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엄친아이면서, 엄친아일수 없었던 어린 시절의 나를 보내주는 글 [기타]

글 입력 2018.07.26 20:47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어떤 면에서든 완벽해 보이고 싶었다. 나는 모두가 부러워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약 5년에서 10년 전, 나의 초중고 학창시절의 유행어는 ‘엄친아’였다.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예쁘고 돈도 많은 엄마 친구의 아들, 아이라는 뜻인데 요즘 아이들도 아는 단어일지는 모르겠다. 나는 ‘엄친아’이자 엄친아가 아니었다.

나는 우리 집안에서 유일하게 머리가 나쁜 자식이었다. 언니는 어릴 때부터 천부적인 머리를 타고났다. 작은 경상도의 시골 동네의 한 학년에 3학급밖에 없는 시골 학교인데도 워낙 공부를 잘해서 경상남도 교육감의 상을 받을 정도였다. 동생도 머리가 좋아서 초등학교 때 아이큐검사를 했을 때 130가량 나왔고, 공부를 벼락치기로 대충 해도 모든 과목을 만점을 받을 정도로 머리가 좋았다. 같은 아이큐 검사에서 나는 85가 나왔다. 누군가 나에게 원숭이나 고릴라 아니냐고 놀렸었는데, 그 말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말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나에게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머리가 나쁘다’라는 건 나에겐 잊을 수 없는 주홍글씨와도 같다.

가정 형편상 학원에 다니지 못했다. 초등학생 때 친구들이 모두 체르니를 칠 수 있을 때 나는 체르니가 뭔지도 몰랐다. 모두가 빨간 펜 학습지를 할 때도 그게 뭔지 몰랐고, 다들 다니는 학원도 몰라서 늘 소외감을 느꼈다. 그 정도면 못 사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잘 사는 편도 아닌 집에서, 지독한 구두쇠인 엄마는 학원을 가지 않아도 충분히 혼자 할 수 있다면서 내 능력보다 더 과한 공부를 늘 시켰었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 늘 눈물을 머금고 같은 문제를 풀고, 또 풀고 다시 풀고 6번쯤 반복하다 보면 외워버렸다. 그런 노력으로 남들을 따라잡았다. 복습은 수업 끝나고 기본으로 했고 필기도 여러 번 새로 해가면서 외웠다.





한번, 고등학교 영어수업 때의 일이다. 영어 선생님께서 듣기 문제를 다 같이 풀자며 듣기 스크립트를 한번 틀어주셨다. 나는 이미 예습으로 수백 번도 더 들어본 MP3 파일이었다. 그리고 이미 내 교과서는 그렇게 풀어본 흔적으로 너덜거릴 정도였다. 다 듣고 나서 선생님께서 나에게 답이 왜 그거냐고 질문을 하셨고, 나는 듣기 스크립트에서 이렇게 말했다며 한 문장 전체를 외운 그대로 말했다. 다들 무척이나 놀랐다. 한번 듣고 다 외워버린 천재인 줄 알았다. 우리 엄마가 학교에 오면 늘 인기가 제일 많았다. 애가 전교 1등을 하니 어떻게 하면 1등을 하느냐, 어느 학원, 어느 과외선생님께 부탁하면 성적이 오를지 아줌마들이 열 몇 명이 모여서 다 물어보고 있었다. 우리 엄마인 건 어떻게 알았는지, 얼굴이 전혀 닮지도 않았는데 아줌마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나는 모양이었다.

그냥 공부 이외에 수행평가 준비도 열심히 했다. 머리는 머리대로 나빴고 그렇다고 다른 능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2단 뛰기 30개 하기가 체육 수행평가로 나왔을 때도 노력으로 만점을 받았다. 2단 뛰기를 하나도 못했었지만, 매일매일 손목을 빠르게 돌리고 오래 뛰는 연습을 해서 결국은 성공한 것이다. 남들은 내가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타고나게 잘하는 줄 알았고 나는 그런 가면을 쓰고 고등학생까지 학창시절을 보냈다. 모두에게 잘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사는 삶이었다. 노래방에 가서도 면접 보는 느낌으로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부르면서도 친구들이 재밌어하는지 아닌지 늘 반응을 살폈다. 트로트를 부르거나 ‘내 꿈은 슛돌이’ 노래를 부르면 다들 웃으며 즐거워했기 때문에 그런 노래를 골라서 불렀다. 재밌는 것이 없었다.

아, 유일하게 하나 진짜 잘하는 건 있었다. 그림은 잘 그렸다. 손이 예민했다고 해야 하나, 친구들 초상화를 그려주거나, 만화를 그리는 게 내 취미였다. 하지만 그것도 유일하게 내가 타고난 것은 아니었다. 언니와 동생 모두 그림을 잘 그렸다. 결국, 언니는 시각디자인, 나는 건축학과, 동생은 영상애니메이션과로 전공을 정하게 되었다. 건축학과에 가서도 나는 특출난 것이 없이 다들 그림을 잘 그렸다. 다 공부를 잘 하는 아이들 속에서 그림도 잘 그리는 아이들, 그리고 그 속에서 나는 더는 뛰어난 것 없는 인생, 더는 돋보일 거리도 없었다. 회의감을 많이 느꼈다.





그렇지만, 그제야 나는 진정으로 ‘엄친아’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남들에게 칭찬을 받거나 엄마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닌, 내가 해 본 적 없고 하고 싶은 일들을 조금씩 시도해봤다. 스트릿 댄스를 배워서 무대에도 올라봤다. 보통 여자들이 선호하지 않는 장르인 비보이를 배웠다. 나는 두 명밖에 되지 않는 비걸 중 한 명이라 선배들의 호기심을 많이 샀는데, 하다 보니 내가 또 관심을 두기 위해서 비보잉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습이 재밌지 않고, 비걸인 스스로에 도취할 때쯤 스트릿댄스를 그만뒀다. 남에게서 나의 가치를 찾고 싶지 않았다. 술을 좋아했기 때문에 술 공부도 했다. 칵테일을 만드는 국가 유일 자격증도 취득했는데 건강상 술을 끊는 바람에 더는 즐기지 못하게 되어 관심을 잃어버렸다. 엠티를 가서 친구들을 위해 칵테일을 만들어주기도 했는데 나는 또 그런 능력이 있어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그런 정체성을 만들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염증이 생기기도 했다. 돋보이고 싶지 않다. 그냥 나 혼자 소소하게 즐기고 싶었다.


KakaoTalk_20180726_203755913.jpg
 

그렇게 시작하게 된 게 홈트레이닝이다. 처음 몇 달간은 친구들에게도 운동한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남몰래 하루에 1시간씩 운동을 시작했고 내 삶의 유일한 활력소가 되었다. 그다지 특별하지도 않지만 그렇게 평범하지도 않은, 그저 내 건강을 위한 취미생활이 생겼다.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있으면 근육을 움직이며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보낸다. 누군가에게 자랑하기 위한 게 아닌 오직 나 자신을 위한 행위. 처음에는 맨몸으로 하다가, 1KG의 아령을 사서 몇 달간 연습하다가 이제는 4KG의 덤블벨을 들고 운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미친 듯이 흐르는 땀을 견디며, 따가운 눈을 깜빡거리면서 나는 드디어 나를 찾았다.


[박지수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19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