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의 너] 모두 다른 것, 하나만 다른 것, 모두 같은 것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거, 있어요?
글 입력 2018.07.29 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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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재미로 MBTI검사를 했다. ‘INFP’형이 나왔다. ‘열정적인 중재자’라니, 중학생 때 ‘ESTP’가 나왔던 걸 정확히 기억한다. 이렇게나 성격이 확 바뀔수도 있는 건가? 물론 10여년이 흘렀다고는 하지만, 이렇게나 정 반대로? 그런데, 아니, 다시. ‘중재자’라니. 최근 몇 주간 내게 꽤 중요한 이슈가 아니었던가. INFP형에 속하는 허구인물 중 나의 ‘최애’ 캐릭터 ‘빨강머리 앤’이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기뻐하기도 전에, 지난날 있었던 일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001. 아니,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아니,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라고 H가 말할 때마다, 생각했다. 내가 말하는 게 중요하지 않으면, 대체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하지? 한두 번도 아니고 매번 이러면. 가벼운 절망감이 든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리고 회의를 하던 어느 월요일, 또 그 말을 들은 순간, 결국 참지 못하고 말했다. 조금은 격앙된 상태로,
 
"매번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저에게는 그 주제가 중요해요. 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걸 중요하지 않다고 하시면 저는 앞으로 어떤 말을 해야 하죠?"
 
이제껏 질문을 참았던 이유는, 아무래도 남의 의견에 그렇게 반응하는 게 H의 습관인 것 같기도 했어서, 사람의 습관까지 내가 뭐라 할 수는 없으니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리고 내가 본질을 흐리는 말을 하기도 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그 날 만큼은 어떤 문제를 겪고 있는 당사자는 분명 ‘나’였던 상황에서, 바로 그런 내게 의논이 필요한 이야기를 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아니,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라는 말을 들었던 것이라,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화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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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에는 다 같이 맛있는 닭갈비도 먹었었는데, 맛있는 게 다 무슨 소용이람. 엄마 생신 선물로 준비한 꽃다발을 안고, 석양에 비치는 꽃잎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한편으론 굉장히 아름답지 못했던, 서툴게 반응했던 내 모습을 곱씹었다.  INFP형 설명에 있던 문장, ‘논리적이지 못하고 감정적이다.’, ‘감정조절 자체는 오히려 능숙한 편이지만, 정서가 워낙 복잡해 남들 눈엔 감정조절이 미성숙해 보이기 쉽다.’ 가 그대로 들어맞는구나, 이제 보니 이해가 된다.



#002. 의견을 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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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트한 일정에 맞춰 에코백을 만들어야 했는데, 내부에서 의견이 갈렸다. 그래, 고백하자면 B의 의견을 들을 땐 그게 맞다고 생각했고, H의 말도 맞다고 생각했다. 그 의견을, 담당자인 내가 제때에 수용하지 못했고, 제작 일정이 부족해 결국 에코백 제작은 무산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H는 내게 말했다. "S씨도 의견을 내야 한다"고.
 
"네"라고 힘빠진 대답을 했지만, 사실 그 말을 하는 H가 너무나 얄미웠다. 내 의견은 중요하지 않다며. 그런데 무슨 의견을 내라는 거야. 이게 무슨 자기 모순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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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그 일이 있은 후, 오야꼬동과 부산 밀면, 이 두 끼를 먹는 사이에 문제를 조금씩 해결했다.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을 가진 채, 평소처럼 일하다 문득 H에게 솔직하게 물었다. 내 의견을 말하는 족족 잘리는데, 내 의견을 내가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느냐고, 대체 무슨 의견을 바라시냐고. 그러자 H는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만한 의견'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 말도 일리가 있었지만, 솔직히 명확하게 와 닿는 표현은 아니었다.

사람들의 의견이 갈리는 상황에서, 내가 생각하는 최선은 의견을 있는 대로 받고, 정리하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그렇게 정리한 의견이 '내 의견'은 아니냐 되물었다. 서로 다른 의견이 속출할 때, 뾰족한 새로운 의견을 다시 들이미는 것 보다 당신들의 의견을 나는 최대한 반영하기 위해 의견을 모으고 싶다고.

(그리고 아직은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내가 당신들의 의견을 무너뜨릴 만한 좋은 의견을 내거나, 그럴 권리가 없게 느껴지기도, 그리고 사실은 당신도 내 의견을 수용하지 않는 날이 많다고, 이런 상황에서 내가 뭘 더 할 수 있겠느냐고. 물론 이 말들은 하지 않았다.)
 
생각에서 행동이 나오는 줄 알았는데 거꾸로 지난날 내 행동을 되돌아보고, 왜 그렇게 해야만 했는지 알게 되다니. 내 주장을 펴기보다 주장 강한 당신들의 생각을 잘 반영하도록 중재하고 노력하는 것도 내 의견일 수 있다고, 스스로를 변호하는 근거가 더 탄탄해졌다. 자기 합리화인지 아닌지는 조금 더 지나봐야 알 것 같지만.



#003. 모두가 다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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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많았던 날, H가 말했다. "스트레스 받으니, 기름진 거 먹으러 갈까요?" 그러자 내가, "스트레스 받을 땐 매운 거 아닌가요?" 옆에서 우리 둘의 대화를 듣던 J는 정말로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단 거 아니예요?"



#004. 하나만 다른 것
 
점심을 먹고 카페에서, 문득 J에게 물었다. "그런거 있어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 생각하는 거." J가 나에게 말했다. 예전에도 그렇고 그런 질문 잘 하신다고. 삶의 목표가 뭐냐고 묻지 않으셨냐고. 나는, 내가 그런 말을 했었냐며 멋쩍게 웃었다. 그런데 별 생각 없이 정말 가볍게 물어본 것이었노라, 해명하고 사과했다. 그런 질문을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J는 ‘재미’라고 답했다. H는 ‘지루하지 않은 것’이라 했다. 둘은 비슷한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구나.

나는 사실 재미 없어도 되고, 지루해도 좋은데, 아니 어쩌면 나는 지루한 걸 조금 즐기는 편인지도 모르는데. 새로운 것보다, 혹은 새로운 걸 찾아내는 것보다 하나를 지루하게 들여다 보고, 또 보고, 또 보는 걸 좋아하는데. 적어도 지금 맡은 일을 잘 해내려면, 새로운 것, 트렌드에 촉을 세워야 한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걸 캐치하고 잡지나 책, 콘퍼런스에 걸맞는 콘텐츠로 만들어야 한다. 아, 나는 적성에 안 맞는 일을 하고 있는 걸까.



#005. 3,6,9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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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9의 법칙을 아시는지. 회사를 다닐 때 그만두고 싶은 순간이 3개월, 6개월, 9개월에 한번씩 3개월 단위로 찾아온다는 것이다. (전 직장에 다닐 때 동료는 그걸 3시간, 6시간, 9시간이라 표현하기도 했지만.) 퇴근 후 문득 내다 본 풍경이 눈부시게 아름다워도, 회사에 있는 유기농 토마토가 달달해도, 그런 위기는 찾아 온다.
 
3개월을 다 채워가는 즈음, “나보다 이 일을 더 잘 해낼 사람이 있을 것 같아.”라는, 생각이라기보다, 완벽한 문장이 머릿속에 한 번 떠오른 뒤로 약 2주간, 이 문장에 아예 사로잡혀버렸다. 태생적으로 직장생활이 잘 맞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마는, 아무튼 '나는 직장생활 자체가 아닌 건가' 따위의 생각을 하면서. 이렇게 한 번 떠오른 생각을 제대로 정리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해법은, 날 것 그대로의 생각을 주변에 조금씩 흘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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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하다 보면, 조금 재밌는 현상이 벌어진다. 사람마다 서로 다른 조언을 해 준다는 것.

일단, 귀여운 J는 내 말을 듣더니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아니예요, 그렇지 않아요."라고 얘기했다. '자매링'을 맞춘,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네가 아직 이만큼(손 한 뼘을 재며)의 생각밖에 못 하는 걸 수도 있는데, 그 생각이 조금 더 넓어지길 기다려봐."라고 조언했다. 처음 만난, 내가 아주 좋아하는 사진 작가는 "글쎄요, 꼭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도록 기다려야 할까요? S씨가 하는 생각을 끝까지 밀고 나갈 수도 있는 거죠." 라고 말했다. 아주 맛난 만두 전골을 먹은 뒤 H에게도 이 고민을 털어놓았는데, "저도 그랬어요. 그런 생각이 들 때는 어쩔 수 없는데, 참다 보면 지나가더라고요." 공감해주었다.
 
그런데 의외로 이 고민을 털어놓지 않았던 상사 B와의 대화가 도움이 됐다. B는 한 번 변화를 꿈꿀 때도 있고, 그렇게 맞이한 변화를 아주 오랜 기간 꾸준히 끌고 가야 할 필요가 있다는 말을 했다. 즉, '견뎌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웠다. 나는 늘 변화를 꿈꾸려고만 했지, 그 변화를 온전히 겪어냈던 적이 있었던가, 싶어서. 그렇게 7월, 갈 곳 없이 헤매던 방황은 잠시 소강상태다. 내 고민을 들고 조언해주었던, 그리고 예기치 못한 도움을 준 모두에게, 감사합니다.



#006. 모두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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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스스로도 새로운 것에 관심이 없다는 걸 알아서, 굉장히 큰 의지를 들여 시작했던 브랜드 워크샵. 이제 'WRAP-UP'단계를 앞두고 오랜만에 모였다. 그런데 MBTI 성격 유형에서 다섯 명 모두 NF가 겹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유형으로 따지면 '외교형'.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서로 신기해하면서도, 그래서 우리가 같은 자리에 비슷한 흥미로 모였나봐요, 누가 토요일 아침 10시에 꼬박 한 달을 모여 앉아 있겠어요, 하하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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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어진 저녁 식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거 있어요?" 익숙한 내용의 질문을 듣고 귀를 의심했다. 이번에는, 내가 던진 질문은 아니었다.
 
질문도 비슷하구나. 그리고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또 누군가, "저는 사실 이런 오글거리는 대화 좋아해요."하길래, "이게 오글거린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는데요, 저는?"질세라 받아치며 웃었다. 그러게. '인생에서 중요한 것'을 이야기하는 일이 오글거린다고 생각하는 쪽, 아닌 쪽, 그 어느 쪽도 정답은 아니지, 하지만 서로가 같음을 느낄 때 마음이 편해지는 건 사실이다. 안도감을 느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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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예 안도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니, H와 J와 S는, 모두 아이스 카페라떼를 마신다.



#007. (다른 의미로)모두 같은 것

브랜딩 워크샵에서 '좋은 브랜드'에 대해 각자의 정의를 내려 보았다. 브랜딩이 '잘 되었다'는 판단 기준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바로 '일관성'이라고 입을 모았다.

회사에서도 비슷한 배움을 하는 중. 로고 리뉴얼 후 상사로부터 "이 로고를 사람들이 지겹다고 느낄 때까지 써라"는 지시를 받았다. 홈페이지에서도, SNS채널에서도, 여러가지 홍보물에서도 똑같은 로고를 계속해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겹다'는 말을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일관성 있는'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지겨울 정도로 일관적인 태도가 곧, 회사의 브랜드가 된다. 단순하지만 어려울 수도 있다. 이 행동을 잘 해내는 브랜드가 많지 않다는 걸 브랜드 워크샵을 통해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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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지겨움'이란,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는 건 아닐 테다. 20년째 창 밖을 통해 보이는 풍경이 나는 어쩐지 지겹지 않다. 매일 새롭다. 똑같이 반복되는데도 비슷한 풍경에서 다이나믹한 변화가, 나만 아는 변화가 있기 때문이다. 브랜딩도 그렇지 않을까, 모두 같아 보이는 풍경에서 흥미로운 변주를 해 내는 것, 아 빨리 그런 경지에 올랐으면 좋겠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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