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28세 160cm 63kg 여자의 축구 입문기 [스포츠]

축구는 멀리서 바라보니 희극, 가까이서 직접 해보니 비극이더라!
글 입력 2018.07.08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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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시간을 싫어했다. 체육시간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극단적인 생각도 했다. 초등학생때 체육수업 중 공을 차본 일이 한두 번 있었다. 한번은 선생님이 짝축구를 시키셨다. 남자아이와 손이었나 옷자락이었나 어딘가 붙잡고 짝이 되어서 축구를 하는 것이었다. 보편적으로 축구에 익숙한 남자아이와 축구에 무관심했던 여자아이를 짝 지어 밸런스를 맞춘 후 같은 반 친구들 모두가 축구를 즐길 수 있는 방식이었다.


어쩌다 내 앞에 공이 왔다.
얼씨구나 하고 골대를 향해 공을 찼고
골이 들어갔다.
우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살골이었다.


그날 같은 팀 남자 아이들에게 어찌나 욕을 먹었던지 결국엔 엉엉 울었다. 특히 그날 내내 집요하게 나를 원망하던 까불이 녀석이 생각난다. 축구에 일말의 관심도 갖지않게 된 것은 그즈음이었던 것 같다.

이후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어 운동장에서 남자아이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신나게 축구를 하는데, 뻥 찬 공이 근처를 지나던 나에게 날아오지않을까 항상 노심초사했다. 두 손은 어디다 내버려둔 건지 공이 날아오면 그냥 그대로 몸이 석상처럼 굳어서는 결국 그 공에 맞는 경험도 실제로 두세번쯤 있었다. 나는 날아오는 공을 끌어당기는 자석같은 것일지도 몰라, 하며 공 근처에 얼씬도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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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월드컵은 축구와의 접점을 다시한번 만들어주었다. 모두의 축제였다. 하지만 그저 우리 팀이 이기나 지나 그것만이 궁금할 뿐 90+α분 동안의 경기자체는 전반적으로 지루했다. 책 속에서도, 영화 속에서도, 주변사람들 사이에서도 해외축구, 유럽리그는 인기가 많았지만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재미없는 세상일 뿐이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많이 흐른, 어느 심심한 날의 밤이었다. 러시아 월드컵 기간인데 마침 멕시코-독일전을 하기에 별 생각없이 봤는데 의외로 정말 흥미진진한 것이다. 상대편 수비를 따돌리며 질주하는 모습, 공을 뺏으려는 자, 별별 화려한 발재간으로 그걸 따돌리는 자, 긴밀한 패스, 골대 근처에서 때리는 슈팅과 관중의 함성, 해설가의 고성, 그리고 함께 괴성을 지르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시간이 훌쩍 지난 것을 보고 놀랄 정도였다. 이후 밤마다 연이은 월드컵 경기를 챙겨보는 열성적인 관중1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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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앉아 지내는 시간은 많고 식성은 줄지 않고, 몸을 생각하면 운동이 필요하기는 한데, 이전부터 요가, 헬스, 스피닝, 배드민턴, 스쿼시 등을 잠깐 해보다 흥미를 오래 붙이질 못해 힘들고 지치면 금방 그만두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나는 이런 자체 슬로건을 내걸었다.


운동은 즐거워야 하고,
끊임없이 동기부여가 되어,
오래 지속가능해야 한다.


그런데 월드컵을 보다 보니 아무래도 축구가 재미있어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축구모임을 찾아보았다. 여자축구는 대중적이고 인기 많은 류의 운동이 아닌 듯하지만 그래도 여기는 인구 천만의 도시 서울인데 설마 내가 낄 축구모임 하나 없겠나 하며. 이 운동에 대해 직접 경험한 바가 전무한 수준이다 보니 축구교실같이 축구를 배울 수 있는 곳을 먼저 찾아보게 되었다. 비용이나 시간대, 운동장소 등 내가 바라는 모든 조건이 맞는 모임이 금방 발견되지 않았다. 결국 네이버 카페에 여자축구 모임을 찾는 글을 올렸고 어느 카페회원의 소개로 집근처에서 운동하는 모임을 알아내어 연락을 해보고 참석하게 되었다.

모임원들에 대한 첫인상은 특이했다. 선수 출신인 감독님의 지휘아래 다같이 훈련을 하는데 공을 다루는 데에 여유 넘치는 모습이 정말 멋있었다. 제대로 걸크러쉬였다. 기본동작을 익히는 시간을 가졌지만 실제 내 발은 공을 막 찼다. 잘못된 동작을 화면 캡처하듯 보시고는 다시 짚어주는 감독님을 보면서, 인간은 노력하면 저런 능력도 가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너무 쉽게 한계를 짓지않아야겠다.

축구공에 대한 첫인상(?)은 난해했다. 공이나 내 발이나 모두 제멋대로였다. 태어난 이후 줄곧 몸의 일부로서 함께해왔던 내 발을 컨트롤하는데 이토록 무능력하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마음대로 되지않자 오기가 생겼다. TV로 축구를 볼 때는 참 쉬워 보였고 패스 못하고 공 뺏기는 선수들을 보며 의아했는데 그게 쉬운 게 아니구나. 이제 경기 보며 쉽게 욕할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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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뒤, 모임에 한번 더 나갔다. 훈련의 마무리에 팀원들끼리 경기가 있었다. 첫날에는 생초짜라 공과 친해지기 위한 개인연습을 주로 했는데, 두번째로 참석하니 감독님이 나도 경기에 곧장 투입시키는 것이었다! 하, 나는 여태껏 경기장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며 관망하던 신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땅으로 추락해서 게임의 일부로서 자기 앞가림하기 바쁜 나약한 인간이 된 것이다. Z축이 사라진 X, Y 이차원 좌표평면의 보잘것없는 점 하나가 된 것 같았다.

웃기게도 정신없이 헉헉거리며 공을 쫓아 뛰고있으니 머릿속에선 전략이나 포지션 따위 모두 휘발되어버리고 우리편 골대가 어디인지도 헷갈리고, (초등학생때 자살골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공을 좀 빼앗아보겠다고 달려가서는 발보다 몸통이 앞서 막 밀치고 부딪히는가 하면, 같은 팀 멤버가 가진 볼인데 얼떨결에 뺏기도 했다. '아니, 우리 같은 팀인데...!!'하면서 공을 뺏기며 황당해 하던 그분의 목소리가 생생히 떠오른다. 글을 쓰는 지금도 굉장히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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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무엇보다 절실히 느낀 점은 내 몸의 움직임이 상대적으로 훨씬 느리고 민첩함이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필요이상으로 무겁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근10여년간 살을 빼고 싶다는 생각을 줄곧 해왔고 실제로 나를 노력하게 만든 '강력한 동기'들 덕분에 일시적인 감량에 성공해본 적이 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펑퍼짐한 엉덩이 탓에 뭘 입어도 태가 나지않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또는 시간당 6만원이라는 거금을 주며 지르듯이 시작한 헬스PT를 돈만 날리며 소득없이 끝낼 순 없어서 등 다양한 이유였다. 그러나 나는 힘들어하는 스스로에게만은 굉장히 관대한 사람이었고, 세상이 보는 아름다움의 기준이 어떻든 누가 뭐라하든 내게 관용을 베푸는 길을 결국엔 걷게 되었다. 체중감량이라는 것은 그 시작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언젠가 하고싶은 것, 하지만 굳이 괴로워하며 힘들여 얻어내고 싶지는 않은 무언가로 구석자리를 차지해왔다.

그러나 요즘, 둔한 움직임에 대한 답답함, 드리블하며 달려오는 상대편을 1:1 정면으로 마주했을 때에도 두려워하지않고 그걸 빼앗아내고 싶은 욕심, 상호신뢰 하에 공을 패스할 수 있는 든든한 팀원이 되고 싶은 마음, 이런 것들이 강력한 동기가 되어 살을 빼자는 마음에 다시 불을 지핀다.


땀이 줄줄 나고
숨차고 목이 조금 말라도
재미있어서 그만두고 싶지 않은 운동이 생기다니.
그건 행복한 일이다.


연습을 하려고 문방구에 가서 축구공을 새로 산지 일주일밖에 안된 초심자일 뿐이고, 나중에 어떤 식으로 싫증이 나서 관둬버릴지는 아직 예상할 수 없지만, 실제로 처음 축구공을 진지하게(?) 접해보는 사람으로서 느낀 즐거움과 변화를 말해보고 싶었다. 조금 더 젊을 때,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아니 대학생 때라도 이런 재미를 일찍 알았더라면 그동안의 시간이 더 활기찰 수 있었을 텐데 싶기도 하다.


신나는 곡으로 마무리를 짓고싶다.
아래는 2018 월드컵 주제가 Live it up.
One life, live it up, 'cause we got one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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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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