제대로 정의할 수 없었다. 문장도 소재도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서론도 완성하지 못한 채, 답안지를 던지듯 제출하고 강의실을 뛰쳐나왔다. 그렇게 내가 가장 기대한 수업 첫 시간, 내가 사랑해마지않는 ‘글’에서, 인생 처음 D를 받았다.

스스로에게 솔직하기 어려웠다. 나라는 존재에 대한 확신이 없는 채로 자기소개를 쓸 수는 없었다. 결국 퇴고 단계에서 나를 소개하는 대신, 나를 떠올리게 하는 정도의 글을 작성하기로 했다. 대신, 솔직하기로. 꾸밈없기로.

다음은 내가 수정한 자기소개 글이다.

 

                                            

“미완성인 글이지만 제출하겠습니다!”라고 적었습니다. 종이를 들고 일어나 교탁 앞으로 가는 길은 역시나 순식간이었습니다. 한참을 미루고 싶어 발을 질질 끌지만, 어느새 사형선고를 눈앞에 둔 동물이 있다면 저와 같은 기분이었을까요. 한 시간 남짓 글에만 집중하느라 발개진 볼을 가리었습니다. 글 밑에 적힌 미완성이라는 단어 또한 손으로 살짝 숨기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것을 가린 채, 글을 던지듯 내버렸습니다. 이 날, 난생 처음 D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D라는 알파벳과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사실 S에 가깝기 때문이지요. 제가 가진 S는 Super의 S가 아닙니다. 제가 그리는 S는 Surpass의 S도 아닙니다. 저의 S는 Secret입니다. 어릴 적부터 나라는 사람을 숨겼습니다. 손에 쥔 가면이 여러 개였기에 문제없었습니다. 어머니 앞에서는 착하디착한 어머니의 딸로, 친구들 앞에서는 둘도 없는 장난꾸러기 친구로, 선생님 앞에서는 엉뚱하지만 똑 부러지는 학생으로 살았습니다. 그렇게 ‘예린’대신 ‘누군가의 예린’으로 살았습니다. 가면 뒤에 숨긴 맨얼굴은 우울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가면을 써댄 이유가 무엇이냐 물으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린 나에게는 우울을 숨기는 것이 유일한 사명이었다고. 그렇게 자라난 나에게 우울을 숨기는 것은 숨쉬기와 같은 일상이었다고.

 친구들이 모여 비밀 이야기를 할 때면 꼭 저를 초대하곤 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원하는 만큼 실컷 털어놓고, 본인 이야기는 이쯤 됐다 싶으면 제게 묻습니다. “예린이 너는 비밀 없어?” “예린이 너는 요즘 싫은 애 없어?” “예린이 너는 힘든 일 없어?” 저는 언제나 답했습니다. 나는 별 일 없다고. 그러고 나면 꼭 시시하다거나, 긍정적이라서 질투가 난다거나, 나는 너를 믿어서 이만큼 말하는데 너는 나한테 기대지 않아서 실망이라는 화살이 돌아왔습니다. 비밀의 대가로 비밀을 얻길 기대하는 눈길들이 지긋지긋했습니다. 사실 제 모든 비밀은 일기장에 있었기에 이들에게 말할 필요가 전혀 없었기도 했지요. 22년간 고민해결은 일기장과 펜, 그리고 일기장 주인의 몫이었습니다.

자기소개 글을 제출하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글을 적을 수는 있겠지만 자기를 소개하라는 이름의 글은 언제나 망설였고 힘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답하겠습니다. 굳이 소개해야 한다면, 사실 저는 D가 아닌 S입니다.





내 D는 B가 되었다. Death에서 Birth로의 전환이었을까? 그렇다면 나는 B라는 나의 새 이름에 만족해야 했을까?




안타깝게도 최종 과제를 제출한 종강 날은, 계절학기의 개강일과 동일했다. 이번 월요일부터 나는 또 다른 주 5일 전쟁을 시작했다.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연구가 ‘자아 커뮤니케이션’에서 출발한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교수님께서 해당 영상을 보여주셨다. 나를 정의하는 주체가 오롯이 나 자신이어야 한다는 메시지였다. 소름이 돋았다. 순식간에 다시 D로 돌아가는 기분이랄까. 나는 나를 정의하고는 있지만, 내가 정의하고 싶어 하는 나의 모습을 투영하지는 못했다. 솔직하지 못하다는 부담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나는 나를 정의하는 기준을 애초에 나 자신에게 두지 않은 것이다. 언제나 반사평가에 의해 자아를 형성했다. 사회적 비교를 해가며 자아를 흔들었다. 내 D를 define의 D로 바꾸어야겠다고 다짐하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모두 남들에겐 B일 수도, A일 수도, Z일 수도 있다. 혹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Z 하위의 무언가로 치부한 채 살아갔을 수도 있다. 이번 여름은 뜨겁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도 당신도, ‘defining myself' 시간으로 열기를 더해보는 건 어떨까?
 

[김예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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