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정체성은 어디에서 오는걸까? [기타]

글 입력 2018.07.13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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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정체성과 관련된 이야기가 오간 적이 있었다. 지인 분이 이야기 하시길, 내년 유학을 목표로 언어를 공부 중인데 언어를 배우면서 사춘기 이후로 생각해 본 적 없는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아무리 그 언어를 공부해서 다른 나라에 간다 해도 이제껏 살아왔던 문화적인 간극의 차는 넘어서지 못할 걸 아니까 벌써부터 힘이 빠지는 기분이라는 것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사례처럼 스스로가 ‘정체성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느냐 하는 물음으로 이야기가 이어졌다.

 생각해보니 질풍 노도의 사춘기 이후로는 내가 가진 정체성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도 당연한 것이 23년이라는 시간 동안 광주라는 지방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매일 비슷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과 부대 끼며 살아왔기 때문에 마주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 내가 누구이지?’라는 생각을 굳이 할 필요가 없었다. 광주 출신이라는 게 자랑스러운 순간도 있었지만 그게 정체성 탐구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만약 광주가 아닌 타지에서 생활을 했었다면 ‘광주 출신’이라는 정체성을 더 실감할 수 있었을까? 정체성은 '나'보다도 '타자'를 통해서 오는 걸까? 아니면 내가 속하는 환경?

 유럽여행을 갔을 때는 ‘동양인’으로서 타자화된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었다. 동양인들이 별로 타지 않은 비행 편을 탔을 때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통로만 오갔는데도 시선이 집중되는 것이다. 단순히 외적 특성 가지고 이런 시선을 받아본 경험은 처음이라 다소 얼떨떨한 기분으로 자리에 앉았다. 앞자리의 어떤 인간은 내가 다른 친구랑 하는 발음을 듣고 쓱 뒤돌아보더니 비웃기까지 했다. 순식간에 기분이 나빠졌다. 어쩌면 정체성은 남들과 다른 외적 특성으로부터 비롯되어지는 걸까?



외적인 특성으로 그 사람의 정체성을 판단하는 것

 
 그런 영상을 본 적이 있었다. 영국에서 태어나서 영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다. 분명 그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영국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만 일부 무례한 사람들은 그의 동양적인 외모만 보고 물어본다. 그래 너가 여기서 태어났는지는 알겠어, 그럼 너의 Originally한 고향은 어디야? 할아버지 고향은 어디야? 굉장히 무례한 질문이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당연하다. 그의 외모적 특성으로는 절대 영국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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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나의 영어 사춘기 캡쳐


 반대로 모델 한현민은 원어민처럼 보이는 외양과 반대로 영어를 하지 못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한현민은 한국 태생에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영어를 못하는 것은 의아스러운 일처럼 받아들인다. 정체성보다는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편견의 일종일지도 모르겠다.



식민주의의 잔재에서 비롯된 정체성 찾기 


 국립현대미술관 2018 아시아 기획전 <당신은 몰랐던 이야기>에서는 위와 비슷한 사례의 작품을 전시했었다. 후지이 히카루의 <일본인 연기하기>는 워크숍을 참가한 참가자들의 영상기록으로 일본인 남녀가 서로를 누가 제일 일본인 같은지 순서를 매기면서 줄을 세우는 내용을 담고 있다. 처음에는 말투와 두상, 눈동자 색과 같은 보편적인 외적 특성으로 접근한다. 하지만 나중에는 이 사람은 다리가 휘었는지 이 사람은 일본인이 아니라 다른 나라인의 피가 섞인 게 아니냐는 식으로 물으면서 뒤로 갈수록 공격적인 판단을 내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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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카루 후지이, <일본인 연기하기>, 2017


 그렇게 참가자들은 서구로부터 수입한 '제국주의적 시선'을 아이누, 오키나와, 대만 그리고 한국에 그대로 투영했던 세기말의 '일본인'을 자연스럽게 연기하게 된다. 처음 제목을 보았을 때는 '일본인이면서도 가장 일본인으로 보이기 위해 연기하게 되는건가?'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컨텍스트를 읽고 세기말의 제국주의적 시선을 가진 일본인 연기를 유도했다는 걸 알고 소름이 돋았다.

 뿐만 아니라 과거 제국주의 시절 인종을 전시하는 일들이 빈번했는데 사람의 외적인 것만 보고 판단하는 것이 정도만 다르지 지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작품을 통해 꼬집고 있다. 현재 마찬가지로 외적인 특징으로 인류를 자연스럽게 분류하고 그에 비롯한 편견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도 제국주의 이후의 식민의 잔재 중 하나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성들의 이야기


 이와 연관된 개념으로 생각나는 영화와 작품이 있어 함께 이야기 하고싶다. <페르세폴리스>의 마르얀 샤트라피와 이란출신 예술가이자 영화 감독인 쉬린 네샤트이다. 두 작가 모두 격동의 이슬람 혁명으로 인해 정체성을 찾아가는 성장통을 겪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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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페르세폴리스> 스틸컷


 마르얀 샤트라피의 <페르세폴리스>는 마르얀의 자서전적인 이야기를 만화로 그린 작품으로 애니메이션화되기도 했다. 마르얀이 이슬람 혁명기에 고국 이란의 테헤란에서 피부로 느끼며 이란의 역사와 현실을 직접 눈으로 보고 배웠다. 이슬람 혁명기에서는 자신의 주체적인 삶을 찾기 위해서 유럽권으로 유학을 가게 된다. 유럽에서 학창시절을 보내고 이란으로 다시 되돌아오면서 겪었던 정체성의 혼란의 과정을 흑백톤의 그림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사춘기 시절에 철저하게 '이란 여성'으로 타자화되며 보냈던 오스트리아에서의 타지생활과 먼 이국땅에서 연애의 실패, 노숙자 생활과 같은 긴 여정을 끝내고 이란으로 되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전쟁은 끝나있었다. 그러나 다시 돌아온 고국에서는 환영받지 못했다. 긴 전쟁의 후유증과 이슬람 정권의 독재는 억압으로 이어졌고 특히 여성에게는 더 많은 제약이 따랐다. 유럽에서 배웠던 생활 방식은 자신을 억압하는 모든 것들과 충돌하게 되고 그로 인해 두 번째로 이란을 떠나고 자신만의 새로운 삶을 찾아가면서 이야기는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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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린 네샤트, 알라의 여인들_침묵의 저항, 1994


 쉬린 네샤트는 대표적인 포스트 식민주의 여성작가 중 한명이다. 작가는 17세에 미국에서 미술을 교육을 받기 위해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작가가 미국에서 머물고 있었던 1979년 이란은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며 엄청난 지각변동을 겪게 된다. 종교적 구속으로 기존 관습이 강화되고 복장의 사소한 부분까지 지배하기 시작한다. 그녀가 미국에서 처음으로 돌아온 이란의 풍경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가장 가시적인 변화는 모든 여성들이 머리부터 발 끝까지 차도르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서구 교육을 받았지만 완전히 서구화 되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모국의 변화에 일체감을 느낄 수도 없었다. 1996년 이후에는 고국으로부터 입국이 금지되어지기까지 한다.

 이러한 그녀가 중간지대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던 배경은 작업 흐름과도 이어졌다. 고국에서도 환대받지 못하는 이방인이라는 입장에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던 이란의 모습과 그 안에 자신의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함께 작품에 녹아낸다. 무슬림 여성을 상징하게 되버린 차도르를 입은 여성은 그녀의 작품에서 가장 흔히 쓰이는 요소이다. 하지만 그녀는 차도르를 입은 여성을 통해서 차도르는 여성의 억압을 상징하는 도구가 아니라고 이야기 한다. 베일에 쌓인 연약하고 억압당하는 무슬림 여성으로 바라보는 관점이야말로 오히려 식민주의를 정당화하는데 기여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고정관념에 도전한다.


 
해답을 매길 수 없는 나의 '정체성'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내리기에는 정체성이라는게 굉장히 방대한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처음 지인에게 이 물음을 들었을 때는 되게 어렵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정체성을 탈식민주의 조금은 구체적인 입장에서 접근하니까 조금이나마 스스로가 지니고 있는 의문점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꼭 정체성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탐구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내가 타고난 '여성', '동양인', '광주 출신'이라는 타이틀을 편견을 가진 이들을 맞서 저항하는 것도 정체성을 찾아가는 일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체성을 이야기하면서 자연스럽게 보편적인 편견과도 함께 이야기하게 되는데 사실 나 역시도 편견에는 자유롭지 못하는 입장이라서 그런 '편견'은 잘못된 거야라고 당당하게 주장하지는 못하겠다. 하지만 보편적으로 이루어지는 잣대 조차도 편견이 될 수 있으며 그러한 편견이 잘못된 것임을 인지하는 것 부터가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박선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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