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존재의 아이러니 속에서 발현되는 욕망을 다루다: 우리가 아직 살아있네요 [연극]

글 입력 2018.07.02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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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우리가 아직 살아있네요>

작 신혜연 / 연출 이수인

2018.6.20~7.1
나온씨어터

극단 떼아뜨르 봄날





"모두가 제 존재를 가지고 주체적으로 살아가면 좋겠는데, 슬프게도 인간의 생에는 무수한 아이러니가 있다. 이유도 없고 어찌할 수도 없으며 가뜩이나 피할 수도 없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이 일어나고, 이 혼란 속에서 저마다 살아가거나, 존재하거나, 겨우 존재하다 이내 실패하기도 한다. 그 모순덩어리의 삶이란 무엇일까? (프리뷰 中)"


생각해보면 사고나 고난, 문제 따위가 우리의 삶을 그토록 극으로 모는 것 같지는 않다. 그보단 더 이상 해결방법이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을 때 우리는 좌절하고 만다. 닥친 역경을 이겨내고자 하는 의지가 꺾인다는 건 곧 삶의 경계에서 힘 빠진 팔로 턱걸이를 하는 것과 같다. 놓을까, 말까, 턱을 걸치고 버텨볼까, 말까···.

프리뷰를 쓰면서 '살아가는 것'과 '살아있는 것'에 대해 잠시 고민했다. 단순히 제목에서부터 시작된 고민이었다. 주체성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과 그저 살아있는 것. 그러나 세상은 언제나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모호하다. 연극을 보고나니, 그러니까 이건 실화니까, 사실을 마주하고 나니, 그리고 각색된 사실 속에서 열연하는 배우들을 보고 나니 저 둘을 구문하는 게 유의미한 일이었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사실 살아있는 건 이미 그 자체로 살아있는 건데. 나는 그 와중에 '주체성'이라는 근사한 이름을 가진 에너지로 살아가길 욕심냈나 보다.

극 속 가족들을 보니 그들 세상은 너무나도 무자비하고, 살아있는 그들을 보며 어디까지가 주체적인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것인지 구분할 수 있는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극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을 다시금 바라볼 수 있게 되었나에 대한 변화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토록 진부하고 비참한 세계를 -무대란 곳에서- 도맡으려는 데엔 이유가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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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NOPSIS

가난과 불안정한 생계가 걱정인 한 가정.
엄마는 영어학습지 판매원, 아빠는 일용직 노동자, 그리고 어리고 착한 두 딸.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발버둥치던 그들에게 마침내 '한탕'의 기회가 찾아오고
부부는 거액의 빚을 얻어 그 기회에 올인한다.

그러나 기대와 믿음은 엉뚱한 방향으로 치닫고,
감당할 수 없는 빚과 생활고를 이기지 못한 부부는
어린 두 딸과 함께 동반자살을 시도한다.

하지만 곡절 끝에 아이들만 죽고 부부는 살아남아 도피생활을 이어가는데···.


극 속 가족들의 이야기는 믿기 힘들만큼 비극적이다. 그렇다고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냐하면 결코 그렇지 않다. 이 역시 실화를 바탕으로 다룬 극이며, 이러한 일들은 뉴스기사에서도 비일비재하게 볼 수 있다. 내 나름의 기준으로 얼마나 사실적인가보다 더 중점에 두었던 건 '얼마나 극적인가'였다. 사실을 연극화해서 관객들에게 선보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면 뉴스기사를 찾아읽으면 된다. 기사가 줄 수 있는 것, 연극이 줄 수 있는 것, 같은 맥락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같은 소재를 다루는 데는 이유가 있으니까. 연극의 어떤 장점과 특성을 살려, 앞서 말한 이 가족의 비극을, 비극일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보여줄 것인가? '살아가는 것'과 '살아있는 것'마저 뭉뚱그려버리는 이 세상을 어찌 표현해낼 것인가?

*

먼저, 극단 떼아뜨르 봄날을 굉장히 좋아하고 있다고 말해두고 싶다. 나만 좇는 짝사랑이랄까? 그들의 작품을 모조리 다 본 건 아니지만 그들을 알고나서부턴 앞으로의 작품을 모조리 믿고봐도 되겠다 생각했더랬다. 그들의 개성은 충분히 희소가치가 있었고, 특색있는 극의 진행과 쫄깃한 대사, 특유의 음흉한 분위기와 해학이 좋았다. <안티고네>에선 깔끔하고 집중적인 고전명작의 해석이 돋보였고, 개인적으로 <춘향>에서 그들의 개성이 가장 돋보였다고 생각한다. 뻔하디 뻔한 춘향 이야길 이렇게 웃기고 또 적적하게 표현할 극단이 또 있을까 싶었다. 그런 이들이 현대작을 올렸다고 했고, 기사화된 사실을 다룬 다른 작품들이 어떻게 진행되어왔는지 알고있음에도 반갑게 초대에 응했다.

그러나 이번 작품에서 내가 애정하는 그들만의 개성이 돋보였나에 대해서는 못내 아쉬움을 표한다. 떼아뜨르 봄날 특유의 과장된 톤과 맛깔스럽게 관객에게 날리는 억양은 극에서 등장하지 않았다. 혹여나 사실과 사실을 둘러싼 애도의 분위기에 폐를 끼칠까 하는 우려였던 걸까? 극단이 가진 개성과 선택한 소재가 어긋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전 작품에서는 귀에 쏙쏙 박히던 나레이션도 이번 작품에선 내게는 정보전달의 대사로서만 닿았다. 아마 고전 작품들은 인물의 시각이나 상황에 따라 상상의 폭이 넓고 여지가 다양하지만 이는 사실 그 자체를 다뤄야했기 때문일 거다. 그러니 나레이션을 '지어낼 수(맛깔스럽게 문장을 쓸 수)' 없었을 것. 그렇다면 온전히 극(연기)의 진행으로만 가면 어땠을까 싶다. 다른 작품에선 장점이 되었던 나레이션이 이번 작품에서는 사실과 배경을 설명하기 위한 장치로만 느껴졌기 때문이다. 동반자살 실패 후 부부의 생활. 한 시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시공간의 점핑이 꽤 크고 잦게 이뤄졌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러나 그들이 가진 또 하나의 강점인 반복과 운율은 여전히 극 속에서 적절하게 녹아들었는데, 여기에 그들의 몸짓마저 전작들보다 비교적 역동적이어서 극의 분위기를 확 살린 것 같았다. 묵직할 땐 더욱 묵직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가벼울 땐 훨씬 즐거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한탕'하러 빚을 질 때 엄마가 처절하게 달린 장면이나 아이들의 목을 조르는 두 부부의 손짓, 꽃놀이를 가서 사진을 남기는 장면들이 그러했다. 이점들을, 앞서 소재와 아쉽게 어긋났던 장점들보다 더욱 부각시켰다면 훨씬 더 극적으로 보이지 않았을까 싶다. 비극적인 사실을 가지고 해학을 보였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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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은 우리를 말하고, 우리 주변을 보여주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극단이 가진 장점과 특색, 그리고 가치관에 따라 하나의 사실도 다양하고 변하고 또 그만큼 다양한 것들을 우리에게 전달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재미있다. 유의미하다. 그러나 무수한 창작자들과 방법들 속에서의 실현은 언제나 무척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렇기에 이들의 이번 작품을 응원한다. 잊혀진 사실을 다시 되새기게 하고 아름답거나 혹은 슬픈 우리의 현실을 맞닥뜨리게 하려는 이들의 마음이 이 극이 존재해야 할 가장 첫 번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변화의 여지가 없어보이는 세상이라 해도, 모두가 잘 살 수 없는 현실이라 해도 이와 꾸준히 마주하는 것과 고개를 돌리는 건 큰 차이를 낳는다. 이 극을 응원하고 이 극 속 단란했던 한 가족을 애도한다. 우리는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음'에 만족하거나 아직 '살아있음'에 얕은 숨을 내뱉는 게 아니라, 끈덕지게 '살아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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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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