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담(畵談)] 제 4.5 화(畵) : 두려움, 다르게 화(化)하다

비일상, 재난, 삶의 두려움
글 입력 2018.07.17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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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전염성 있는 공포

나는 공포영화를 즐기지 않는다. 최근 흥행하는 공포 영화는 대부분 두려움을 주는 존재를 등장시키는 부분에 유독 힘을 준다. 특수 분장 등을 활용해 그 존재를 보다 징그럽게 만들고, 등장하는 장면에 관객이 최대한 놀라도록 각종 상황을 연출한다. 나는 평소에도 불시에 들려오는 소리에 잘 놀라는 편이다. 잘 놀라는 사람의 심리를 아는가? 놀라고 나면 그렇게 짜증스러울 수가 없다. 나에게 공포 영화는 짜증스러운 영화이기도 하다. 감정은 오래가지 않지만 잔상은 오래 남으니 짜증은 더할 수밖에 없다.


유전포스터.jpg
[ 영화 '유전' 포스터 ]


영화 ‘유전’은 달랐다. 나에게 짜증이 아니라 진짜 두려움을 안겨줬다. 영화를 보는 내내 스크린에서부터 공포가 스멀스멀 번져왔다. 나는 왜 ‘유전’의 두려움에 전염되었을까?


당신은 어떻게 표현된 두려움이
가장 무서운가?




1. 일상의 비일상화 – 김선심, 검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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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은꽃, 김선심, 장지에 아크릴, 2005
(박영택, '하루' 촬영본) ]


늘 마주하는 싱크대다. 하지만 그림의 싱크대는 다르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물과 그 안을 부유하는 음식물 쓰레기와 그릇들, 고무장갑은 잘린 손 마냥 싱크대를 붙잡고 떨어지지 않는다. 식기들의 날카로움은 차갑게 빛난다. 다듬다 만 재료들은 움직이는 것처럼 몸을 뒤틀고 있다. 다른 생명을 취하기 위해 도구를 들이미는 곳, 먹다 남은 찌꺼기들을 쏟아지는 물에 흘려 보내는 곳, 평생 벗어나지 못하는 지긋지긋한 생명의 굴레가 평범한 공간 안에 담겨있다.

‘행복한 가정’이라고 했을 때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것 중 하나는 식사 풍경이다. 식탁에 둘러앉아 반찬을 덜어주기도 하고, 도란도란 얘기도 하면서 포만감을 충족시키는 풍경. 그 시간을 위해 전후로는 누군가의 수고가 필요하다. 식사 전에 메뉴를 생각하고, 필요한 재료를 구입하고, 조리하고. 식사 후에 음식 찌꺼기를 치우고, 설거지를 하는 수고가 필요하다. 생명유지를 위해 가장 기본적인 행위에 드는 수고를 우리는 쉽게 잊는다. 그 지긋지긋한 수고는 먹어야 살 수 있는 인간인 한, 반복될 것이다. 작가는 작가 노트에서 이렇게 밝힌다.


“맛이 있든 없든 매일 똑같은 반찬이지만 별로 관심없이 식탁에 올려놓는다. 남자 셋이서 박-박 밥그릇 긁는 소리가 들려온다… 식탁 위는 마치 피폭당한 전쟁터처럼 변해버렸고, 음식물들은 여기저기 파편처럼 흩어져있다… 축 늘어지고, 음산하리만큼 검게 오염된 사물들을 나열하여 지저분하고 구역질나게 하며 어지럽게 널브러져 여기저기 나뒹구는 여러 가지 형태의 부패된 모습들… 정상이라기보다는 비정상적인 형태에 가까운 일그러진 삶, 유독성 발암물질이 들어 있는 음식물, 무질서한 혼돈, 불확실한 사회의 불안정한 모습”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며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하느냐는 몰지각한 생각은 하지 않기를. 인간의 어떤 감정도 무한하지 않다. 수고로 인한 권태, 권태에서 발현되는 근본적 질문. 나는 왜 음식을 만드는가, 음식을 만든다는 것은 무엇일까, 먹는 행위는 무엇일까, 먹는 인간은 무엇일까. 때때로 드는 무의식적인 생각은 내가 일상이라고 느끼던 존재들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일상이 낯설게 느껴질 때, 그 괴리감에서 느껴지는 두려움은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그것이 ‘행복함’을 꾸며내야 하는 가정일지라도.




2. 재난 – 잔 로렌초 베르니니, 페르세포네의 납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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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Rape of Proserpina,Gian Lorenzo Bernini,sculpture,white marble,1621-1622 ]



저 아름다운 엔나 들판에서 / 페르세포네는 꽃을 꺾고 있다가,
저 자신이 또한 꽃다운 꽃이어서, / 저 음험한 하데스에게 꺾이고 만다.

- 밀턴, 실락원 제4권 중


건장한 남성이 여성을 번쩍 들고 있는 모습이다. 어떻게든 벗어나려 팔을 내젓는 여성의 모습이 애처롭다. 남자의 머리를 떠밀어 보지만 허리와 허벅지를 부여잡은 억센 손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다. 남성의 표정은 사뭇 비장하기까지 하다. 눈물 흘리며 거부하는 그녀를 신인 어머니도 구해주지 못한다. 재난은 그렇게 그녀를 덮쳤다.

제목에서 드러나듯 납치하는 남성은 저승의 신 하데스, 여성은 하데스의 아내인 페르세포네다. 익히 알고 있듯 페르세포네가 저승의 여왕이 된 것은 하데스의 납치때문이었다. 판본마다 납치의 세부 경위는 조금씩 달라지지만, 하데스가 페르세포네를 납치했다는 주요 사건은 동일하다. 납치당한 페르세포네가 저승의 석류 세 알을 먹었기 때문에 일 년 중 3 개월은 의무적으로 지하에 머무르게 되었다. 딸의 부재를 슬퍼하는 데메테르가 땅을 보살피지 않는 이 기간 동안 지상에는 겨울이 온다는 것이 신화의 결말이다. (세부적인 결말 역시 판본마다 조금씩 다르다)

좋아하는 여성을 납치하여 남성의 ‘소유’로 만드는 사건은 신화에 자주 등장한다. 아름다운 여성을 ‘취하는’ 것이 그럴만한 자격 또는 힘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페르세포네 역시 납치 사건 이후에는 하데스의 아내, 저승의 여왕으로 신화에 계속 등장했다. 신화적 특성으로 인해 개연성이 부족한 이후의 모습을 제외하고 납치 장면만 바라보자. 꽃을 꺾던 소녀가 알지도 못하는 남자에게 납치당했다. 그녀에게는 재난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납치하는 이 인간은 누구일까?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걸까? 나를 데려가서 무엇을 하려는 걸까? 왜 이러는 걸까? 돌아갈 수 있을까? 무엇 하나 알 수 없고, 무엇 하나 자신의 힘으로 헤쳐나갈 수 없는 상황에 그녀가 느꼈을 두려움이 조각에 새겨져 있다.




3. 삶 – 데이미언 허스트, 하루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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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y by Day, Damien Hirst,
stainless steel, glass and wood cabinet with plastic Dymo tape and pills, 2003
(이주헌, '지식의 미술관' 촬영본) ]


상자에 가득 담겨있는 약. 생명연장을 위한 캡슐들이 빛나고 있다. 아픈 사람들은 저 캡슐들이 간절할 것이다. 누군가는 저 약을 삼키고 자신의 통증이 잠잠해 지길 바랄 것이다. 몸에 들어간 캡슐은 녹고 내용물은 적합한 장기에 작용할 것이다. 독으로 만들어진 인공적인 독이 몸을 돌면, 고통을 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살아갈 것이다.

‘유리 진열장 안에 포름알데히드로 박제된 동물 전시’를 비롯해 충격적인 작업으로 명성 높은 데미안 허스트. 화가는 일부러 자극적인 소재를 고른다는 혹평에도 불구하고 1995년 터너상을 수상했다. 물론 그의 작품이 과대 선전적인 면이 있다고는 하나, 작품의 가치마저 매도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의 작품에는 아름다움과 죽음, 죽음 이후의 부패가 드러나 있다.

‘하루하루’에서 보여주는 약 역시 마찬가지의 맥락이다. 약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인공물이다. 약상자에 가득 담긴 약은 인간의 연약한 육체를 생각나게 한다. 수많은 약에 의존하여 생명을 유지해야 하는 인체의 약함과 그 한계로 마침내 이어질 죽음까지 생각나게 만든다. 상자에 가득한 약은 생명줄인 동시에 생명의 한계를 인식하게 만드는 소재가 된다. 인간은 저 작고 반짝거리는 약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약에서 벗어나면 생명 역시 상실할 것이기 때문에.




4. 두려움

일상의 비일상화, 재난, 삶의 두려움 중 어떤 것이 가장 무서운가? 세 작품의 공통점이 있다면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재난은 애초에 내가 예상할 수 없는 사태이고, 일상의 비일상화는 내가 있는 어떤 곳, 어떤 시간에서든 인식하기에 따라 느낄 수 있다. 삶 자체가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다양한 공포증은 모든 것이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특별한 사물이나 상황에 대해 심한 공포나 불안을 보이는 증상을 공포증이라고 한다. 세부적으로는 거미나 곤충을 두려워하는 동물형, 폭풍우나 물을 무서워하는 자연환경형, 바늘이나 수술받는 것을 무서워하는 혈액-주사-손상형, 비행기나 엘리베이터와 같은 장소를 두려워하는 장소형 등이 있다. 4화(畵)에서 두려움과 죽음이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대부분 좋아하는 귀여운 동물이나, 아이들도 아무렇지 않게 탈 수 있는 엘리베이터라고 해도 나에게 죽을 만큼의 두려움을 환기시킨다면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한 가지 공통점을 더 꼽자면, 세 작품 모두 미지에서 비롯되는 두려움이라는 것이다. 일상적인 공간이었는데 비일상적으로 인식하게 되면서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재난은 나의 미래를 위협하고, 삶은 애초에 내가 알 수 없는 것이다. 애초에 정확히 아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지 모르겠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든 것을 무서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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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유전' 포스터2]


초반에 언급한 영화 ‘유전’은 그 미지의 상태를 통해 내 두려움에 박차를 가했다. 한 가족에게 불행한 사고가 연달아 일어난다. 분명 사고처럼 보이는데 어떤 연관성을 가지기라도 한 듯 쉴 새 없이 이어진다. 새로운 인물의 출현은 의심에 박차를 가하게 만들고, 가족의 불행에서 비롯되는 공포는 관객에게 옮기 시작한다. 잔인한 장면이나 무서운 귀신보다 왜 일어났는지,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한 가정의 불행이 나는 훨씬 무서웠다.

두려움을 일깨우는 대상을 경계하고 나를 지키는 일은 당연하다. 하지만 과하게 두려움을 가지고 모든 것을 경계하는 것은 두려움이라는 감정에 먹혀버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공포영화가 평이 안 좋은 것은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영화를 보는 내내 무서웠지만 결말을 보고 나면 그리 무섭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때문이다. 겪고 나면 별 거 아닐 수 있다는 말은 무책임할 수도 있지만 굳이 두려워할 필요 없는 것까지 두려워하며 내 감정을 들들 볶을 필요는 없다. 두려움 역시 나의 감정이다.



[참고문헌]

이주헌, 지식의 미술관, 아트북스, 2009
박영택, 하루, 지식채널, 2013
김태권, 불편한 미술관, 창비, 2018






[ 휴재 공지 ]

기쁨, 슬픔, 분노, 두려움. 4개의 감정을 8개의 글로 다루었습니다. 이후에는 어떤 감정, 어떤 그림을 소개할까 고민하기 위해 잠시 휴재의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예상 휴재 기간은 3개월입니다. 11월 초, 다시 '화담(畵談)'으로 돌아오겠습니다.

그 동안 '화담(畵談)'을 읽어주신 많은 분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독자 분들이 '화담(畵談)'을 읽으며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에디터인 저 역시 몹시 궁금합니다. 그래서 평소 '화담(畵談)'을 읽은 분들의 질문을 받고자 합니다. 7월 31일까지 아래 폼에 질문 해주시면 8월 둘째 주까지 답변을 정리하여 게시하겠습니다. 질문이 5개 이하일 경우, 이메일로라도 답변 드리겠습니다. '화담(畵談)'과 관련된 질문이라면 어떤 것이든 환영합니다. 많은 질문 부탁드립니다.




[김마루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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