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view] 미완성 소설로 던져진 복잡한 3가지 질문에 관한 소개글 _ 연극 '낯선 사람'

인간은 복잡한 것을 좋아한다.
글 입력 2018.07.04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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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것에 대한 우리의 기호>


사람들은 어려운 것을 좋아한다. 쉬운 것보다는 유치한 것 보다는, 어렵고 복잡한 것에 본능적으로 끌리는 것 같다. 낯설고 또 자신이 알지 못하니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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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복잡한 것을 좋아한다


그 단적인 사례를 비꼬아 보여주는 것이, <커뮤니티>라는 시트콤의 2-5 에피소드였다. 이 에피소드는 아벳이라는 커뮤니티 컬리지 학생이 성경을 읽고 자신만의 영화를 만든다는 데에서 시작하는데, 이 터무니없는 영화에 사람들의 반응이 폭발적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어려운 것에 끌린다는 것이다. <인셉션>만 보더라도, 그 돌아가는 팽이의 복잡성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이 연극을 보는 관객과 필자의 마음도 그럴 것 같다. 무겁고 진지하고 또 복잡해서 마음이 끌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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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사람
모티브 : 원작 아르투어 슈니츨러 <의화단 운동>


이 연극이 배경으로 하는 것은 ‘의화단 운동’이라는 중국의 사건이다. 이 의화단 운동이라는 것은, 1990년대 일어난 중국의 반외세적 성격의 운동으로, 그 모습이 잔인하고 비인간적이기도 하여 ‘의화단의 난’이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이 ‘의화단 운동’이라는 사건을 예술의 세계로 먼저 끌어들인 것은, 아르투어 슈니츨러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 사건을 동시대적인 관점으로 재해석하였으며, 종국에는 완성을 하지 못하고 죽었다. <낯선 사람>이라는 연극은 이 미완성 소설을 바탕으로 한다.

이 연극이 관객에게 묻는 질문은 3가지이다. 개인에게 익숙해진 공포를 제거할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살것인가? 윤리문제의 기준은 시대를 벗어날 수 있는가? 예술의 방식도 순수성을 유지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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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에게 익숙해진 공포에 대한 질문>


의화단 운동은 중국인들의, '유럽에 대한’ ‘제국주의에 대한’ 공포에 기인한 것이었다. 무언가에 대한 공포가 익숙해질정도로 오래된다면, 공포의 소유자는 갈림의 기로에 서게 된다. 익숙해진 공포를 제거할 것인가, 그대로 인정하고 살 것인가.

일상에는 언제나 공포가 기저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에는 북한이라는 ‘정전국’에 대한 공포, 세계적으로는 전쟁에 대한 공포, 경제에 관련된 공포, 결국엔 모든 곳 모든 분야에 익숙한 공포는 기저한다. 이 연극이 의화단 운동의 사건을 통해 묻고 있는 것은 그것이다. 이 공포를 어떻게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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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의 문제에 대해>


윤리는 시대의 상황을 반영해왔다. 가장 절대적이어야 할 윤리는, 사람들의 입맛에 누군가의 생각에 의해 설정되고 조정되어 왔다. 그 대표로, '광주 5.18 민주화 운동'은 누군가 높은 사람의 입맛에 의해 ‘5.18 사태’로 불리우며 한동안 윤리적이지 못한 것으로 분류되어 왔다.

의화단 운동도 그러한 종류다. 반외세, 반제국주의라며 자신의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의 운동이었지만 결국 민간인을 죽이기도 했고, 부녀자를 윤간하기도 했으며, 식인의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일이 ‘운동’으로 불리우는 것을 보면, 지금 시대에 이 사건은 ‘애국적’ 기준에 의해, 꽤 윤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나보다. 공공의 윤리는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 도덕 교과서와 역사 교과서는 계속 변화하고, 사건의 이름과 생각이 달라진다.

그런 사회모습과, 의화단 사건을 바탕으로 이 연극이 묻고 있다. 하지만 절대적 윤리는 존재할까? 시대를 벗어나, 모든 것을 벗어나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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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정체성에 관하여>


어떠한 순수한 정체성에 무언가가 투입되고 들어오는 것은 그리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일은 아니었다. 우리나라의 역사만 하더라도, 또 중국만 하더라도, 무언가가 들어오는 것에 사람들은 거부감을 보이고 방어기제를 보여왔다.

이러한 방어기제는 긍정적이기도 하지만 부정적이기도 한데, 그 ‘새로움의 등장’이 정체성의 발전을 가져올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지금 ‘흥선대원군’이 부정적인 인물로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 의한 것이었다.

역사를 배워야하는 이유는, 그 곳에 미래에 대한 교훈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랬다. 예전의 사건들을 듣고, 반복될 미래를 예측하고 먼저 고민하고 더 나아질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의화단사건을 통해, 또 과거의 우리나라와 세계의 역사가 던지는 ‘정체성’에 대한 물음에 대해 뭐라고 답해야할까.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하는가, 아니면 다양성을 수용할 것인가. 더 크게 ‘예술’ 혹은 ‘개인’ 혹은 ‘사회’적으로는 어떠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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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어려운 것을 좋아한다. 낯설고, 복잡하고, 오랜 생각이 필요할 것 같은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낯선 사람’이라는 연극에 우리는 본능적 끌림을 느낄 것 같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손쉬운 이해의 일상에 낯섦을 제공할 이 연극을 우리는 분명 좋아할 것이다. 분열하고 존재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복잡한 질문을 마주하는 것이 우리 인간들은 기쁘니까.

 
사진 카피라이트
(c) 테아터라움 철학하는 몸 - 최윤정





연극하는 자
<테아터라움 철학하는 몸> 소개


철학하는 몸은 연극을 유희의 도구로서만이 아닌, 사유의 통로이자 시대정신의 교환의 장으로서 이해합니다. 이것은 이론과 실천의 분리를 지양하고, 모든 요소와 대상의 관계를 개방하며, 일상이 공유된 수행적 미학의 측면과 그 특징을 강조합니다. 또한 저희 공동체는 연극에 대한 실천적 의지와 태도로서, 정서적으로는 고정된 연극적 가치관을 넘어서고, 지난 경험을 확신하지 않으며, 전복적인 생산성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철학하는 몸의 현재 작업들은 주로 포스트드라마적인 경향과 음악극 개념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구체적으로는 다큐멘터리 연극의 동시대성, 음악적인 것의 수행성, 배우의 실천하는 몸, 포스트브레히트적인 것, 윤이상의 음악과 실천, 연극의 역사화 과정의 현재화, 예술의 일상성 등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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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2018년 7월 14일 (토) - 22일 (일)

전석 30000원

평일 오후 8시
토요일 오후 3시, 7시
일요일 오후 3시
(월요일 공연 없음)

김정환 안병찬 오다애 현진만 출연

테아터라움 철학하는 몸


[손민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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