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무덤의 주인을 찾아서 [전통예술]

글 입력 2018.07.21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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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쌍릉의 주인은?

얼마 전,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에 눈에 띄는 글귀가 있었다. 바로 ‘익산 쌍릉’ 이었다. 클릭을 해보니 이미 수많은 기사들이 올라와 있었다. 주된 내용은 익산 쌍릉의 대왕릉 속 주인공이 백제 무왕으로 밝혀졌다는 것이었다.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사귀어
맛둥[薯童]도련님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서동요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와 결혼하여 왕위에 오른 무왕은 우리에게 ‘서동요’로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그가 잠든 곳으로 추정되는 익산의 쌍릉은 남북으로 2기의 무덤이 있어 하나는 대왕릉, 다른 하나는 소왕릉이라고 불린다. 이곳에서는 일제 강점기인 1917년에 일본인의 감독 하에 1차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당시 그들은 대왕릉에서 발견된 치아를 통해, 이곳의 피장자를 여성으로 추정했다. 유물 중 신라계 토기가 있다는 점을 들어 무덤의 주인이 서동요 속 신라 출신 선화공주이거나, 실제 무왕의 왕비로 여겨지는(미륵사지 출토 유물로 미루어 보아) ‘사택씨의 딸’이라는 얘기도 나왔다. 그렇게 대왕릉은 왕이 아니라 왕비의 무덤으로 결론지어지는 듯하였다.


      대왕릉     
소왕릉
목관 일체
완형 토기
옥 장신구
치아 3점
+인골
금동제관식금구
관정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jpg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제공한
익산 쌍릉의 인골사진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2017년, 2차 발굴조사가 한국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런데  인골이 담긴 나무 상자가 새로 발견됐다. 이는 일본에 의해 처음으로 발굴되었을 때 발표된 보고서에서 볼 수 없었던 항목이었다. 뼈가 크고 굵어 남성의 것임이 유력해 보였고 연구 결과 또한 남성의 인골로 밝혀졌다.



황남대총의 주인은?


익산 쌍릉의 내용을 읽고 나니, 비슷한 사례가 떠올랐다. 바로 황남대총이다. 황남대총의 주인은 아직까지 베일에 감춰진 존재이다.


131.jpg
황남대총


황남대총은 경주시에 위치한 신라시대의 고분으로, 대릉원 내에서도 큰 규모를 자랑한다.  부장품 또한 많아, 마립간 중 가장 뛰어났던 내물 마립간의 무덤이 아닐까 추측되고 있다. 익산 쌍릉과 같이 두 무덤이 연결되어 있으며, 남분과 북분으로 나뉜다. 통상적으로, 남분의 피장자는 남자, 북분의 피장자는 여자로 여겨지지만 각각의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학계에 논란을 일으켰다.


 남분 
       북분       
부장품 궤와 목관
무기류
10세 경 여인 순장
금동관
목관
장신구
금관


남성을 상징하는 무기류가 남분에 있고 북분에는 장신구가 주를 이루는 것으로 보아, 남분은 남성의 묘이고 북분은 여성의 묘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북분에 있던 장신구 중 허리띠에는 ‘부인(夫人)’이라는 명문이 적혀져 있었기 때문에 무덤의 주인이 여성임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증거가 되었다.


황남대총 무덤 출토.jpg
황남대총 출토 유물


하지만 최대의 미스테리는 ‘금동관과 금관’이다. 여자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북분에서 금관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그동안의 연구로 알아낸 규칙에 어긋나는 점이었다. 다른 무덤의 출토 유물로만 보아도 ‘금동관’은 ‘금관’보다 상대적으로 낮은 계급을 상징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상대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었던 남성이 묻힌 남분에서는 금관보다 격이 낮은 은제 무기와 금동관이 나왔을 뿐, 금관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에 대해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고 이를 설명하기 위한 여러 가지 가설이 세워졌다. 첫 번째는 여성 피장자가 ‘제사장’이라는 주장이다. 북분에서 출토된 금관은 사슴뿔 모양이었다. 사슴뿔 모양은 예로부터 샤머니즘적 뜻을 지녔기 때문에, 이것을 사용했던 사람은 제사장이었고, 그 제사장이 마립간의 아내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이 관은 10대의 아이가 쓸 법한 크기여서, 제사장이 직접 쓰던 관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두 번째는 ‘남분의 금동관을 피장자가 자신의 온전한 세력을 갖기 전, 태자 시절에 썼던 것 아니었을까?’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 또한 신라시대 왕권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금관’의 부재를 설명해주지 못했다.



두 무덤의 의의
  
백제시대를 보여주는 익산 쌍릉과 신라시대를 대표하는 황남대총. 모두 시대와 지역, 나라는 달랐지만, 상당히 유사한 과제를 우리에게 남겨두었다. 현시대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 지나간 시대가 남긴 무덤의 주인을 파악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익산 쌍릉의 경우, 일본의 시각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시각으로 본 연구가 이루어졌다는 것에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번 사례를 통해, 당시 백제의 시대상을 더욱 잘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황남대총의 경우는 어떠한가? 아직 많은 가설들이 부유하지만, 그 덕분인지 역사의 퍼즐을 풀어나갈 여러 시각의 실마리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계속해서 활발한 연구들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이것이 신라시대의 새로운 발견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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