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죽음 앞에서 겨우 주어지는 '삶다운 삶'의 아이러니, 연극 우리가 아직 살아있네요

글 입력 2018.07.03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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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아직살아있네요_포스터2.jpg
 

리뷰 쓰기가 두려워 지는 경우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극이 너무 별로였을 때다. 너무 별로라서 굳이 비판하고자 하는 마음도 들지 않을 때. 공연 날짜의 일정을 빼고, 공연장에 찾아가는 것만 해도 이미 그 극에 엄청난 에너지를 쏟은 것인데 극이 그 에너지만큼의 보상을 해주지 못했을 때, 더 이상의 에너지를 쏟는 것 자체가 싫어 리뷰 쓰기가 싫어진다. 아무래도 리뷰는 정제된 말로 써야하는데 ‘정말 별로였다’라는 말을 정중하게 바꾸는 과정이 피로하기도 하니 말이다.

두 번째는 극이 너무 마음에 들었을 때다. 내게 너무 큰 감흥을 주고, 너무 많은 생각들을 하게 하는 극. 뇌리에 박혀서 쉽게 잊힐 것 같지 않은 극을 봤을 때도 리뷰 쓰기가 두려워진다. 그 수많은 생각들을 한줄기로 잡아서 하나의 글로 완성해낸다는 것 자체가 어렵기도 하고, 어설픈 내 글 솜씨론 내가 극을 보면서 느꼈던 것들을 담아내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리뷰에서 갑자기 이런 장황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은 이번 극은 아주 오랜만에 후자에 속했기 때문이다. 너무 좋아서 리뷰 쓰는 게 너무 무서웠던 극. 아마 글 자체가 두서없고 논리의 비약도 심할 테지만 그만큼 이 극이 좋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 주길 바란다.


 
동반자살? 자식 살해!

처음 프리뷰를 쓸 때 ‘동반자살’을 시도한다는 시놉시스를 읽고도 별 생각이 없었다. 그만큼 ‘동반자살’이라는 단어에 나 또한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극을 보면서, ‘아이들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결국 아이들을 살해하고 마는 부모를 보며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저게 과연 ‘동반자살’이라고 할 수 있나. 동반자살이란 단어를 분석해보면 ‘동반’과 ‘자살’이다. 즉 동반해서 자살을 한 것인데, 아이들은 ‘자살’을 하지 않았다. 아니 죽을 의지도 없었다. 은주가 아이들에게 ‘엄마 아빠 없는 세상에서 살 수 있느냐’는 질문을 했던 것으로 정당화를 하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아이들이 죽을 의지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확인이 불가하다. 실제로도 아이들은 번개탄 때문에 숨이 막힌다며 부모에게 살려 달라 호소한다. 결국 말이 좋아 동반자살이지, 이는 자녀 살해에 지나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이 연극을 본 주에 김희경의 ‘이상한 정상가족’이란 책을 읽게 됐는데, 그 책을 읽고 나서 그 생각은 더욱 뚜렷해졌다. 김희경은 ‘동반자살’이란 말 자체가 어불성설이며, 그 단어 자체를 사용하지 말아야한다고 말한다. 이는 ‘자식 살해 후 부모 자살’일 뿐이라는 것이다. 부모들은 ‘자식들을 책임진다’는 명목으로 이를 시도하지만, 아이들의 삶은 부모의 부속물이 아니다. ‘책임’이란 명목으로 아이들까지 죽이는 것은 월권이다.


우리가 아직 살아있네요_장면사진4.jpg


김희경은 이러한 논리를 전개하면서 왜 우리나라나 일본 등에서는 이를 ‘동반자살’이라며 한 가족의 비극쯤으로 치부할 뿐 부모가 아이들을 살해했다는 사실을 지워내는지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사회적 안전망이 충분치 않아서 개개인의 삶을 온전히 개인이나 가족이 책임져야만 할 때. 사회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해 한 개인이 붙잡을 수 있는 게 가족밖에 없을 때 부모는 자식에 대한 막대한 ‘책임의식’을 느끼게 된다.  결국 소위 ‘동반자살’이라 불리는 행위는 자신들이 세상에 없을 때 주변 사람이든 사회든 자식이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게끔 도와주지 않을 것이란 절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 사회에선 자식들을 부모의 소유물쯤으로 치부하는 사고가 만연해진다. 그래서 자녀 살해 후 부모 자살을 사회적으로 ‘가족의 비극’ 혹은 ‘가장의 비극’쯤으로 치부해버리고, 자신의 삶에 대한 선택권조차 갖지 못한 아이들의 죽음에 대해선 묵인하는 것이다.


“엄마는 너희를 사랑한단다.
예쁜 우리 딸들, 엄마가 다 해줄게. 다 줄게.”

“사랑하는 너희들을 위해서,
너희들을 위해서! 너희를 죽인다.”


<우리가 아직 살아있네요>를 볼 때도 부모가 아이들을 살해하는 장면은 너무도 처참하다고 느꼈지만, 이러한 논의를 읽고 다시 그 장면을 떠올려보니 더욱 더 참담한 느낌이 들었다. 은주와 현식의 삶에서도 ‘복지’가 기능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은주네 가족의 생존은 온전히 은주와 현식에게만 달려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자녀를 살해한 선택이 정당화 될 순 없지만, 그들의 삶이 정말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아 입맛이 썼다.

 

삶의 끝에서야 느끼는 생생함

프리뷰를 작성하면서 나는 ‘살아가는 것’과 ‘살아지는 것’의 차이에 대해 생각했다. 분명 죽음은 무서운 일이기에 죽는 것조차 큰 용기가 필요하다고. 그래서 주체적으로 살아가지 않더라도 살아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부부의 이야기는 그렇게 살아지는 이들의 이야기고, 극은 죽지 못해 사는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삶의 아이러니를 말할 것이라 예측했다. 삶은 모두가 말하듯 ‘숭고한’게 아니라, 단지 ‘죽지 못한 상태’를 의미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극은 충분히 의미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극은 내 예상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갔다. 분명 처음의 부부는 ‘죽지 못해’ 살았던 것이지만 극 후반부로 갈수록 부부는 오히려 아이들과 함께할 때보다 더 의지적으로 생생한 삶을 ‘살아간다.’

아이들은 죽고 부모는 우연찮게 살아남았을 때. 둘은 바로 죽으려한다. 서로 저 돌로 머리를 깨달라고 부탁하는 등. 아이들이 외롭지 않게 얼른 따라가야 한다며 죽음을 종용한다. 하지만 번개탄이 타고 있고, 가족 모두가 함께 죽으려했던 아까와 달리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상태에서 서로를 죽인다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고 부부는 죽음을 잠시 보류하기로 한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생겨난다. 은주와 현식은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 단 한번도 자유를 누려본 적이 없는 이들이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수도없는 집들을 방문하며 학습지 교사를 했던 은주나, 일용직 노동자로 항상 일을 기다려야만 했던 현식. 그렇게 힘겹게 일을 해서 돈을 벌어봤자 집안 사정은 나아지지 않고, 항상 아이들을 위해서 돈을 사용하느라 자신들의 사소한 사치마저 누릴 수 없었다. 은주는 하루 중 유일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샤워시간마저도 시누이 집에 얹혀산다는 이유로 포기해야만 했다.


더러운 실내화를 신기고 싶지 않았어.
무료 급식 줄에 서게 하고 싶지 않았어.
아이들한테 더 잘해주고 싶었어!”


하지만, 그렇게 살아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아이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살고 스스로를 희생하지만, 아이들에게 더 잘해주지 못한다는 이유로 자괴감을 느껴야만 하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굴레 속에서 그들은 살아있으되 살아있지 못했다. 우리 가족은 화목하니까, 아이들이 사랑스러우니까. 우리는 너희를 사랑하니까. 아무리 이렇게 합리화를 해도 나아지지 않는 절망의 굴레. 은주네 부부가 살았던 삶은, 그들 스스로 ‘살아갔다’고 생각했던 삶은 어쩌면 그야말로 ‘살아지던’ 삶일지 몰랐다.


우리가 아직 살아있네요_장면사진3.jpg


그런데 그랬던 은주와 현식에게 ‘자유’가 주어진 것이다. 아이들이라는 책임에서 벗어나고, 가정, 미래 등등. 죽지 못해 산다는 인식, 즉 언젠가는 죽어야한다는 인식은 오히려 은주와 현식에게 자유를 쥐어준다. 분명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사는 삶인데…그래서 더 자유롭고, 생생한 삶이 주어지는 아이러니.

아주 오랜만에 바람을, 하늘을, 자연을 느껴본다는 은주. 생에 처음으로 백화점에서 립스틱을 사본다는 은주. 결혼 후에 레스토랑에서 분위기 잡고 음식을 먹어본 건 처음이라는 현식. 아이들이 태어난 이후 단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성관계를 가지는 부부.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당연히 누려야할 것들을, 삶을 포기하고 나서야 느낄 수 있는 이들의 아이러니. 성관계를 가지며 ‘행복하다’고 말하는 은주의 말 앞에 ‘비로소’라는 단어가 생각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책임에서 벗어나고서의 삶이 너무도 생생해서 너무도 ‘사람 사는 것’ 같아서. 그들은 죽음을 끝없이 보류한다. 아니, ‘살아간다’. 부부는 의지적으로 자신들이 원하는 것들을 해가며 살아간다. 죽음을 보류하는 차원을 넘어서 진정으로 살아간다. 아이들은 호주에 있다는 되도 않는 거짓말로 스스로를 위안하고 합리화까지 해가면서 살아간다.

나는 이 부부의 삶이, 너무 처절하면서도 타당해서 가슴이 먹먹해져왔다. 별 거 아닌 것 같아도 응당 사람이 사람같이 살기위해선 필요했던 그 모든 것들이 이 부부의 삶에선 허락되지 않았다. 바람을 느끼고 하늘을 바라볼 잠깐의 여유, 가끔 기분 정도는 낼 수 있을 만큼의 작은 사치,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 등. 타인의 범주에서 보자면 ‘정상적 삶’을 살고 있을 당시 부부의 삶이 오히려 더 삶 같지가 않았다. 정상적 삶을 유지하기 위해선 ‘삶다운 것’들을 모두 포기했어야 했던 이들의 삶이, 그래서 자식을 죽이고 죽음을 보류한다는 극한의 상황까지 가서야 겨우 ‘삶다운 삶’을 살 수 있던 이들의 삶이 너무도 안타까웠다.



그래서, 삶이란 무엇인가

사실 최근 오래도록 사겼던 연인과 이별하고 힘겨운 시간들을 보냈었다. 그 시간들이 힘겨웠던 이유는 곁에 있던 존재가 멀어져버렸다는 것도 있지만, 소중한 시간들은 모두 지나갈 뿐이란 허망감 탓이 컸다. 앞으로도 내 삶에 분명 더 행복하고 더 소중한 시간들이 있으리라는 것을 믿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들조차도 지나가버리고 사진으로 찍거나 기록한다고 하더라도 기억이란 불완전한 것에만 기대어 존재할 허망한 것들이란 생각에 힘겨웠었다. 어차피 지나갈 것들이고, 어차피 사라질 것들이라면 사람은 대체 왜 사는 것일까. 왜 하루하루를 아등바등 사는 것일까. 지금의 행복도, 고난도, 슬픔도, 내가 소중히 했던 것도, 나를 괴롭혔던 것도 모두가 다 사라져버릴 텐데. 내가 손에 쥐고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텐데. 그렇다면 우리는 대체 왜 무엇 하나라도 더 손에 쥐려고 하는 것일까. 어차피 곧 손 안에서 스러져 바람에 흩날려 갈 것들일 뿐인데.

그런 허망감에 완벽하진 않더라도 약간의 답을 준 게 이번 연극이었다. 그토록이나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사람은 그 순간순간 행복하면. 행복을 느낀다면 행복해한다. 어차피 지나가 버릴 행복이고, 의미 없다고 할지라도 그 순간순간만큼은 삶이 찬란히 빛난다. 그래서 그렇게 허망하고 무의미한 삶, 왜 사는건데? 행복해봤자 그게 무슨 의미야? 라고 묻는다면 아직도 그에 대한 답은 못 찾았다. 하지만. 어차피 죽지 못할 거면 살아가야하는 게 삶이고, 죽는데도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면. 일단은 살아지는 대로, 살고 있는대로 살아가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사실 생각보다 별 것도 아닌 것들이니 말이다.




[권희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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