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세상 어디엔가 있을 소녀를 위한 '오션스8' 그리고 '시카고' [영화]

'오션스8'과 '시카고'가 전하는 메시지
글 입력 2018.07.04 23:34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movie_image p.jpg


지난 달 13일 개봉 전부터 ‘오션스’ 시리즈의 명성과 산드라 블록, 케이트 블란쳇, 앤 해서웨이, 리한나 등 초호화 캐스팅으로 기대를 불러 모았던 ‘오션스8(감독 게리 로스)’가 드디어 한국에서 개봉했다. 이 정도 규모의 할리우드 영화에서, 주인공 8명을 모두 여성 인물로만 캐스팅한 사례는 극히 드물기 때문에 “극장가에 볼 게 없다”고 푸념하던 나도 오래 전부터 개봉을 기다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대에 미친 영화는 아니었다. 뉴욕 최대의 패션 행사 멧 갈라(MET GALA), 카르티에의 어마어마한 다이아 목걸이, 여배우들의 화려한 드레스까지 눈이 즐겁기는 했지만, 조금 더 탄탄하고 긴장감 있는 영화였다면, 캐릭터 각각의 입체감 있는 스토리를 더 잘 살렸더라면 ‘여성이 진짜 주인공이 되는 영화’로서 성공 사례를 써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movie_image2.jpg
 

“이건 나를 위해서도 너를 위해서도 아닌,
세상 어디엔가 있을 범죄자를 꿈꾸는
여덟 살 소녀를 위한 거야.”


하지만 영화 중반에 데비 오션(산드라 블록)이 다이아 목걸이를 훔치기 위한 대대적인 작전 개시 직전에 했던 이 대사만큼은 강한 임팩트를 남겼다. 어쩌면 이 영화 자체가 전달하고자 했던(그것이 성공했든 아니든 간에) 메시지일지도 모르는 이 대사는, 비단 ‘범죄자를 꿈꾸는 여덟 살 소녀’에게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여성 주인공이 ‘남성의 도움 없이’ 능동적으로 상황을 해결하고 원하는 것을 쟁취해내는 과정 자체가 세상 어디엔가 있을 어떤 소녀에게는 귀감이 될 수 있다는 사뭇 의미심장한 메시지인 것이다.
 
이 영화의 기획과 설정, 그리고 메시지를 생각할 때 함께 떠오르는 작품이 있다. 얼마 전 관람했던 뮤지컬 ‘시카고’다. ‘시카고’는 1975년 브로드웨이에서 시작되어 전세계 각국에서 롱런하고 있는 작품으로, 역시 여성 주인공 록시와 벨마를 중심으로 범죄와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얽힌 미국 사회의 부조리함을 날카롭게 풍자하는 명작이다.

 
chicago.jpg
 

그러나 이 작품은 ‘오션스8’만큼 여성주의적 메시지를 노골적으로 던지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스타가 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허영심에 가득 찬 록시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그의 백치미와 몰락을 다루는 작품이라 ‘오션스8’과는 조금 다른 노선을 따르고 있는 듯 보인다.
 
‘시카고’를 ‘오션스8’과 연결 짓게 된 결정적인 장면은 유명한 1920년대 화려한 시카고의 분위기를 그대로 느끼게 하는 ‘All That Jazz’도, 존재감을 한껏 드러내는 섹시한 록시의 독무대 ‘Roxie’도 아닌 뮤지컬 초반부에 여섯 명의 여자들이 ‘죽어도 싸지(He had it coming)’라며 노래를 부르는 ‘Cell Block Tango’ 장면이다. 시카고의 교도소에 갇힌 여섯 명의 여자 수감자들은 저마다 살인을 저지르게 된 사연이 있는데, 공교롭게도 대부분 남편, 애인의 외도나 폭력이 원인이다. 한 명씩 무대로 나서서 자신이 한 행동은 정당하다고, 그 남자들은 ‘죽어도 싸다’라고 외치는 장면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강렬하고 통쾌하다.

 
 

피해자이자 동시에 살인자, 가해자인 아이러니한 상황에 처한 여자들은 그들이 죄를 저질렀지만 그럴 만 한 이유가 있었다고 관객에게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주체적인 목소리를 가졌다. 그들의 범죄는 미화될 수 없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 누군가에게 용기와 힘을 준다. 또한 도덕적으로 무결한 성녀와 ‘제멋대로’ 행동하며 사람들에게 위협을 주는 마녀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여성도 부당한 일에 맞설 수 있으며 욕망을 가지고, 그것을 추구하는 야망이 있는 입체적인 존재라고 소리 높여 외치고 있는 것이다.

 

 

미디어에 넘쳐나는 주체적이고 용맹하고 똑똑하고 힘센 남성 캐릭터에 비해 여성 캐릭터는 대부분 그 주변부 혹은 눈요깃거리의 대상만을 담당한다. ‘시카고’와 ‘오션스8’은 이렇게 몇 십 년이 지나도 끈질기게 변하지 않는 클리셰에 반기를 드는 작품이다. ‘범죄’는 현실 세계에서는 사회질서를 해치는 악이지만 ‘시카고’에서 꼬집었듯 엔터테인먼트의 세계에서는 관객에게 쾌감을 주는 ‘쇼’가 된다. 범죄야말로, 인간이 사회의 여러 제약과 약속을 깨뜨리면서까지 자신의 욕망을 끈질기게 쫓으며 그것을 쟁취해내는 가장 적극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그동안 쇼 비즈니스 세계에서 범죄가 남성의 전유물이었다는 점이 무엇을 시사하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앞으로 문화계에 ‘오션스8’과 같은 시도가 더욱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시카고’와 같은 완성도 높은 작품들이 더 많이 생겨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멋진 남성과 결혼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인 것처럼 그려지는 여성 캐릭터 말고, “나는 누구의 아내도 아냐, 하지만 난 내 인생을 사랑해!(시카고 中)”라고 외치는 여주인공들이 세상에 더욱 많아졌으면.



채현진.jpg
 
 
[채현진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17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