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할머니 탐구생활 [도서]

운이 좋다면 나도 할머니가 되어 있을 것이다. - 정청라 작가
글 입력 2018.07.15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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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사진은 제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할머니일 뿐 책의 내용과는 다소 무관한 점을 밝힙니다.
*노인, 어르신, 할머니, 할아버지 등 나이 드신 분을 칭하는 다양한 단어들을 생각해보았는데, 어감이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이 ‘할머니’여서 통칭하기로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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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를 좋아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할머니의 여유로움, 넉넉함, 살다가 체득한 지식과 지혜, 내가 닿지못한 길고 깊은 시간에 대한 기억을 풀어내는 모습을 좋아한다. 사실 이것은 할머니에 관한 나의 고정관념일 가능성이 크다. 사람은 누구나 나이가 들면 늙는데, 애초에 성격도 제각각인데다 긴 시간을 항해하다 보면 자연스레 자기만의 깊은 골이 만들어지는 것 같다. 그래서 모든 할머니들이 내가 좋아하는 모습을 갖고있지는 않다. 위에 구체적으로 나열한 조건들은 어쩌면 내가 배우고자 하는 방향, 갖지못한 것에 대한 아득한 동경 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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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었다. 제목은 '할머니 탐구 생활'. 20대 후반의 나이에 혼자 시골에 가서 보금자리를 튼, 독특하고 씩씩하며 주관이 뚜렷해 보이는 여자가 이 책을 쓴 작가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그녀는 시골에 살면서 할머니들과 한 마을에 살아가며 얻은 이야기를 글로 풀어낸다.

책의 초반에 이런 말을 한다.


지금 할머니라 불리는 이들도,
그 할머니의 할머니들도
언젠가 어린아이였고,
아가씨였고, 아줌마였을 테니까.

그들은 수많은 세월을 건너오며
변화를 몸으로 겪어온 사람들이다.

생의 굵직굵직한 마디를 몇 차례 건너뛰며
숱한 기억과 감정을 살아 냈을 것이다.


이분들은 죽을 날만
기다리는 할망구가 아니라
살아있는 지혜의 화신으로
내 곁에 계시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혹시나 책 내내 할머니에 대한 거의 찬양에 가까운 미담만을 얘기하지 않을까 조금 우려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읽어보니 굉장히 현실적이었다. 책 속에서 할머니들은 서로 뜻이 달라 싸우기도 하고, 글쓴이와 약간 불편한 이웃 관계에 서 있기도 한다. 또 술에 취해 남의 집 개를 못살게 구는 이웃 아저씨가 등장하는가 하면, 공정하고 합리적인 것과는 다소 거리감이 느껴지는 마을 이장 선거 과정도 보여주는 등 사람 사는 데면 으레 보이는 구질구질한 모습들도 함께 말하면서, 독자들에게 굳이 시골에 대한 꿈 같은 환상만을 심어주려 애쓰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읽다 보면, 시골에 간 그녀의 삶은 빛이 난다. 시골 생활을 맑은 그림처럼 그려나가는 것은 모두 글쓴이의 따뜻한 마음과 역량 덕분인 것 같았다.

글쓴이의 시선은 정겹고, 아름답다. 그녀는 시골에 살며 어르신들을 바라보고 듣고 배우고 느낀 점을 곱씹어 자신의 언어로 반죽해서 나에게 이야기해준다. 특히 자연의 흐름에 ‘자연스레’ 합류하며 노래하는 부분들은 압권이다. 한번 감상해 보시라.


아마 농사짓는 흉내라도 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때에 맞춰 몸을 움직인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건 달력 보고 날짜에 맞춰 일을 계획하고 움직이는 것과는 또 다르다.
감잎이 피어날 때 볍씨를 물에 담그고, 찔레꽃 향기 진동할 때 모내기를 하고, 자귀나무에 꽃이 필 때 팥을 심는 식으로 자연을 세심히 관찰하는 가운데 때를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농사란 천지만물의 움직임에 눈과 귀를 환히 열고 온몸으로 기꺼이 함께 춤을 추는 것! 한마디로 자연과의 합주 속에서 리듬을 타고 박자를 맞추어야 된다는 건데, 이게 정말 쉽지가 않다.


그분들이 기억하는 맛은 반드시 계절과 이어져 있고, 단순히 혀끝에서 노는 맛이 아니라 그 계절이 간직한 맛의 정수가 살아있는 맛이었다. 예를 들어 똑같은 고등어조림을 한다 해도 여름엔 감자나 애호박을 넣고, 가을에는 고구마줄기를 넣고, 겨울에는 김장김치를 넣어 지져 먹는 식으로 그때그때 계절의 맛을 담아내는 것이다.


전라도에서는 설이 되면 쑥떡을 하는 풍습이 있는데 그게 참 의미심장하다. 아직은 황량하고 싸늘한 겨울 풍경에 둘러싸인 가운데 푸르른 떡을 마주하는 느낌은, ... 눈에 띄게 보이지는 않지만 비밀스레 달려오고 있는 푸른 봄을 눈과 입으로 확인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새롭다.

… 그러니까 지난해 봄 내내, 집을 나설 때마다 쑥 가방을 챙겨 들었다. 언제 어디서건 쓸 만한 쑥이 보였다 하면 그 즉시 낫으로 베어 가방에 넣는 민첩함을 발휘하기 위해서였다.

... 그렇게 하면(쑥을 데치면) 양이 눈에 띄게 확 줄어들어 허무하기도 하지만, 삶의 보물을 압축시켜 저장해 놓은 것 같은 충만감을 느낄 수가 있다.


대도시에서 나고 자라 지금까지 살고있는 나 같은 사람이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자연과 함께할 운명인 한 명의 인간으로서 왠지 본능적으로 끌리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자연과 할머니로부터 이어져 글쓴이를 통해 나에게 이르는 이 이야기들은 소중하다.

글쓴이는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가까이 다가온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그래서 더욱 삶의 소중함을 알고 삶을 아름답게 가꾸어가는 할머니를 꿈꿔본다. 내 자식 아끼듯 다른 자식 품어주며, 그렇게 온 생명을 끌어안고 ... 할머니란 말의 어원이 '한(큰) 어머니'에서 왔듯이 엄마의 울타리를 늘이고 늘이고 늘여서, 아무 경계 없고 억지 권위나 위엄 없는 편안한 자리에 다다르고 싶다. 하얀 눈 위에 난 할머니 발자국을 따라 걸으며......


아, 참 좋다. 그런데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용기'를 가진 삶은 무엇일까? 잘은 모르겠지만 그냥 그러고 싶다는 생각만으로도 힘이 생기는 것 같다. 나에게도 할머니가 되는 시간이 언젠가 올까? 먼 미래를 끌어안는 꿈을 생각해 보아야겠다. 내 꿈은 무엇인지.


*

이대로 끝내기 아쉬워,
소소한 추천 ☆
또 찾아 보면 좋을 것들.


시골생활에 관심이 있다면
- 영화 '리틀 포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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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갈림길에서 듣는 시골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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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주인공인 영화가 궁금하다면
- '할머니의 먼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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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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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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