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우리라는 이름의 울타리, ‘우리가 아직 살아있네요'

글 입력 2018.07.01 23:47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REVIEW]

연극 '우리가 아직 살아있네요'


141.jpg
 

떼아뜨르 봄날의 언어는 먹구름 잔뜩 낀 장마철의 보통날과 다를 바 없다. 우중충한 하늘을 뚫고 내리는 비가 대지에 정화를 가져다주는 것처럼, 봄날의 언어와 호흡 또한 유의미한 삶에 대한 카타르시스로 다가온다.


‘우리’라는 단어가 주는 경계는 어디까지일까. 가족은 우리가 될 수 있을까? 우리는 비로소 가족이라 불릴 수 있을까? 연극 ‘우리가 아직 살아있네요’는 ‘우리’라는 이름의 울타리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던진다. 생과 사로 억지로 분리시킨 후에야 비로소 보이는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형성된 빌어먹을 운명의 고리인건지, 연극은 묻고 또 묻는다.
 
현식과 은주는 어린 두 딸과 함께 가정을 꾸리며 살아간다. 그러나 경제적 압박에 못 이겨 두 딸을 결국 포기하게 된다. 부모로서 자식에 대한 최고의 도리는 못해도 최선을 다하며 살자고 다짐해왔던 이들이지만 결국 돈 앞에서 부모 자식 간의 인연을 끊어버리고 만다. 포기는 단순히 좋은 옷을 입혀주지 못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이지 못하는 상황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이들은 봄기운이 생동하기 시작하는 어느 겨울의 끝자락에, 어린 자녀 둘을 죽이고 만다.
 

우리가 아직 살아있네요_장면사진5.jpg
 

자식을 죽이고 뒤따라 죽음을 택했지만, 어찌된 이유에선지 현식과 은주는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다. 부모라는 이름으로 자식에게 몹쓸 짓을 했지만, 인간이라는 존재로 다시 삶을 살아가게 된 것이다. 글쎄, 자녀들은 죽고 싶었을까? 분명 살고 싶었을 것이다. 현식과 은주는 죽고 싶다는 생각을 품었지만, 자녀들의 생각까지는 미처 품지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 죽고 싶다는 건 잠깐 스쳐지나가는 찰나의 감정에 불과할지 몰라도 살고 싶다는 생(生) 앞에서의 발악은 영원하고 또 영원하기 때문이다.
 
어린 자녀를 보내고 현식과 은주 앞에는 도피의 연속 그 자체인 삶이 놓여진다. 이때 삶은 어떠한 목적의식도, 윤리적 기준도 없는 그저 하루하루 버텨가며 겨우 이어지는 삶을 의미한다. 이리 저리 떠돌다보면 자신들의 죄가 사라질 수 있겠지, 아이들이 있었던 여느 평범한 가족의 순간이 흩어지겠지,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사실들을 마주하고자 이들은 달아나고 또 달아난다. 자식을 죽이고 나서 초반에 부부는 ‘자식을 죽였다는 사실’에 공포를 느낀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시간의 흐름 앞에서 부부는 점차 사실에 대해 무뎌진다. 자식을 죽였다는 명백한 사실이 존재하지만, 그 사실 앞에 느끼는 감정의 무게는 점점 가벼워지고 마는 것이다.

 
우리가 아직 살아있네요_장면사진4.jpg
 

삶이란 건 때때로 지나치게 진지하거나 지나치게 싱거운 면이 있다. 하루하루 버티면 한달이 되고 일 년이 된다. 그저 버티기만 하면 시간은 찌꺼기처럼 쌓여 인생이 된다. 현식과 은주에게도 삶은 이러한 존재였을까. 낯선 시골에 새롭게 정착한 부부는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삶을 마주한다. 자식들은 저 멀리 호주로 유학 보낸 상태고, 부부는 함께 있단 사실로 너무나도 완전하고 행복하다. 스스로 자기 최면에 빠진 것이다.
 
두 딸과 함께하는 ‘가족’이란 이름의 ‘우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현식과 은주 두 사람의 ‘우리’만 존재할 뿐이다. 극 후반에 이르러서는 우리의 개념이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현식과 은주의 도피 장면에 나레이션처럼 깔리는 두 자녀의 목소리가 진정한 우리인걸까. 신에게 사죄하듯 미친 듯이 울고 미친 듯이 웃는 두 사람의 모습이 진정한 우리인걸까. 아니면 부족하지만 그래도 서로 살아있다는 사실만은 놓지 않고 살아가던 질곡의 나날들이 우리였던 걸까.

‘우리가 아직 살아있네요’는 네 사람의 가족, 두 아이의 존재, 부부의 위태로움마저도 ‘우리’라는 울타리 안에 놓고 다각도로 바라본다. 우리는, ‘우리’라는 이름 안에 너무 많거나 너무 단순한 담고 있다. ‘우리’의 무게가 무거웠더라면 현식과 은주는 어린 두 자녀를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익숙함에 속아 소중한 ‘우리’의 가치를 잊고 살고 있다.





이다선.jpg
 

[이다선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5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