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무엇이든 가능한 인생_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연극]

글 입력 2018.07.09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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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넘어도망친100세노인_티저포스터2.jpg
 

어느 한 나이 많은 할아버지가 힘겹게 창문을 넘으려고 하는 그 순간, 4명의 배우가 무대에 등장해서 그 상황을 정지시킨다. “알란, 정말 그 창문을 넘을 거예요?”라는 말부터 자신이 맡은 역할 설명과 앞으로 연극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에 대해 얘기한다. 그리고 제4의 벽*을 통해 관객들에게 저글링을 배웠다느니, 대사량이 많았다느니 등등 연출가와 극작가에 대한 약간의 불평(?)도 이야기하면서 극은 자연스럽게 시작되었다. 100세 생일을 맞은 알란! 그리고 창문을 역사적으로 넘어간 그의 이야기를 시작해보려고 한다.

* 제4의 벽: 연극에서 객석을 향한 가상의 벽을 일컫는다.


연극_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_공연사진_양로원 창문을 넘으려는 100세 알란.jpg
 


알란의 파란만장한 여정_믿거나 말거나

그러니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양로원에서 100세 생일을 맞은 알란은 창문을 넘어 도망쳤고 걷다보니 버스터미널까지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네버에버’ 갱단의 볼트가 좁은 화장실에 들어가기 위해서 돈이 담긴 큰 캐리어를 알란에게 맡기게 되고 마침 버스가 온 알란은 어쩌다가 캐리어와 함께 버스를 탄다. 어디인지 잘 모르는 곳에서 알란은 우연히 좀도둑인 70대 노인 율리우스를 만나게 되고 캐리어를 쫓아 온 볼트를 어찌어찌하다 냉동 창고에 얼려죽이게 된다. 그러다 배울 게 너무 많아서 대학도 졸업 못한 핫도그 장수 베니와 입이 험한 구닐라, 구닐라 코끼리 소냐까지 합류하게 되고 또 우연히 ‘네버에버’ 갱단 양동이가지 처리, 갱단의 보스 에르닌까지 알란 편에 합세시키는 아주 길고도 우여곡절이 많은 여정을 담았다.


연극_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_스페인 프랑코 장군(서현철)의 목숨을 구한 청년 알란(양소민).jpg
 

알란이 이렇게 2005년이라는 ‘현재’ 여정에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는 동안 알란은 지난날을 회상한다. 어렸을 적의 알란, 청년이 된 알란, 중년의 알란 그리고 노년의 알란은 한 세기의 역사를 들락날락거린다. 폭탄제조를 배운 알란은 우연히 자신의 실험장을 지나던 이웃을 죽이게 되고 그 이후 정신병동에 수감된 알란은 그곳에서 거세까지 당한다. 하지만 그의 폭파 능력은 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코 장군의 목숨을 구해줬으며 미국의 핵개발에 기여도 하고 마오쩌둥의 아내 장칭을 구출하기도 한다. 그러나 스웨덴으로 가고 싶었지만 돈이 없었던 알란은 홀로 에베레스트 등반, 이란에 갇혔다가 나와서 러시아에서 스탈린을 만나고 독일 얘기를 꺼내다 스탈린 심기를 건드려 노동교화소에 감금. 생김새는 비슷한데 아이큐는 정반대인, “이게 정말 가능할까?”를 연신 내뱉는 아인슈타인과 함께 탈옥해 북한데 갔다가 발리에서 잠시 정착. 그러다 미국과 러시아 이중 스파이로 활동하게 되면서 러시아에서 친하게 지냈던 유리와 재회. 드디어 스웨덴에서 잘 사나 했더니 키우던 고양이를 여우가 죽이자 집에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해 통으로 날려버리기... (헥헥...)


연극_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_공연사진_100세 알란(서현철)과 70대 좀도둑 율리우스(권동호)를 쫓아온 갱단 네버 에버의 행동대원 볼트(양소민).jpg
 

전체적인 줄거리는 이러하다. 이렇게 길고 긴 역사적인 흐름을 겪은 알란이지만, 그는 항상 초연한 태도를 보인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 있다 (Things are what they are, and whatever will be will be)” 라고 말한 엄마 덕분일까? 자의반, 타의반 그리고 약간의 우연으로 구성된 알란의 인생은 그렇게 시대에 녹아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있었다. 세계사에서 볼 법한 인물들을 한 인생에서 만났지만 알란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저 자신과 인연의 끈이 깊었던 유리 부부, 아인슈타인과 아만다 부부 그리고 자신의 고양이 몰로토프만을 사랑하며 하나씩 떠나가는 그들을 쓸쓸하지만, 온 마음을 다해서 배웅해줄 뿐이었다. 그리고 현재 시점에 이르러서도 알란은 오합지졸로 꾸며진 일행을 소중히 생각하며, 일어날 일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는데 이런 알란의 모습이 바로 줄거리의 핵심이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별다른 무대 장치 없어도 빛났던 무대

씬에는 사람 8명, 동물 3마리로 나와 있지만 정작 무대 위에는 배우 5명만 등장한다. 1인 다역이었던 연극이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이름표를 찍찍이로 만들어서 역할이 바뀔 때마다 찍찍이 이름표를 옷에 붙였다. 한 사람이 두 역할을 맡았을 때는 양팔에 이름표를 붙여서 왼팔을 들어올렸다 오른팔을 들어올리느라 바빴다. 동물의 표현도 다양했다. 코끼리 소냐가 등장할 땐 인형이 나왔고 수사견이 등장할 땐 배우가 발 깁스할 때 신는 신발을 신고 강아지 흉내를 냈다. 율리우스인가 했더니 어느새 ‘네버에버’ 갱단의 보스 에르닌이었고 욕쟁이 구닐라는 다시 아론손 반장이 되는 등 캐릭터 저글링이 무대 위에서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배우들이 극 시작 전에 배우들 혹사시키는(?) 연극이라고 괜히 말한 게 아니었다.

캐릭터 저글링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은 바로 남녀 역할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는 점이다. 총 5명의 배우가 등장하지만 이들은 알란이 되기도 하고 알란의 동료가 되기도 하며, 가족이 되기도 한다. 또한 남자가 여자 역할을 맡기도 하고 반대로 여자가 남자 역할을 맡기도 한다. 신기한 것은 이러한 점이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주인공의 인격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연극_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_공연사진_김정일(양소민)에게 정체를 들킬 위기에 처한 청년 알란(권동호)와 아인슈타인(주민진).jpg
 

배우들은 캐릭터 저글링뿐만 아니라 무대장치 역할도 톡톡히 해냈다. 수많은 국가를 돌아다니는 알란의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해서 배우들은 나라가 변할 때마다 그 나라의 민속춤을 추고 ‘건배’를 각 나라의 언어로 말하며 배경을 표현했다. 노래도 하고 춤도 추지만 뮤지컬은 아니라고 초반에 극 시작 전 언급했던 말이 문득 생각났다. 연극이긴 했지만 알란의 인생처럼 배우를 활용한 연극장치도 꽤 버라이어티했다. 그리고 그들의 역할로 무대는 더욱 풍부해졌다.

155분의 러닝타임. 물론 그 중간에 15분의 인터미션이 있긴 했지만 연극이라고 본다면 지루해질 수밖에 없는 긴 시간이다. 게다가 1인당 10역을 맡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캐릭터 저글링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기에 이야기나 역할 그리고 시간까지 꽤 어지럽게 느껴질 수도 있을 법한 공연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빠르게 이야기가 흘러가면서 배우들의 코믹 연기까지 (예를 들면 알란이 북한에 방문하게 되어 공연장에서 북한 국기를 내렸는데, 한 배우가 ‘우리 여기서 이거 내려도 돼?’라고 하자 100세의 알란을 맡은 서현철 배우가 두리번거리다가 ‘이제 바뀌었어. 얼마 전부터’ 라고 관객을 보고 말하는 장면을 보고 빵 터졌다) 곁들어지자 어느새 이 연극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본 재미있는 공연으로 탈바꿈되었다.

특이한 무대장치도, 특별한 의상도 없었지만 배우들과 연출가 그리고 극작가 이 세 조합이 얼마나 열심히 노력을 했는지 알 수 있었던 연극이었다. 한 배우가 외워야 할 어마마한 대사와 춤, 무대 위 동선까지 어떻게 준비했을까 싶었다. 그들의 노력이 한 땀 한 땀 들어가 있어서 그런지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았다.



성냥에 다시 불을 붙여보자

함께 연극을 보러 간 친구에게 물었다, “어떤 점이 인상 깊었어?”라고. 그러자 그 친구는 알란의 “누울 수 있는 침대, 술 한 잔, 식사 한 끼,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만 있다면 괜찮아”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지만 만사는 그 자체로 나둬야 하고 흘러가는 일들은 아쉬워하지 않고 흘러가는 대로 두어야 한다는 알란의 생각에 동의한다며 알란 같은 삶을 동경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렇다. 세상일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리고 위기와 어려움은 예고를 하고 나타나지 않는다. 어떤 일이 있든 있는 일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조급해하지 않는 것이 알란이 평생 추구했던 인생관이었다. 그래서 그가 그렇게 오래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 역시 사람인지라 누울 수 있는 침대와 밥, 술 그리고 친구까지만 갖춰진다면 모든 욕심을 버리고서도 그 행복을 누리고 싶어했다. 발리에서 잠깐 지냈던 시절, 유리와 친하게 지냈던 그 시간을 알란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즐기고 행복해했다. 그러나 가족과 친구들이 항상 같이 있을 수는 없는 법. 그들은 하나둘씩 떠나게 되고, 심지어 그가 가장 애정을 보였던 고양이 몰로토프까지 세상에서 사라진다. 이별의 순간을 겪은 알란이지만, 역시 알란이기에 그는 양로원에 가서도 또다시 한 번 삶의 불꽃을 터트리러 모험을 떠난다. 그리고 그 시작은 창문을 넘는 일이었다.


연극_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_공연사진_함께 오페라를 부르는 유리(주민진)과 알란(서현철).jpg


창문을 넘는 일, 그 간단한 일을 100세 노인인 알란이 했다. 그리고 그 일은 신문에 날 정도로 스펙타클한 모험을 낳았다. ‘어렸을 때는 늙으리라고 상상도 못 해’, ‘백 살이 된 건 아주 최근의 일이야’라고 말하는 알란에게서 불확실한 삶 속의 우연한 행복, 자유 그리고 도전을 보았고 100세의 알란에서 다시 100세의 알란으로 돌아오는 여정을 통해 “그게 가능할까?”라는 아인슈타인의 질문이 우리 인생에 대한 질문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알란 같이 늙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 따뜻하게, 당당하게 자신을 믿으며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연극이 끝나도 내내 했다. 좋은 연극을 만들어준 연극열전에게 박수를 보낸다.




[김민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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