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view] 나나와 껍데기 그리고 렛미인 [전시]

네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은 만들어진 것이다
글 입력 2018.07.18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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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는 잘 챙겨 보지도 않는 웹툰이 가끔 생각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예전에 보던 것은 물론이요, 다른 만화에까지 손을 대게 되기 마련이다. 이미 몇 백 화가 올라온 것은 살짝 부담스럽기에 나는 아직 몇 화 올라오지 않은 신작을 주로 본다. 이들은 스토리 뿐 만 아니라 작품 주제, 장르 모두 다양해서 그럴 때마다 마치 뷔페에 온 기분이 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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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번에 보게 된 ‘네이버’ 웹툰의 신작들은 하나같이 비슷했다. 35cm, 5kg를 위하여, 화장 지워주는 남자, 여신강림. 제목만 봐도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지 않은가? 사실 나아가서는 파우스트 인 러브, 유일무이 로맨스, 악마와 계약연애, 바른연애 길잡이까지도 하나의 공통점으로 묶을 수 있겠다. 거기에 기존에 있었던 웹툰의 개수까지 포함하게 된다면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공통점이란 바로 외적인 요소가 이야기 전개에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웹툰들은 크게 두 가지 양상을 보인다. 주인공의 예쁘거나 잘생긴 외모 덕분에 상대방이 반해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루거나, 지금껏 외모로 인해 차별 받는 고통을 느끼던 주인공이 자의 혹은 타의를 통해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대부분의 변화가 타인의 호의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스스로의 외면을 변화시키려 노력하는 과정을 그린다. 그리고 이러한 웹툰 내에서 원래 외모가 뛰어나거나 혹은 이후 예뻐진 주인공들의 삶은 극명하다. 무조건적인 선망과 이유 없는 질투, 남들에겐 어렵기만 한 사랑도 이들에겐 쉽게 느껴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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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생각해 봐야 할 부분은 이러한 웹툰 안에서 외모로 인해 고통받는 주인공이 여자인 경우가 남자인 경우보다 훨씬 많다는 것이다. ‘패션왕’, ‘외모지상주의’처럼 남자 주인공의 외모 변화로 인한 인생의 변화가 있는 웹툰은 사실 손에 꼽는다. 그에 대한 선례를 들자면 아까 언급했던 4개의 신작 중 3개가 주변의 시선으로 인해 외모 변화를 꿈꾸게 된 여성들의 이야기였던 점을 꼽을 수 있다. 실제로 주변에서도 우리는 남성보다 여성에 대한 외모 잣대가 더 까다로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남성도 지금까지 외모에 대한 차별로 고통받아왔을 수 있고 그들 나름의 고충이 있음은 충분히 이해하며 그것은 없어져야 할 악습이 분명하다. 하지만 사회적 시선이 여성보다 남성에게 조금 더 관대한 것은 사실이다. 나는 “여자는 50kg 넘으면 안 된다”는 말은 들어 봤지만 “남자는 70kg 넘으면 안 돼”라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고, 화장을 하지 않고 나갔을 때 넌 왜 화장을 안 하고 나왔냐는 말을 들어 봤지만 내 주변 남자들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들어 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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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웹툰에도 이런 주제를 차용한 웹툰이 있다. ‘껍데기’라는 웹툰으로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의 껍데기인 외모에 대한 이야기이다. 대략적인 줄거리를 설명하자면 외모로 인해 고통받던 여주인공이 ‘렛미인’과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예뻐지는 내용이다. 하지만 독자들은 알고 있다. 그녀의 얼굴은 단순히 예뻐지는 것이 아닌, 의사의 이상향이 되었을 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자세한 것은 웹툰을 보면 알 것이지만, 그 의사는 매번 똑같은 얼굴을 만든다. 그것이 “예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수학에서 명제를 배울 때 처음 예시로 나온 문장은 아마 “나는 잘생겼다”일 것이다. 이것은 명제가 될 수 없는 가장 적합한 예시이다. 참과 거짓을 명확히 판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쁘고 잘 생겼다고 생각하는 것은 온전한 주관적인 판단이다. 그 말은 모든 타인에게 인정받는 최고의 얼굴이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예쁨과 잘생김의 기준이 분명히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 그 기준을 표면적으로 보여주는 예시 중 하나가 ‘렛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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렛미인은 앞서 말한 ‘껍데기’에서 나온 TV 프로그램의 원조이다. 2015년까지 총 5시즌으로 마무리되었을 정도로 인기있었고, 많은 아류와 패러디를 낳기도 했다. 일단 소개는 지원자들의 자아 존중감(이하 자존감)을 향상시켜준다는 취지라고 되어 있지만 이 한 줄에는 많은 맹점이 내포되어 있다. 그들의 콤플렉스는 어디에서 온 것이며, 단순히 그 콤플렉스를 고치는 것만으로 자존감이 향상될 수 있는가? 개인적으로 자신감과 자존감의 차이는 어떤 부분에서 스스로를 인정할 수 있느냐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자신감은 자신이 가진 조건에서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지만 자존감은 자기 자신의 정체성 자체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콤플렉스를 고친다고 해서 자존감이 향상된다는 말이 모순적이게 느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렛미인에서는 그러한 콤플렉스만 고치는 것이 아닌 얼굴과 몸 모두를 새롭게 개조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변화된 지원자들의 모습은 모두 엇비슷하다. 그런 그들은 예쁜 모습일까 아니면 유행하는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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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키 드 생팔’에 따르면 우리가 흔히 미의 기준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남녀의 권력 구조의 차이에서 온다. 웹툰 속에 나타난 주인공이나 렛미인에 나온 사람들이나 모두 스스로를 아름답게 생각하지 않았기에 자신의 모습을 타인의 기준에 맞추고자 한 것이다. 그녀에 따르면 그 타인의 기준이란 곧 남성의 기준이다. 니키는 ‘성적 노리개’로 대변되는, 남성들이 기대하는 여성성을 파기하고 주체적이며 생명을 탄생시키는 고귀한 존재로서의 새로운 여성성을 창조하고자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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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나나’ 연작은 이러한 새로운 미의 기준을 표현한 그녀의 대표작이다. 나나를 통해 기존의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전통적인 사회’ 속에서의 여성성을 파괴하기 위해서 그녀는 아름다움과 성스러움의 상징인 신부, 현숙하고 순종적인 아내, 자애로운 어머니 등의 이미지를 전복시키고 출산이 가능한 여성의 신체를 고귀한 존재로서 강조했다. 나나를 보면 흔히 밀로의 비너스를 떠올린다. 이는 의도된 것으로, 여자들에 대한 이미지를 통합하고 신격화시키기 위한 표현이었다. 나나라는 이름 자체가 엄마라는 뜻의 마마(Mama)와 할머니를 뜻하는 이탈리아어 노나(Nonna), 유모를 부를 때의 나니(Nanny)의 중간이라고 할 수 있다. 나나는 흐트러진 자세와 다양하고 알록달록한 색채를 통해 자유를 표현했으며 기존의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을 탈피했음에도 아름다울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나아가 이는 권력을 통해 타인을 억압하지 않는 것은 여성뿐 아니라 모든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뚱뚱하고 거대한 모습, 자유로운 자세와 신체 일부가 손실됐다든가 하는 해부학을 무시한 형태는 남성의 시선과 상관 없이 미학적으로 느껴지며 이는 남성의 권위로 생성된 전통적 미적 기준에 대한 저항의식을 나타낸다. 고대 그리스의 고정된 수동적 비너스 형태에 머물러있지 않고 생명력 넘치는 여성의 이미지를 새로 창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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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의 매력을 가졌음에도
남자에게 인기 있기 위해
7의 여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


웹툰 속 그녀들은 살만 빼면, 얼굴만 고치면 잘생긴 남자들을 만난다. 렛미인 속 그녀들은 전신 성형을 함으로써 자존감을 향상시킬 수 있다. 우리는 니키의 작품을 보며 이 두 전제 속에서 의문을 가져야만 한다. 왜 그녀들은 남자를 만나기 위해 외모를 변화시켜야 하며, 단순히 외모가 변했다고 해서 만난 남자가 과연 좋은 남자인가? 그리고 그녀들이 바꾼 이상향은 누구에게 잘 보이기 위한 외모인가? 하얀 피부, 뚜렷한 이목구비, 큰 가슴, 어린 아이처럼 구는 애교와 은근히 보이기 위한 섹슈얼한 요소들까지 모두 결국 남자들이 만든 이상향일 뿐이다. 단순히 외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여성에게만 요구되는 높은 외모의 잣대와 동화 속 공주처럼 그들에게 선택 받아야 한다는 고전적인 전제들은 결국 권력을 지닌 남성이 여성에게 강요하는 구속이고 폭력이다. 그래서 우리는 니키를 페미니스트라고 하고, 그의 작품 속에서 페미니즘을 찾는 것이다. 그녀의 작품 속에서 여성은 비로소 ‘여성’스러울 수 있다. 이제 당신이 생각하는 여성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무엇이든 당신이 타인의 시선 속에서 자유로울 수 있고, 고귀한 하나의 존재로 인정받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여성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참고
정금희 (2011).
니키 드 생 팔 예술에 나타난 페미니즘에 관한 연구.
한국프랑스학논집, 73, 333-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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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혜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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