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힘 없는 비명, 「그때,변홍례」 [연극]

“와타시와 마리아 데스”
글 입력 2018.07.13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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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변홍례>는 다른 연극들과 다르게 극을 시작하기 전에 스크린을 앞에 두고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대사 형식으로 설명해주는 시간이 있었다. 중요한 것들을 단어로 먼저 듣고 봐서 이해가 더 쉽게 되었다.

연극에서는 무성영화의 형식을 차용했다. 잘못하면 올드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오히려 현대에 오니까 세련된 방식으로 느껴졌다. 무대에서는 연기자와 연출이 따로 구분되어 있지 않다. 배우였던 사람이 무대 뒤로 가서 누군가의 목소리를 내는 성우가 되기도 하고, 마이크를 통해 어떤 효과음으로 변하기도 했다.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기계음과는 다르게 생생함이 있어서 무대 뒤쪽으로도 눈길이 간다. 배우와 연출을 오가는 순간들이 연극에 더 몰입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배우들뿐만 아니라 관객들에게도 말이다.

가장 생생하고 인상 깊었던 연출은 형사가 오토바이를 타고 추격하는 장면이다. 스탠드를 들고 자동차를 묘사하는 행위만 본다면 유치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변홍례의 연출을 보고 느낀 점은 세련되고 정형화된 기술과 연출만이 답은 아니라는 것이다. 연극을 보는 동안 무대 중앙에 있는 대형 스크린이 하나의 세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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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변홍례>의 시대적 배경은 일제 강점기로 설정되어 있다. 주인공인 변홍례는 그 안에서 조선인이자 그저 하녀에 불과하다. 변홍례는 신분 상승을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에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변홍례는 “와타시와 마리아 데스”라는 대사와 함께 등장한다. 그래서 극에서 ‘변홍례’라는 이름보다 ‘마리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연극을 보다 보면 변홍례와 마리아는 서로 다른 인물처럼 느껴진다. 변홍례는 어떻게 해도 바꿔지 않는 본래의 모습이라면, 마리아는 일제 강점기에서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가면 같았다. 지옥 같은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변홍례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마리아가 되어 대교 사장을 만나는 일 밖에 없었을 것이다.

연극에서는 변홍례가 마리아가 되는 일이 욕망인 것처럼 그려지고 있다. 개인적으로 욕망보다는 오히려 생존인 것처럼 느껴졌다. 영화나 연극에서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설정한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배경이나 내용, 분위기는 모두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독립운동가가 느꼈을 두려움과 고통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진다. 우리는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연극에서는 계속해서 누가 변홍례를 죽였는지 추리하고 있다. 결국 변홍례를 죽인 것은 추리하는 과정 속에서 발견된 인물들뿐만이 아니라, 그 시대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이다. 마지막에 결국 범인은 처벌받지 않는다. 죽음의 진실을 밝히지 못한 채 말이다.

가진 것 없고 힘없는 주인공의 모습은 우리 사회에서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현대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이야기다. 마지막에 관객들을 향해 외치는 변홍례의 모습이 아직까지도 생각난다.




[차유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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