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삐- 경로를 벗어났습니다

글 입력 2018.07.01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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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조금 섭섭했죠. 어쩜 사람이 그렇게 매정한가요. 못해도 4, 5년은 동고동락한 사이인데 말입니다. 수능 끝나자마자 저를 헌신짝처럼 내팽겨 치더니, 그 길로 저를 찾지 않으신 지가 벌써 3년째라고요! 그래도 갓 대학생이 되었을 때에는 그러려니 했지요. 그래, 좀 놀고 즐기고 해야지. 한 1년만 지나면 다시 나를 찾으시겠지. 그러면 예전처럼 우리는 목표를 정하고 그 누구보다 열심히, 누구보다 빠르게 달려가는 거야! 그러나 주인님은 해를 거듭할수록 저를 멀리하시더라고요. 정말 서럽습니다.

아, 소개가 늦었네요. 저는 주인님의 내비게이션입니다. 주인님 마음 속 한 귀퉁이에서 살고 있어요. 저는 주인님 삶의 길잡이 역할을 맡습니다. 삶의 목표를 정하고, 거기에 이르는 가장 효율적이고 빠른 길을 찾아내지요. 한때는 주인님의 마음 복판을 차지하고 위세를 떨치며 주인님의 최측근 노릇을 했지만, 요즘은 백수라 무료한 나날을 보내고 있답니다. 오늘은 특별히 주인님의 손을 빌어 제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셨어요. 맨날 주인님의 글이 올라오던 곳에 제 이야기가 담기다니 기분이 묘하네요. 잘 부탁드립니다.

…가 아니지. 잘 부탁은 무슨. 저는 오늘 하소연을 좀 해야겠습니다. 물론 우리 사이가 멀어진 것이 섭섭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주인님이 길도 못 찾고 갈팡질팡하는 것을 보면 얼마나 답답하고 한숨이 나오던지! 아니, 차라리 길을 찾아보겠다는 의지라도 있으면 괜찮습니다. 하지만 주인님은 목표를 정하고 길을 찾고 열심히 달리는 일체의 일에 흥미를 잃은 것 같아요. 그저 흐르는 대로 유유자적, 천하태평입니다.

아니 원래부터 이런 사람이었으면 말도 안 해. 그러나 우리 주인님, 원래는 아주 야무지고 강단 있는 사람이었답니다. 고등학교 졸업 전까지는 그랬으니까 그리 오래 된 얘기도 아니네요. 누구보다 먼저, 누구보다 많이, 누구보다 열심이었지요. 목표를 따악 정해놓고, 모든 일과를 그 목표에 맞춰 계획했답니다. 아무리 제가 짜 준 스케줄이지만 그 모든 걸 따박따박 지키는 모습을 보면 조금 무섭기도 했어요. 눈 떠서 다시 잠들 때까지 오로지 공부, 공부, 공부! 아, 자기관리는 또 얼마나 철저했는지요. 규칙적인 생활패턴, 학교와 독서실만을 오가는 삶, 단조로운 인간관계. 심지어 친구 있으면 공부에 방해된다고 독서실도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데로 다녔지요.

말 나온 김에 고등학교 때 얘기를 좀 더 하자면, 저는 정말 주인님이 지금 이렇게 살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야말로 공부벌레였거든요. 예술? 문화? 이런 건 한갓 취미였을 뿐입니다. 물론 오케스트라도 해보고 뮤지컬 공연에도 몇 번 심취한 적이 있었지만, 언제나 주인님 인생의 곁다리였을 뿐입니다. 게다가 뭐, 글? 하 참. 지금 생각해보면 재미있는 일입니다. 주인님은 굉장히 최근까지도 스스로 글을 잘 못쓴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그 계기가 바로 고등학교 선생님한테서 들은 말 한 마디였습니다. 때로 사소한 일이 한 사람의 자아 정체성을 결정하기도 하죠. 그깟 1000자짜리 자기소개서로 글쓰기 능력을 파악한다는 것도 웃기지만, 어쨌든 당시 고3이었던 주인님이 없는 시간 쪼개가며 고민 고민해서 쓴 자기소개서를 보시고 국어 선생님은 이런 말을 해줍니다.

“야, 넌 나중에 절대 글 쓰지는 마라.”

조언을 가장한 조소였지만 그닥 상처가 될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글은 내 길이 아닌가보다’, 생각하고 마는 정도였지요. 그도 그럴 것이, 당시의 주인님은 글하고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가장 못하는 과목이 국어였고요, 특히 문학은 얼마나 어려워하던지. 수학이나 과학같이 답이 확실한 과목을 좋아하던 주인님은 역시 답이 확실한 이 나라의 입시제도와 잘 맞았나 봅니다. 그저 시키는 대로 열심히 공부해서 남들 인정하는 학과에 진학하고, 또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원 가고 교수 되는 게 목표라면 목표였습니다. 아니지, 그냥 눈앞에 닥친 시험에서 1등을 찍는 게 가장 확실하고 절실한 목표였어요. 뚜렷한 목표에 탄탄한 직선대로. 덕분에 저는 편하게 길 찾을 수 있었습니다. 어디로 가야하는지, 속도를 조절해야 되는지, 방향을 틀어야 하는지, 그런 고민 따위 할 필요 없었어요.  

그랬던 주인님이 이렇게 한 순간에 변할 거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요. 말 잘 듣는 착한 아이였던 주인님은 대학 입학과 동시에 반항과 탈선이라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되고, 그 때문에 저의 지위도 서서히 흔들리게 됩니다. 열심히 길 찾아서 목적지로 안내해줬더니 갑자기 역주행을 하지 않나,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돌지를 않나. 아예 지도에 없는 길로 가버릴 때도 많았습니다. “경로를 벗어났습니다. 경로를 벗어났습니다.” 아무리 외쳐도 듣는 척도 안 하덥니다.

음,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어요. 공부밖에 할 줄 모르던 사람이 더 이상 ‘우등생’으로 살 수 없는 사회로 오니 방황하기 마련이었지요. 그 김에 주인님은 그동안 못 했던 것을 실컷 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춤 동아리도 들어가고, 과 대표 활동도 해보고, 사람들도 어마어마하게 만나고 연애도 실컷 했습니다. 이상한 건,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면서도 늘 어딘가 부족함을 느낀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전의 정체성이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정체성이 생기지 못한 탓이겠지요. 정체성이 비어버린 사람의 불안감이랄까, 공허함이랄까, 그런 게 있었습니다. 당시 주인님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있죠. ‘한 건 많은데 돌아보면 뭘 했는지 모르겠다.’

처음에는 아트인사이트도 그 ‘이것저것’ 중에 하나였습니다. 당연히 제가 안내한 길은 아니고, 주인님이 저 없이 종이지도 한 장 들고 헤매다가 도착한 곳입니다. 그런 곳이 주인님의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주다니, 놀라운 일이죠. 아, 아트인사이트에 대해 설명드려야 할 것 같네요. 아트인사이트는 문화예술 전문 플랫폼으로, 문화예술단체에게는 홍보의 장, 소비자에게는 문화예술 정보를 얻는 곳, 그리고 주인님같이 글 쓰는 사람에게는 자유롭게 자신의 글을 세상에 보일 수 있는 자리입니다. ‘자유롭게’, 이 점이 가장 큰 특징이자 주인님을 매료시킨 부분이기도 하죠.

그래도 아무리 자유롭게 글을 써도 된다고는 하지만 말입니다. 글 못쓴다는 말까지 들은 사람이, 더군다나 문화나 예술에는 문외한이었던 사람이, 오직 ‘하고 싶다’는 마음의 외침만을 쫓아 이곳에 발을 들이다니요. 그런데 그 마음의 외침이 생각보다 많은 것을 바꿔놓습니다. 자신이 쓴 글이 헤드라인에 올라가고 많은 사람들에게 읽힌다는 것은 주인님에게나 저에게나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네이버 포스트와 브런치에 올라간 글에 조회수가 높아지고 댓글이 달리는 것을 보며 처음에는 의아해하고, 반신반의하다가, 나중에는 성취감과 자신감을 느끼더라고요. 그래 자신감. 그게 가장 큰 힘이 된 것 같습니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은 이렇게 생겨납니다.

우리 주인님이 글을 쓴다니. 그것만으로도 믿기지 않을 일이었지만 더 놀라운 건 예술입니다. 주인님이 한 달에 3-4번씩 공연에 전시에 페스티벌을 다닐 거라고는, 그것도 단지 관객이 아닌 에디터의 신분으로 다닐 거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예술은 언제나 부업이었거든요. 제 지도에서는 저 멀리 산 너머 있는 작은 별장 정도였습니다. 가끔씩 시간 날 때, 머리 식히고 싶을 때 시간 들여 돈 들여 찾아가기는 하지만, 예술은 언제나 쉼터일 뿐 절대 진지하게 마주하는 대상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아트인사이트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레 문화활동의 양과 질 모두가 높아지게 되고, 그 덕에 예술이 단지 부차적인 취미나 힐링을 넘어서 점차 삶의 중심이 되어가는 것 같네요. 아무래도 조만간 저에게 입력된 ‘내 집’ 주소를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이제 생각을 조금 달리 해보려 합니다. 이렇게 진지하고 열정적인 주인님의 모습은 정말 오랜만에 보거든요. 그전까지는 남들이 닦아놓은 탄탄대로를 벗어나면 경고음밖에 울릴 줄 모르던 내비게이션이었지만, 지금은 주인님이 정말 가고 싶어 하는 길로 안내해 드리고 싶습니다. 아, 그렇다고 벌써 목적지가 정해진 것은 아니에요. 글 쓰는 것 혹은 작가가 되는 것이 목적지 아니냐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다만, 글쎄요. 제가 보기에 아직 주인님의 목표는 계속해서 경로를 벗어나는 것뿐입니다. 저에게 그러더라구요. 자기는 지금 내비게이션 따라 기계적으로 목적지를 찾아가고 싶지 않다고. 종이 지도 한 장만 들고 세계 구석구석을 살피고 누리며 두 발로 걸어 다니고 싶다고. 그 덕에 저는 휴직기간이 좀 더 늘어나겠지만 뭐, 괜찮습니다. 언젠가 필요하실 때 다시 찾아주시겠지요.

오늘도 주인님은 경로를 벗어납니다. 그래도 저는 더 이상 경고음을 울리지 않아요. 조금 더 헤매고, 조금 더 넘어지고, 조금 더 돌아가라고. 그런 꼬불꼬불한 골목길이 진짜 주인님의 길이라는 것을 이제 아니까요. 저는 주인님의 길잡이로서 주인님이 가는 어떤 길이든 응원할 뿐이랍니다.


- 내비게이션 씀


[김해랑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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