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입 속의 검은 잎≫ 그의 행간에는 쓸데없는 행복이 없다 [문학]

글 입력 2018.07.15 22:10
댓글 1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우울, 허무주의, 비관주의…. 단 한 권의 유고 시집을 남겨 놓고 세상을 떠난 시인, 기형도를 설명하는 단어들이다. 커다란 그의 세계를 조각내는 파편 같은 낱말들과 그의 여러 빛깔 검은색을 하나의 것으로 덮어버리는 편견은 그의 페이지를 들추길 주저하게 한다. 그러나 한 걸음씩 자욱한 안개를 더듬더듬 헤쳐 나가면 그가 보았던 세상이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아름답지 않은 것투성이지만 그 모든 것은 안개의 탓이 아니다. 걷어낼 수 없는 안개 속에서 사물들은 모두 또렷이 흐릿하다.

 
xxlarge.jpg
 

시집의 첫 장을 장식하는 <안개>는 기형도가 시인으로서 문단에 처음 얼굴을 비춘 계기가 된,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앞에서 언급했던 단어들로 그를 미루어보면 불행과 고통을 여과 없이 직설적으로 담아냈을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세계는 입구에서부터 안개로 자욱하다. 은유이기도, 사실에 대한 우회이기도, 또는 진실을 가리는 거짓이기도 한 가지각색의 안개를 그는 굳이 걷어내지 않는다. 그에게는 그러한 흐릿함이 세계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가 묘사한 흐릿한 세계는 현재까지도 사람들의 여린 곳 한쪽을 묵직하게 내리꽂는 비수가 된다. 볕에서 답을 찾기 지친 자들이 찾는 그늘 같은 것일까. 세상이 아름답다고 부르짖는 것이 아름답지 않았던 그는 안개 가득한 현실을 하나씩 건져 보인다.
   

kma_focus_img01_101220.jpg
 


소외


시인은 끊임없이 소외를 말하며 다수에 묵살되는 소수를 연민하고 다수에 분노한다. 아마 자신이 소수에 해당하기 때문이었을까. 「우리 동네 목사님」에서 목사님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마을 사람으로부터 소외되고 마을을 떠난다. 그가 쓸쓸해 보인다고 한 시인의 시선은 돌아 자신을 향한다. 목사님이 떠난 마을은 자신이 시를 통해 비춘 세상 그대로다. 그는 그렇게 늘 ‘아름다운’ 세상에서 유리되었다.
    
「죽은 구름」에서는 소외자는 구름으로 표현되는데, 그것은 또한 시인의 안개처럼 존재들을 가리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구름은 관찰될 필요가 있으며 처음부터 창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그 자체로 흐릿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렇게 만드는 인위에 대해 시인은 조소한다. 만들어지는 흐릿함은 추악하다.
 


늙음


시집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은 아마 시인과 그의 가족, 그리고 노인일 것이다. 시인의 묘사는 역시 비관적이다. 시인이 일찍이 타계하지 않았더라면 그 역시 마주하게 될, 모두가 겪는 현실이기 때문에 비관은 더욱 쓸쓸하고 냉철하다.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

(「장밋빛 인생」 中 )

   
그러나 시인은 노인과 늙음을 비관하지 않는다. 늙음이라는 자연적인 변화마저도 허용하지 않는 사회와 그들이 제멋대로 규정하는 인생을 증오한다. 무언가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스스로의 명령에 허겁지겁 힘을 넣어가는’ 누군가에 대한 연민이다. 그 시선의 끝은 역시 늙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시인의 내면을 향한다.

   
050314khd01.jpg



공허


늙음은 비워지는 과정이기에 시인은 노인을 연민한다. 비워지는 과정의 끝은 죽음이고 살기 위해서는 차라리 불행으로 차 있는 것이 낫다. 시인은 입속에서 타의에 의해 죽어가고 있는 검은 잎들이 두렵다고 했지만, 사실 두려운 것은 검은 잎이 아니라 입을 막는 누군가의 손이다. 검은 잎은 유쾌하지 않은 존재들이나 그것은 동시에 시인의 힘이 된다. 불행보다 끔찍한 것은 불행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

(「노인들」 中)

 
긴 세월의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엔 겸허히 꺾이는 나뭇가지에 시인은 슬퍼한다. 그러나, 죽어서 비어 있음에도 그러지 않은 척 꼿꼿이 고개를 지탱하고 있는 가지들은 추악하다. 소멸하지 않고 비워지는 과정의 끝자락까지 버티는 나뭇가지 같은 것이 바로 노인들의 모습이고 그것은 추악하리만큼 가련하다.
 


모두가 아름답다는 것이 아름답지 않았다


그를 둘러싼 세계는 아름답지 않았다. 흐릿하고 비워 있는 것만이 가득했다. 아름답지 않은 것을 아름답다고 할 수 없어 그는 입속에 검은 잎들을 품었다. 그러나 기형도의 세계는 아름다운 것만 있는 세계보다 넓었다. 내가 있는 곳은 장마철이어도 분명 어딘가에는 사막이 있다. 아무도 드나들려 하지 않는 그곳을 그는 계속 걸었다.


그러나 어쩌랴, 하나뿐인 입들을 막아버리는
가는 비…… 오는 날, 사람들은 모두 젖은 길을 걸어야 한다

「가는 비 온다」 中


가늘게 적시는 빗줄기는 사막을 구원하지 못함에도, 젖어 있는 길 위에서 사람들은 황량함을 불만할 수 없다. 시인에게 세상은 이내 사라질 물기만을 머금은 사막이었다. 행복은 오아시스가 아닌 신기루였다.
 

0-0 Island of Boavista.jpg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우아한 은유 속에 행복이 숨어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며 읽는 나의 모습을 발견한다. 예술은 결국엔 희망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무의식중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일까. 조각조각 나누어져 있는 시들을 마치 소설처럼 이어 읽으며 이 고통스러운 서사 끝에 시인이 행복해지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는 굳이 그리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인은 점점 죽어갔고, 비어져 갔다. 그는 이미 빈 곳에 홀연히 남은 소리를 듣는 것에 익숙하다.

시인이 그토록 비관했던 공허는 그의 일부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고통스러웠다. 그는 빈 공간의 침묵 속에서 세상이 듣지 않는 음파를 선명하게 듣고 있었다. 목사님이 그랬고, 노인들이 그랬고, 부러지는 나뭇가지들이 그러했다. 시인이 경험한 허무와 우울은 비어져 가는 모든 것에 내재되어 있는 보통의 것이었다. 이것이 기형도가 본 세상이었다. 세상은 아름다울 수 없었다. 

행복을 찾지 않는 그의 소리 없는 아우성은 그럼에도 아직까지도 장대하게 울려 퍼진다. 목사님, 노인들, 부러지는 나뭇가지들, 그리고 소외되는 모든 것에게 아름답지 않아도 되는 세상도 존재할 수 있음을 일깨운다. 그의 시는 사막에 물을 욱여넣기보다 사막을 함께 걷기를 택한다. 당장의 사막을 걷는 이들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희미하게 적시는 빗줄기가 아닌 아프게 패인 발자국들일지도 모른다. 그 자체로 동행이다. 그 위에 검은 먼지가 가득 덮여 그 고통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지라도.




조현정.jpg
 

[조현정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댓글1
  •  
  • 혜민
    • 기형도의 전집을 읽고 삼일 동안 우울했던 기억이 떠오르는 글이네요
    • 0 0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5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