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뺑이 치는’ 맛에 사는 거다. [여행]

2박3일의 제주가 ‘잘’살고 싶은 나에게 알려준 것.
글 입력 2018.07.25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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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박3일 동안 제주에 다녀왔다. 계획 따위 세우지 않고, 상당히 급작스럽게 홀로 슝- 다녀왔다. ‘갑자기 왜?’ 라고 묻는다면, 그냥 끌렸다. 복학이라는 녀석이 한치 앞으로 다가온 이 상황에서 제주의 부름을 더 이상 미루면 아주 오래도록 못갈 것 같았다. 하여 괜히 신중해지는 일 따위 미연에 방지하고자 떠나기 이틀 전에 비행기부터 예약해버렸다. 이제 수수료 아까워서 취소도 못한다. 빼도 박도 못하게 된 거다. 그렇게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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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온 지 근 일주일이 지난 지금, 결론부터 말하자면... 좋았다. 너무 좋았다. 미친 듯이 더웠지만 원할 때 걷고 원할 때 쉴 수 있었던 그 무계획의 2박 3일에서 난 살아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새파란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다음 아트인사이트 포스팅은 제주를 소재로 하리라.’ 참으로 투철한 직업(?)정신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이미 일주일 전부터 정해져있던 소재를 가지고 어떻게 이야기를 풀지에 대해 하루 종일 고민했다. 지금까지는 소재만 나오면 주제도 꽤 쉽게 떠올랐는데 이번에는 웬일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카페에서 머리를 찧다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짐을 챙겼다. 거북이걸음으로 느릿느릿 집까지 걸어 올라가며 고민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지?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뭐지? 소재는 엄청나게 좋은데, 왜 감이 안 오지?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아, 내가 지금 너무 잘 쓰려고 하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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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본격적으로 글을 구상하기에 앞서 다른 아트인사이트 에디터 분들의 포스팅을 봤기 때문에 더욱 잘 써야 한다는 강박이 올라왔을 것이다. 혹시 이 글을 보고 계시는 다른 에디터 분들이 계시다면... 당신은 정말 나빴다! 당신은 너무 잘 쓴다!!! 글은 잘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망한다고 하던데, 역시 그 말이 맞구나 싶었다. ‘잘’이라는 것에 틀어박히면 항상 그만한 결과가 안 나오는 것 같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의식의 흐름이 여기까지 닿았다. ‘어쩌면 내가 제주를 이토록 좋게 기억하고 있는 것이, 제주에서는 잘해야겠다는 강박이 없었기 때문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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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언급했듯이 나는 무계획으로 갔다. 비행기도 이틀 전에 예약했고 숙소는 하루 전에 잡았다. 어딜 가볼지조차 정하지 않았으며 동선 같은 건 당연히 안 짰다. 덕분에 고생 꽤나 했다. 그 더운 날, 내가 짐 가방을 멘 건지 짐 가방이 나를 멘 건지 헷갈릴 정도로 짐들과 혼연일체를 이루며 제주도 바닥을 굴러다닐 때는 역시 멍청하면 몸이 고생한다며 스스로에게 끝없는 욕설을 퍼부었다. 뚜벅이로 다닌지라 제주시와 애월 부근에만 줄곧 있었으니 비행기값 아깝다고 볼 수도 있겠다. 한마디로 ‘잘한’ 여행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행이 별로였냐고, 무계획으로 간 것을 후회하느냐고 묻는다면 전혀 아니라고 곧바로 대답하겠다. 이유는, 제주에서는 그냥 그래도 됐기 때문이다. 나에게 제주는 얼마든지 못해도 되는 땅이었다. 굳이 무언가를 잘 해낼 필요가 없는 곳. 아무런 성과 없이 하루를 그저 흘려보내도 좋은 곳. 나에게 제주는 그런 곳이었다. 나는 제주에서 스스로에게 바보스러움을 허용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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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학을 준비하는 요즘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다. 지난 1년간의 휴학을 절대 후회하지는 않는다. 휴학 덕분에 나라는 인간과 좀 더 친해질 수 있었고 건강한 영화를 하겠다는 꿈에 닿기 위한 제반을 더욱 단단히 다질 수 있었다. 학교 다닐 때보다 더 적극적으로 바쁘게 살아서 크게 미련이 남지도 않는다.
 
다만 걱정이 되는 건 이거다. ‘무엇을 경험했느냐’는 질문에는 꽤 할 말이 많은데, ‘무엇을 이뤘느냐’는 질문에는... 말꼬리를 흐리게 된다. 모든 기회에 열심히 임했지만 그 중 가시적인 결과까지 이어진 건 별로 없다. 분명 바쁘긴 바빴는데 뭘 한 거지 싶은 의문을 품고 있을 즈음 남들은 옆에서 ‘똑똑하게’ 노력해 ‘쓸모 있는’ 결과를 얻어내고 있었다.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그런데 바로 오늘, 제주에서의 ‘못한’ 여행을 떠올리고 내가 잘해야겠다는 강박에 싸여있었다는 것을 알아채면서야 비로소 오랜 싱숭생숭함을 청산할 실마리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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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하게 위대하게>를 연출한 장철수 감독은 한국영화감독조합에서 영화감독들을 인터뷰하며 펴낸 책 <데뷔의 순간>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지금껏 세상을 살면서 느낀 건,
'뿌린대로 거둔다.'는 말이 틀렸다는 사실이다."


최선을 다한다고 해서 그것이 항상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이것은 마치 지구는 둥글다는 것처럼 명백한 사실이지만, 요즘과 같은 성과중심 세상에서는 열심히 노력해놓고 결국 빈손인 것이 꽤나 비정상적인 것처럼 비춰진다. 하여 ‘결국 빈손’이라는 이 네 글자는 종종 나를, 그리고 우리를 초조하게 몰아세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나의 노오~력을 배신한 결과를 향해 분통을 터뜨려야 하는가? 책 <데뷔의 순간>에서 장철수 감독은 이렇게 덧붙인다.
 

"그래도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어쨌건 뿌려야만 거둘 수 있는 것 또한 세상의 이치다. 뿌린 대로 거두지 못한다고 해서 아무것도 뿌리지 않는다면 그냥 거기서 끝이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계속해서 뿌리는 것이다. 과거의 빈약한 싹에 연연하지 않는 담대함과 뿌리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는 묵묵함이 나에게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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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사실, 싹이 아예 없는 게 아니라 그저 빈약할(기대한 생김새와 다른) 뿐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다. 내가 차가 없어 우도를 못간 덕분에 애월의 노을을 멍하니 바라볼 수 있었던 것처럼, 비록 ‘기대한’ 성과는 없을지라도 ‘예상치 못한’ 성과가 분명 곁을 맴돌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눈치채주기만 하면 된다. ‘제대로’는 못했을 지라도, ‘못한’ 건 아니라는 말이다. 어찌됐든 가만히 있지 않고 계속해서 몸을 움직였기에 눈에 띌 만큼 큰 걸음은 못 뗐을지라도 미세하게나마 앞을 향해 나아갔다고 스스로를 위안해본다.
 

아기 걸음마 같은 작은 걸음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걸음이 아닌 것은 아니다.

- <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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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인생의 절반 이상은 ‘뺑이 치는’ 짓의 연속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뺑이 치는 것조차 그만둬버리기에는 나는 아직 너무 젊다. 제주에서의 멍청했던 기억은 ‘못할’ 용기를 심어주었다. 이것을 알아차린 나는 내일 좀 더 당당하게 못할 수 있을 테니, 오늘도 역시 1보 전진한 셈이다.

덧붙여, 제주는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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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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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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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구바구
    • 정말 잘읽었습니다! 저도 생각이 같아서 흥미롭게 읽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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