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나의 색도 무지개를 이룰 수 있음을

글 입력 2018.07.01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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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활동을 마무리하며 폴더에 차곡히 쌓여있는 글들을 훑어본다. 생각해보면 참 다르게 살고 싶었다. 다름의 방향이 조금이라도 밑을 향해 불거지면 낙오자가 되었던 지난날을 보듬는 위로들이다. 아트인사이트를 통해 나의 색은 무지개를 이루며 하늘 높이 띄워졌다.



몸짓에서 꽃이 되기까지

처음 지원서를 냈을 때 생각이 난다. 문화예술에 대한 광범위한 질문은 문화예술에 관심이 있다고 자부한 것이 민망할 정도로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물음들이었다. 자신에게 문화예술이란 무엇인지, 현재의 문화 이슈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자신을 나타내는 단어는 무엇인지, 생소하게도 온통 ‘나의 생각’을 묻는 말들이었다. 그에 대한 답이 항상 머릿속에 부유하고 있음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 낱말들은 언제나 들뜬 몸짓으로 띄워지다 아무도 없는 그늘 아래 힘없이 내려앉곤 하였다.

에디터로서 활동한 4개월의 기간은 내내 그러한 질문의 연속이었다. 질문의 주체는 나 자신이 되기도, 아트인사이트라는 공간을 함께 향유하는 독자의 시선이기도, 새로운 소재로 또 다른 물음을 만들어내는 귀한 글이기도 하였다. 쏜살같이 지나가서, 혹은 한없이 잠잠히 머물러서 포착하기 힘든 문화와 예술의 흐름에 대한 집요한 질문들은 갖가지의 형태로 나의 생각을 불러 세웠다. 소중한 물음들은 따뜻한 불빛이 되어 어둠 속에 침전하던 색에 이름을 붙여주었다.



흑백의 프레임으로부터의 해방

그러나, 종종 그것보다 커다랗게 나를 은근히 에워싸는 것이 있었다. 향유하는 문화와 예술, 그리고 그에 대한 생각의 우열을 판정하는 기준이었다. 모범답안에 해당하지 못할까 두려움이 앞섰고 고급문화와 저급문화를 나누는 편협한 색안경이 앞을 가리곤 했다. 깊은 통찰이 엿보이는 글을 보면 감탄하기보다 주눅이 들었고, 가끔은 향유하는 예술의 소재가 투박한가 싶어 부끄럽기도 하였다. 내 안에 예술이 있다는 이유로 젖어 들었던 우월감은 그 이면의 열등감으로 돌아와 꾸준히 나를 괴롭혔다. 문화는 소통이고, 소통은 상호 동등한 지위를 전제로 한다. 문화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조차 실현하기 버거웠다.

그래서인지 에디터 기간에 향유한 문화예술은 유독 그에 대한 위안처럼 다가왔다. 문학 「데미안」에서 선악의 경계를 부수며 실존을 확립하는 이야기에 긍정적인 충격을 받았고 가인의 음악 「Carnival」을 분석하며 죽음에 대한 고정관념에서의 탈피를 시도했다. 문화 초대를 통해서는 하림과 집시앤피시오케스트라의 「집시앤테이블」 공연을 통해 목적 없는 방랑의 가치를, 도서「고야, 계몽주의의 그늘에서」를 통해 고야의 밤에 드리운 그늘의 의미를 떠올렸다. 머금는 문화들은 모두 빛을 받지 못해 바래는 색을 비추었고 본래 찬란한 그 색을 찾아내는 과정은 기쁨 그 자체였다. 저마다의 문화가 갖는 색과 소통하는 가운데 우열의 잣대는 차츰 힘을 잃어갔다.

아트인사이트는 내게 그런 의미이다. 더 낫고 더 못한 색은 없다. 처음부터 빛바랜 채 태어나는 색도 없다. 에디터로서의 여정은 나의 색을 가두는 흑백의 프레임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즐거운 몸부림이었다. 검고 흰 정도만으로 모든 색을 설명할 수는 없다.



문화적으로 사랑하기

사실, 이러한 고민의 과정은 올해 목표 삼았던 것과도 관련이 있다. 받는 것에 익숙해진 버릇을 고치자는 의미로 ‘모든 이를 사랑하자’는 목표를 품었다. 그러나, 어째 목표를 되새길수록 이루기 힘든 것이었다. 역시 높고 낮음을 가림의 문제였다. 예술에 대해 그랬듯 사랑을 목표했다는 것 자체로 일종의 도취감에 휩싸였던 것이다. 어느새 나는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해 주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어느 시인의 다짐처럼 모든 죽어가는 것에도 따뜻한 시선을 던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랑
1.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
2. 어떤 사물이나 대상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거나 즐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
3. 남을 이해하고 돕는 마음. 또는 그런 일.


문화가 그렇듯 사랑 역시 소통이다. 같은 눈높이에서 마음을 함께 할 때 비로소 싹트는 것이다. 나의 색뿐 아니라 타인의 색 역시 다채롭게 포함하여야 한다는 점에서 문화를 머금는 방식과 닮았다. 문화예술을 이루는 일원으로서 소통을 숙련하는 과정은 자연히 사랑의 연습으로 이어졌다.

사랑은 동시에 현재의 문화예술이 가장 필요로 하는 가치라고 생각한다. 10년 뒤에도 예술의 가치가 존재할까, 누군가 물었다. 그동안 인간들은 예술을 구실로 얼마나 많은 폭력을 자행했는가. 예술적 의도를 빌미 삼아 권력을 남용하고 린치를 가한 자들의 추악한 민낯은 지금까지도 폭로되고 있다. 사랑은 차치하고 최소한의 인간다움마저 상실한 예술의 모습은 더없이 황폐하다. 사랑의 부재는 곧 소통의 부재이고 그것이 채워지지 않는 한 문화와 예술은 여전한 가치로 지속될 수 없다.



맺으며,

문화예술의 부분을 하나씩 껴안을수록 사랑의 필요를 느끼고 사랑을 열망할수록 문화예술의 필요를 느낀다. 그렇기에 주목받지 않는 소중한 목소리와 사랑으로 소통하며 문화의 도화지를 더욱 크게 펼쳐 나가는 사람이 되는 것이 최종적인 목표이다. 또한, 아트인사이트가 그랬듯 나의 작은 외침도 누군가의 색에 이름을 붙이는 시선이 되었으면 좋겠다. 언젠가 시선이 닿을 그 색이 반드시 화창하게 꽃피우기를 바라며, 감히 전해본다. 당신의 색도 무지개를 이룰 수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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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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