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우리는 별자리가 아니라 빛나는 하나하나의 별들이니까, 그리스인 조르바

글 입력 2018.07.04 0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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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바 표지.jpg



[PRESS]
우리는 별자리가 아니라
빛나는 하나하나의 별들이니까
그리스인 조르바


청춘이 나에게 도전장을 내밀었었다. 삶은 거대한 정글이었고, 나는 그곳에 떨어진 작은 햄스터 한 마리였다. 나는 이 세계에서 얼마든지 뜯어먹힐 수 있었다. 내가 붙들고 있는 실존과 삶은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었다. 겉으로야 태연하고 여유로운 척을 했지만, 사실 나는 내 존재가 덧없이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에서 도무지 벗어날 수 없었다. 단 한번 사는 삶은 치열하고 무언가 실수없이 남기길 요구했다. 나는 니코스 카잔자키스가 쓴 프롤로그에 크게 공감한다. 나도 끝없이 나의 삶 그자체를 즐기는 대신 이 유한하고 보잘 것 없는 삶을 예술로 만들려고 애썼다. 예술이야말로 모든 것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그나마 남길 수 있는 존재의 흔적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인생을 예술로 만든다는 이 슬픈 특권은 나를 포함해 수많은 육식동물을 파멸시켰다. 니코스 카잔자키스는 예술을 함으로써 누를 수 없는 욕망에서 빠져나갈 탈출구를 찾아내고, 뜨거운 가슴을 버리고 영혼을 가볍게 만들고, 더이상 고뇌하지 않고, 몸싸움을 피하고, 삶과 행동에서 한발 떨어져 욕망의 격정을 잘 길들여 없앴다고 자랑하는걸 즐긴다고 했다. 예술을 한다는 것은 결국 또다른 규정을 만드는 것과 같다. 그것들은  삶의 영역을 규정하고 규정된 삶의 한계 안에서 삶을 짜맞춰오는데 익숙하게 만들었다. 고뇌하기 전부터 명확한 한계 속에 갇혀있었기에 다시 방향을 잃었다. 그때 조르바를 만났다. 그는 예술을 하는 사람도, 규정에 얽매인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자유인이었다. 그래서 책 속에서 길을 잃은 주인공이 조르바의 첫등장에 매료되었던 것처럼 나도 그에게 금방 빠져들었다.

책을 모두 읽은 지금, 나는 왜 카잔자키스가 프롤로그에서 조르바의 영혼을 잉크와 종이로 변하게 했음에 안타까워 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추측하건대, 카잔자키스는 어린아이같이 순진무구하지만 끝없는 생명력을 가진 조르바의 영혼을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에 박아 넣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것 같다. 나도 쉽게 글이 써지지 않는다. 사실 매일 아침 떨어지는 새벽 이슬에도 감명을 받던 조르바의 삶이 가진 매력을 형이상학적인 해석이나 언어로 박아넣는 것만큼 우습고 모순적인 일이 세상에 또 있을까.

<그리스인 조르바>는 비교적 단순한 서사구조를 지니고 있다. 갑자기 나타난 조르바가 딱딱한 주인공의 철학을 갈군다. 하루종일 글을 쓰는 그와 일하고 노는 조르바는 같이 만나 맛있는 음식을 즐기고 논다. 둘이 함께 한 사업은 실패하게 되지만, 조르바의 영향을 받은 주인공은 양고기를 나눠먹고 조르바에게 춤을 배운다. 이 단순한 이야기 속에서 내가 읽은 조르바는 정말 '디오니소스적'이다. 니체의 말을 빌리자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개별화의 원칙을 미화하는 수호자 아폴론과 비교되는 것으로, 디오니소스의 신비한 환호 아래에서 개별화의 족쇄는 산산이 부서지고 존재의 어머니들에게 사물의 가장 내밀한 핵심에 이르는 길이 열리게 하는 것이다.

단순히 말하자면 아폴론은 논리와 인과성의 수호신이고, 디오니소스는 혼돈 속 진리의 수호신이다. 우리는 아폴론식 사고방식에 익숙하지만, 사실 삶이란 것은 논리와 인과성으로만 따질 수 없다. 우리가 믿고있는 도덕과 윤리는 사실 상대적인 개념이고, 갈라파고스 섬만 봐도 자연은 끊임없이 돌연변이를 만들고 있는 혼돈스러운 곳이다. 사실 인간은 자연 속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가는 존재임에도, 자연의 혼돈을 부정하고 아폴론적 삶에 집착해 삶의 양식을 규정하고 그에 따라 고정한다. 아폴론적 시각에서 인간의 삶은 하나로 끝맺는 비극적인 것이지만, 디오니소스적 시각에서 인간의 삶은 자연의 일부로서 끝없이 순환하는 유쾌한 것이다. 자연은 생성과 파괴를 일삼으면서 생식을 거듭하고 항상 죽음을 만들어냄으로서 끊임없이 순환한다. 자연은 혼돈스럽지만 영혼불멸한 것이다. 디오니소스적 존재, 조르바는 뚜렷한 직업과 그럴듯한 이상 없이도 구체적인 삶의 진실성을 찾고 삶의 방향성을 체득했다. 주인공이 이론에 몰입해 삶의 저너머를 바라보지 못한데 비해, 조르바는 실질적인 경험을 통해 삶의 감각을 이해하고 회복했다. 조르바가 그토록 생기있어 보이는 것은, 그가 영원불멸한 디오니소스적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기분이 내키면 치죠, 알아듣겠소? 난 당신이 바라는 대로 당신을 위해 열심히 일하겠소. 노예처럼요. 하지만 산투리는 전혀 별개요. 이놈은 야수요. 자유가 필요해요. 내가 기분이 내키면 칠거요. 노래까지도 할 거요. 또 제임베키코, 하사피코, 펜토잘리 같은 춤도 출거요. 하지만 이거 또 분명히 해둡시다. 내가 기분 날 때만이오. 계산을 분명히 합시다. 만약 내게 강요하면,난 떠납니다. 이건 분명히 아쇼.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간이라고요? 그게 무슨 뜻이오?"
"보쇼. 자유인이란 거요."

- 본책 page 36


"대장, 우리가 돌과 꽃, 그리고 비가 뭐라 말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소? 아마도 우리에게 소리를 치는데 우리는 알아듣지 못하는게 아닐까요? 그리고 우리가 무슨 말을 해도 이것들이 못 알아 듣고요. 대장, 언제나 이 세상의 귀들이 뚫릴까요? 언제나 우리들 눈이 열려 사물들을 보게 될까요? 언제 우리가 팔을 벌려 돌과 꽃과 사람이 서로 껴안게 될까요? 대장, 책에는 뭐라고 쓰여있소?"

- 본책 page172

우리는 많은 양의 술을 마셨고, 양고기를 뼈까지 다 발라먹었다.
세상이 가벼워지기 시작했고, 바다가 웃고 있었으며, 땅이 배의 갑판처럼 흔들렸다.
갈매기 두 마리가 자갈밭 위를 날며 꼭 사람들처럼 대화를 나누었다.
내가 일어섰다.
"자, 조르바, 이리와서 내게 춤을 가르쳐줘요."내가 소리쳤다.
조르바가 펄쩍 뛰어 일어났다. 그의 얼굴이 번개 치듯 빛났다.
"대장, 춤이라고요?"그가 말했다. "춤이라고요? 좋아요!"
"자, 조르바, 내 삶을 바꿔줘요! 자, 시작합시다!"

- 본책 page502


나는 모든 돈을 잃었다. 인부들도, 케이블도, 짐수레도 다 잃었다. 화물 수송을 위한 조그만 항만까지 만들었는데 이젠 수송할 것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모든 것을 다 잃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전혀 예기치 않았던 자유를 느끼고 있다.마치 무뚝뚝한 필요의 여신의 딱딱한 두개골 안 좁은 구석에서 자유의 여신이 놀고 있는 것을발견한 것 같았다. 그리고 나도 그 여신과 함께 놀고 있었다.
모든 것이 우리가 바랐던 것과는 정반대가 되었을 떄, 우리의 영혼이 끈기와 그럴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면, 우리가 느끼는 기쁨은 오히려 엄청나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라고 하고, 다른 이들은 악마라고 부르는, 보이지 않는 전지전능한 적이 우리를 쓰러뜨리려고 덤벼들지만 우리는 물러나지 않고 꼿꼿이 서서 저항하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겉으로는 힘에 굴복한 패배자처럼 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승리자가 될 때마다, 진정한 사나이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긍지와 기쁨을 느낀다. 그리고 외면적인 불행은, 보다 더 드높고 여간해서는 맛볼 수 없는 행복으로 승화된다.

- 본책 page 505-506

조르바는 나에게 두가지 이미지로 기억된다. 하나는 그가 즐겨 연주한 산투리고, 또다른 하나는 오이디푸스의 일화다. 산투리를 즐기는 조르바는 니체가 정의한 음악을 떠올리게 한다. 음악에는 언어화된 법칙이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에게 일체감과 감동을 안겨준다. 그것은 감각적으로 우리를 자극해 영혼을 울린다. 음악은 존재 자체로 우리를 변화시킨다. 음악은 디오니소스적 자연을 대변한다. 그렇기에 조르바의 산투리는 '기분이 내킬 때만' 소리를 내고, 그 산투리를 연주하는 조르바는 자유로운 인간이었다. 조르바가 자유인일 수 있는 것은 그가 진정으로 산투리의 음악처럼 자신의 존재에 흠뻑 젖을 수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손가락이 작업에 방해가 된다고 가차없이 잘라버리고, 춤을 추고 싶을 때 주저하지 않고 춤을 췄다.  음악이 그런 것처럼, 조르바도 자신의 의지로서 생명을 표현했다.

아폴론적 삶을 가차없이 부정했다는 점에서 조르바는 오이디푸스의 일화를 떠올리게도 한다. 오이디푸스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눈을 찌른 왕이다. 그는 눈이 보였을 때 모든 것을 이해하고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그도 모르는 새에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취했다. 그가 눈을 찌른 것은 '보이는 것의 한계'를 인정한 것과 같다. 빛을 포기한 그는 다른 한편으로 아폴론적 삶을 거부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아폴론의 '앎'이 산산히 파괴된 모든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새롭게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젊은 조르바도 오이디푸스와 같은 과정을 거쳤다. 젊은 조르바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웠다. 그는 이념이 저지르는 온갖 비인간적인 범죄와 추악함을 목도하고 그것들이 헛되고 위선적인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런 조르바에게 애국이나 인류애와 같은 사회적 미덕은 가증스러운 위선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는 조국으로부터 벗어나고, 신부들루부터 벗어나고, 돈으로부터 벗어나 가벼운 자유인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어린 아이와 같은 시선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1928. Athens.jpg
 

"나는 예술의 한계를 초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투쟁하고, 그럼으로써 아름다움의 본체인 조화가 무너지리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나의 글쓰기가 절대로 예술적인 완벽성을 달성하지 못하리라고 믿는다. 글을 더 많이 쓰면 쓸수록 나는 작품에서 내가 아름다움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 투쟁한다는 사실을 점점 더 깊이 깨달았다. 진실한 작가와는 달리 나는 구원을 추구하며 고통스럽게 투쟁하는 인간이어서, 미사여구를 지어내거나 멋진 운을 맞추려는 데서는 기쁨을 얻지 못했으며, 나 자신의 내적인 암흑으로부터 해방되어 암흑을 빛으로 바꿔놓고, 내면에서 고함치는 무서운 조상을 인간으로 바꿔놓고 싶었다"

- 영혼의 자서전 하권 p 628


조르바에 치중해 서평을 작성했지만, 사실 이 소설의 아름다움은 조르바와 주인공의 조화에 있다. 두 인물은 다른 모습으로 충동하기도 하지만, 더불어 함께 나아간다. 조르바는 죽기 직전 주인공을 저주한다고 전해달라고 이야기 했지만, 끊임없이 책을 버리고 자신을 보러 오라고 편지를 보내고, 끝내 자신이 아끼던 산투리를 남겨줄 정도로 주인공을 사랑했다. 마지막 장면 조르바에게 춤을 배우는 주인공의 모습은 이 소설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 중 하나일 것이다.

그것은 니코스 카잔자키스 본인의 이야기기도 했다. 영혼의 자서전에 적힌 것과 같이, 카잔자키스는  아름다움의 말보다 삶의 고단성에 대해 탐구하고 지금 삶의 가능성을 찾아 자기 자신을 구원하려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디오니스적 삶을 추구하고 조르바의 삶에서 영감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아름다움 그 자체보다는 삶의 가능성에 대해 끝없이 고민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조르바가 삶을 사랑하는 법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방법을 가르쳤다는 니코스 카잔자키스의 묘비명은 아래와 같았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고통스러운 시기를 조르바와 함께 하면서, 모 교수님이 해주셨던 말을 곱씹었다. 니체식으로 세상에 별자리는 없다. 각자 빛나는 별들이 있을 뿐이다. 별들은 스스로 빛나기 위해 노력하는 것 뿐이다. 우리도 모르게 어깨에 매고 있었던 규정과 법칙을 내리고, 존재만으로 빛날 수 있다면, 우리도 조르바처럼 영원불멸한 생명력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살다보면, 우리의 묘비명에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자유에 대해 쓸 수 있지 않을까?


*
PS

한국에 처음 소개된 『그리스인 조르바』 번역본은 영어 중역인 데다, 심지어 번역 저본인 영어판조차 불어 중역판이었다. 영어권에서도 그리스어 원전을 직접 번역하여 출간한 것은 2014년에 와서다. 그 전까지 한국인들은 그리스어-불어-영어-한국어 삼중의 번역으로 ‘조르바’를 만나온 것이다. 최근 한국에서도 2014년 새로이 번역된 영어판을 저본으로 한 번역본들이 출간되었으나, 이 역시 여전히 그리스어-영어-한국어 중역이었다. 번역자 개개인의 역량을 떠나, 중역은 기본적으로 물리적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이번에 문학과 지성사에서 새로 출판한 <그리스인 조르바>는 번역자 유재원은 이 명작을 조금이라도 더 정확하게 전하고 싶었기에 여러 한국어 번역본이 있음에도 새로이 번역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 책의 번역은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카잔자키스의 어휘력은 놀라워서 크레타 방언은 물론 터키의 동북부 흑해 지방의 폰토스 방언까지, 사전에서도 찾기 힘든 단어들이 즐비했다. 번역자 유재원은 그리스에서 언어학 박사학위를 받고 오랫동안 그리스를 연구해온 학자로서 평생의 역량을 담아, 또 원어민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번역에서 생기는 손실과 오류를 최소화했다. 나는 이 책을 기존 책과 비교해서 읽었는데, 전 판본으로는 읽어낼 수 없었던 메시지를 이번 번역판에서 새롭게 발견할 수 있었다. 좀 더 원전에 가까운 조르바를 읽는다면, 문학과 지성사의 조르바를 추천하는 바이다.




[손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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