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비가 언제 오려나, 우리가 더운 날을 여행하는 방법 [사람]

기우제를 지내야겠다. 태풍 종다리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글 입력 2018.07.26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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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온 게 언제였더라, 열흘 쯤 맑디맑은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이 날씨는 맑음을 한층 넘어선 폭염이다. 나는 해가 나도 좋고 비가 와도 좋다. 이전의 그 어느 때로도 돌아가고 싶지 않을 만큼 행복한 지금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있다. 이 여유가 고마워서 혼자 길을 걷다가도 웃음이 난다.

*

부산에 사는 친구 B가 서울까지 먼 길을 왔다. 내 집에서 여행 내내 편하게 지내다 가기를 바랐다. B가 오는 날, 나는 오전부터 일을 하러나가 이틀정도 집을 떠나있는 관계로 열쇠를 직접 건네줄 수가 없었다. 밤늦게 도착한다는데 이웃에 열쇠를 맡기기에도 좀 그렇고 해서 고심 끝에 집 앞에 놓여있던 택배상자 밑에 열쇠를 숨겨두고 B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기로 결심했다. 열쇠를 상자 밑에 숨기자는 생각이 든 순간부터 내 시간은 그전에 없던 긴장감과 모험심이 불어나는 장르로 바뀌었다. 이후 친구가 열쇠를 찾아내 집에 잘 들어갔다는 연락을 받고 안도했다. 그럴 리 없겠지만 엄마의 잔소리가 그리워진다면, 엄마에게 이 짧았던 장르변환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면 될 것이다. 주인 없는 낯선 집의 대문을 열고 잠시 당황할지도 모를 B를 위해, 집안 곳곳에 메모지를 붙여두었다. 보일러실은 바퀴벌레가 나올 수 있으니 그 문을 열어선 안 된다, 에어컨을 사용하고 나면 바로 전원을 끄지 말고 송풍 모드로 30분정도 켜둬야 곰팡이가 덜 생긴다는 식의 중대한 문제들에 대한 얘기였다.

이틀 후 아침, 퇴근을 하고 집으로 갔다.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는 집으로 간다는 것이 좋았다. 집에는 B가 있었다. B는 끝내주는 채광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내 집은 동쪽 방향으로 커다란 창이 있어 아침 해가 떠오르면 빛이 쏟아진다. 심지어 커튼도 달지 않고 창가를 따라 침대를 뉘어놓았기 때문에 짙은 햇빛은 눈을 감고 있어도 눈이 부시도록, 잠을 끝내준다. 햇살에 자연스레 잠에서 깨는 것이 나의 오랜 로망이었다. 아무튼, 퇴근 후 돌아오면 보통은 피로감과 집으로 돌아왔다는 안도감에 절여진 채로 잠깐 누워 쉬는데, B를 보고는 반가워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몸은 피곤한데 마음이 즐거워 누울 새가 없다. 가볍게 점심을 같이 해먹고 우리는 각자의 일정이 있어 저녁에 다시 보기로 했다. 나는 피아노를 치러 구민센터에 갔는데, 기분이 좋아서인지 손가락이 여느 때와 다르게 자유롭게 굴러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녁에는 B에게 메뉴 추천을 받아 손님맞이 요리를 해볼 작정이었다. B가 알리오올리오는 어떠냐고했다. 알리오올리오는 이름이 참 예쁘다. 처음 해보는 음식이라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인터넷 검색하면 뜨는 백종원님의 레시피와 함께라면 크게 두려울 것이 없었다. 요리할 때 웬만한 음식에 백종원이라는 세 글자를 덧붙여 검색하면, 따라하기도 쉽고 실패를 피할 수 있는 요리법이 나와 애용하고 있다. 내가 프라이팬을 잡자 B는 요리에 대한 열정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게 만드는, 매우 적절한 음악을 들려주었다. 결과적으로 나의 첫 알리오올리오는 그 맛이 아주 만족스럽진 않았다.




저녁을 먹고 B는 탱고를 추러 갔다. 고등학생 때부터 춤추는 모습이 유독 반짝여서 주변 친구들이 다들 눈을 떼기 어려워했던, B는 지금 수 년 째 탱고와 사랑에 빠져있다. 반면 몸으로 하는 일에는 어색함을 떨치기 어려운 나는, B를 매료시킨 그 세계가 궁금해서 따라가 구경만 한 적이 한번 있다. 춤을 출 때 B의 얼굴 반은 긴 머리에 가려있고 반은 남자에 기대어있어 잘 보이지 않았지만, 탱고 음악에 맞춰 스텝을 밟는 중 언뜻 보이는 눈을 감은 표정은 약간 슬픔에 가까운 편이었는데, 중간 중간 옅게 미소를 짓는 것도 같았다. 그때 그 장소가 마침 상하이여서, 이국적인 분위기가 감돌았다. B는 음악을 즐기며 온몸으로 표현하는 행복을 탱고에서 찾았다. 음악과 사람의 움직임-춤-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나는 혼자 책상 앞에 앉아서 무슨 주제로 글을 써야할지 고민했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밤이 되면, 이제 뭔가 떠오를 때가 되었는데. 생각나는 소재들로 글을 써봐도 한, 두, 세 문장을 넘지 못한다. 마음을 담아서 쓰고, 읽고, 고치는 작업을 즐겁게 반복할만한 글감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조금 절망적인 마음으로 그냥 잤다. 꿈에서 뭐라도 보이겠거니 하면서.

아침에 일어났지만 밤새 별다른 수확은 없었다. 침울해하고 있는데 똑똑, B가 대문을 두드렸다. 밤새 춤추고 사람들과 뒷풀이를 갔다가 아침이 되어 돌아왔다. 처음 보는 이들과 관계에서는 거리를 멀찍이 유지하는 것이 습관처럼 굳은 나는 B의 어젯밤 행적을 들으며 감탄했다. 이야기를 마친 B는 따사로운 햇살에도 아랑곳 않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잠에서 깬 B와 나는 음악을 들었다.
 

 
 
매달 마지막 수요일! 문화가 있는 날을 맞이해서 우리는 남서울미술관에 갔다. 집을 나와 천천히 걷다보면 구 벨기에 영사관이었다는 아름다운 건축양식의 미술관에 도착할 수 있다. 높고 커다란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시원함이 온몸에 확 끼쳤다. 평일 낮의 미술관은 훌륭한 피서지다. 벨기에와 교류를 갖기 시작해 영사관을 짓고 현재의 미술관이 되기까지 연대표를 쭉 보다, 조선이 개항하며 일본, 미국, 영국, 독일 등 강대국과 차례로 수호조약을 맺던 시기, 1800년대 후반이 특히 눈에 들어왔다. 열강들 사이에서 대한제국은 벨기에를 모델로 삼아 중립국이 되고자 했지만 실패로 돌아간다. 저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혼란스러운 틈에 살아가느라고 고생했겠다. 미술관에서는 요즘 '날씨의 맛' 이라는 전시가 진행 중이었다. 10명의 작가가 날씨라는 소재를 가지고 각자 작품을 만들었는데, 다양한 볼거리에 집중하는 재미가 있었다. 전시를 소개하는 글귀 중에도 마음을 톡톡 건드리는 구절이 많아 그걸 주워 담고 생각하느라 바빴다. 그런데 이것이 무료 전시라니! 부담 없이 많은 사람들이 즐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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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작 중에는 사막에서 기우제를 지내는 작가의 영상 작품도 있다. 백정기 작가는 제사장이 되어 자신이 설정한 일련의 의식을 행한다. 음... 대체 뭐하는거지... 싶다. ‘도구의 효용성은 사용하는 자의 믿음에서 비롯된다.’는 글귀를 보여주더니 기우제를 치른다. 바세린으로 만든 도마뱀모형을 팬에 녹인다. 그 액체를 삼각 석고틀에 붓는다. 석고를 깨서 삼각형의 바세린을 분리해낸다. 나침반으로 방위를 확인하고 삼각형 바세린을 땅에 묻는다... 이상하지만, 경건하게 치르는 그 제사를 진지하게 바라보게 된다.

미술관 나들이를 다녀오는 길에 B가 마카롱을 좋아하냐 물었다. 그 달달함을 싫어할 순 없다. 마카롱을 종류별로 골라 담아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커피를 만들기 위해 수동 커피 그라인더를 꺼냈다. 그라인더를 돌리자 커피콩이 우드득우드득 소리를 내며, 가루가 되었다. 그렇게 내린 커피와 함께, 우리는 마카롱 하나하나를 작품 감상하듯 천천히 맛보았다. 색색깔의 행복이 혀에 닿았다. 그리고 각자 일기를 썼다. B에게 블로그 같은걸 만들어보는게 어떠냐고 했지만 자기는 비밀이 많다며 아날로그식을 고집한다. 조그만 노트에 미술전시 팜플렛이나 공연관람 티켓 등을 오려붙이고 감상을 써나가는 모습. B는 자신의 솔직한 생각과 느낌을 소중하게 간직할 줄 알고, 세상의 다양한 것들로부터 얻는 영감을 놓치지 않는다.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매일같이 보던 친구였지만 수능이 끝나고, 졸업을 하고, 각자 선택한 서로 다른 길을 걸을 거라는 생각에, 10년 전 참 슬퍼했던 때가 있다. 예상대로 10년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우리는 종종 만나 함께한다. 슬픔이 모두 가신 것은 아니다.

*


무더운 여름이다. 한번쯤 비가 올 때도 되었다. 기우제를 지내야겠다. 뜬금없을 수 있지만 이 글은 사실 기우제를 위한 축문이다. 태풍 종다리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제사장은 피아니스트 Kissin에게 위임하겠다.
 음악은 Glinka 작곡/Balakirev 편곡의
『 The Lark 』
 : 우리말로 종달새, 종다리.



 


[하수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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