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서사 너머의 자리, 연극 ‘낯선 사람’

글 입력 2018.07.19 23:21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REVIEW]
연극 '낯선 사람'


낯선사람-포스터-0620.jpg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논하고자 했으나, 글을 쓰려 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작품의 외연에서부터 내면으로 파고들어가는 게 우선되어야 할 것만 같다. -
 
구체적인 상황이 놓여 있고, 잘 짜인 플롯 위에서 배우들은 최선의 연기를 선보인다. 기존의 연극에 대한 간략한 정의를 내리자면 이와 같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논한 것처럼 플롯이 으뜸이며 성격은 버금간다. 몸짓과 장경은 플롯을 견고하게 만들어주는 데 일조할 뿐이다. 공연예술의 효시가 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극 이론은 오늘날까지도 계속해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극을 만드는 이들은 시학의 규칙을 절대적으로 반영하려 하고, 극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시학의 요소에 빠져 있어 이 중 하나라도 어긋나거나 우위가 전도되면 극으로부터 불안과 의문을 갖는다.
 
그러나 무릇 존재하는 것들은-그것이 사물이나 어떠한 현상이라 할지라도-존재의 타당성이 길어지면 타성에 젖어들기 마련이다. 맹목적인 긍정과 새로운 것을 생각하려하지 않는 일종의 게으름이 타성을 불러일으키는 것만 같다. 그런 점에서 아무도 가지 않은 길, 절대 다수의 생각을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은 곧 새로운 흐름의 시작을 알린다고 볼 수 있다. 예술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술은 고전주의, 낭만주의 등 나름의 사조를 계속해서 선보여 왔고 현대의 영역에 들어온 지금에서도 계속해서 기존의 것들로부터 달아나는 시도를 하고 있다.
 
미술과 음악이 시대의 흐름에 맞춰 여러 변화를 겪어왔다면, 연극의 경우에는 사뭇 다르다. 연극이 겪는 큰 변화의 파도는 바로 지금 이 시대일 것이다. 미술이 사실을 던지고 추상의 세계에 넘어가면서 새로운 사조가 등장했던 것처럼, 연극 또한 드디어 서사를 던지고 서사 그 너머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흔히들 연극하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건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특정한 스토리가 있는 작품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시기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연극은 서사라는 구명조끼를 입고 무한한 표현의 바다를 헤엄쳐 왔다.

 

서사 너머의 자리, 연극 ‘낯선 사람’


15.jpg


연극 ‘낯선 사람’은 서사 이후의 연극의 물꼬를 트는 작품으로 다가온다. (극을 보면 느끼겠지만) 극 속에는 하나의 중심이 되는 사건이나 극을 이끌어가는 인물이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의화단 운동이란 뼈대의 사건과 울리히와 천샤오보란 두 인물이 등장하긴 하지만 이것이 곧 ‘낯선 사람’의 전체는 아니다. 서사를 과감하게 던져버리고 인물의 심리와 몸짓에 집중한 ‘낯선 사람’은 지금껏 보지 못한 방향으로 극을 펼쳐나간다.
 
이는 곧 ‘가정(假定)의 붕괴’다. 지금까지 관객들은 책에서 배운 대로 ‘기승전결(起承轉結)’의 흐름 속에서 극을 잘 읽어왔다. 어느 정도 파악에 도가 튼 관객들은 다음에 그려질 전개를 미리 예측하기도 했다. 관객은 나름의 가정을 하면서 일어날 사건을 상상하면서 극을 흥미롭게 바라봐왔다. 하지만 ‘낯선 사람’에 있어서 가정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극을 따라간다고 해서 극 전반에 있는 사건을 단번에 아우를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극 중에 일어나는 사건을 어느 누군가의 시점에서만 보면 절대로 극이 계속될 수 없다는 점을 느낄 수 있다.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믿었던 천샤오보와 손녀의 대화가 5막에 와서는 울리히의 상상 속에서 일어났던 일이라고 누가 극을 보면서 미리 파악할 수 있었겠는가.

다음에 일어날 일을 예측할 수 없는 ‘낯선 사람’이다. 가정 너머의 부분에서 작품을 보려면 눈에 드러나는 배우의 모습에 집중하는 것이 아닌, 그 너머에 있는 인간 그 자체의 심리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21.jpg
 

심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작품을 일차원적인 면에서 더 이상 바라볼 수 없음을 의미한다. 어떤 이들은 작품을 보면서 ‘왜 할아버지인데 젊은 배우가 배역을 맡았지?’라는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드러나는 존재를 넘어서 인간 심리에 집중하면 단순하게 해명될 수 있다. 극 중 천샤오보는 죽음의 문턱에서 가까스로 살아난 인물이다. 그렇기에 이어지는 그의 삶에는 살아남았다는 죄의식과, 세상을 바꾸지 못했다는 자책감 등이 계속해서 그를 따라붙었을 것이다.

그것은 곧 트라우마가 되어 천샤오보를 그 시절에 머무르게 만들었다. 한 번 상처입은 정신은 제 아무리 육신이 늙어간다고 한들 영원히 나아질 수 없다. 따라서 극 중 천샤오보는 정신을 다친 사람으로 늙어진 육신보다 오래전 다친 영혼이 우선하는 사람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곧 그가 할아버지로 등장한다지만 젊은이로 비춰질 수밖에 없는 이유로 다가온다.

 
KakaoTalk_20180719_231451130.jpg


연극 ‘낯선 사람’은 작품 그 자체로 낯설면서 동시에 새롭다.

낯선 것은 익숙하지 않음으로부터 오는 느낌이다. 그런 느낌을 수용하는 관객은 어떤 시선으로 작품을 보아야 하는 걸까. 정확하게 단정 지을 수는 없겠지만, ‘틀린 게 아닌 다른’ 작품으로 접해야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는 작품을 보면서 너무 낯설어서 ‘이건 연극이 아니다’라고 느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정밀화를 넘어 추상화로 나온 미술의 역사를 보라. 연극은 이제 막 서사라는 정밀화를 벗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낯선 사람’은 눈에 보이지만 결코 정의할 수 없는 인간의 심리를 이야기한다. 일차원에서 다차원으로 넘어가고 있는 연극의 어느 과도기에서 ‘낯선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서사 너머의 자리는 무엇으로 채워질 수 있을까’라는 흥미로운 물음을 던지는 작품으로 다가온다. 글쎄, 서사 너머의 자리라. 그 자리에는 서사 속 인물이 아닌, 그 자체로 존재하는 인간이 있지 않을까.





이다선 필진 리뉴얼.jpg
 

[이다선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19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