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소공녀의 집을 찾아주세요 [영화, 도서]

동명의 소설과 영화 속 소공녀들의 같지만 다른 이야기
글 입력 2018.07.29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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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소공녀’의 감독 전고운은 동명의 소설을 읽어 보지 않은 상태로 제목을 지었다. 이유는 하루아침에 집을 잃고 하녀처럼 살게 됐다는 점이 같아서였다. ‘빅이슈’ 잡지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소공녀’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이미지를 부수고 싶어서 라고도 언급했다.

소설 소공녀의 주인공 사라와 영화 소공녀의 주인공 미소는 앞서 말했듯 자기는 변한 게 없는데 주변 모든 것이 변하는 비극적인 상황과 마주한다. 그 둘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원래 모습을 잃지 않는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하는 일은 식모 살이 일지라도 언제나 예의 바르며, 확고한 취향을 고수한다. 사라는 공주 놀이고 미소는 술, 담배다. 두 대상이 조금 괴리가 있긴 하지만 그 둘을 모든 행동의 우선 가치로 두는 것만큼은 비슷하다. 스스로를 못 챙기는 한이 있어도 주변 사람들을 돕는 걸 좋아하며 어떠한 방식으로든 그들에게 영향을 크게 미친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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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소공녀의 주인공 '미소'


그럼에도 그 둘은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르다. 모든 상황이 사라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소설과 달리 영화 속 미소는 무던하다. 원래도 완벽했지만 역경과 고난을 딛고 더 완벽해지는 사라와 달리 미소는 이미 완성된 캐릭터로, 영화 속에서 성장하는 것은 그가 아닌 그의 주변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미소는 주인공이지만 단조로우며 부각되는 것은 주변 사람들의 캐릭터성이다. 이런 차이가 생긴 이유는 사라의 경우 자신이 원하지 않는 시련이 발생한 것이지만 미소는 그 모든 상황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미소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으며 집을 포기한 것은 스스로의 선택이었다. 이상향에 목매거나 더 높은 어떤 것을 꿈꾸지 않고 자신이 현재 사랑하는 것들을 위해 오히려 미래를 포기했다. 자신이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제일 낮은 위치에 있음을 자각하고 있고 주변 사람들에게서 결국 모두 내쳐지지만 결국 혼자 어떻게든 살아가게 된다. 그에 비해 사라는 자신이 신분이 높은 사람임을 잊지 않으며 이것이 시련일 뿐이고 언제든 다시 그 신분으로 복귀할 수 있음을 믿고 있다. 아빠의 재산으로 얻은 위치인 만큼 그의 죽음으로 상황이 변화되었지만 결국 타인을 통해 역경을 극복한다.

운 좋게도 없었던 것 같았던 다이아 광산은 진짜였고 우연히 그 재산을 소유한 아빠 친구 옆집에 살게 된다. 사라는 상황 속에서 주도권을 가진 존재가 아니다. 힘든 삶을 열심히 살아가긴 하지만 절대 만족하지 못하고 상상 속에서만 살아갈 뿐이다. (노력해서 상황을 역전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신분제 사회의 한계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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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소공녀의 주인공 '사라'
 

주변 사람들은 미소를 한심하고, 염치 없고, 사정이 딱한 사람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현실을 부정하거나 무언가를 바라고 구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현재 모습을 사랑하고 그를 부정하거나 떠나가는, 미래를 바라보는 이들을 말 없이 이해해 주거나 배신자라고 부를 뿐이다. (배신자라는 단어 선택에서 그녀가 타인과 자신이 다른 선 상에 서 있음을 잘 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라는 자신의 현실을 덤덤히 받아들이지만 사실 주변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높은 사람으로 대한다. 그녀를 하대하는 조리사도, 학원 원장도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높은 사람으로 생각하며 오히려 괘씸해서 그녀를 더 괴롭히는 모습을 보인다.

쌓아 놓았던 높은 사회적 평판 덕분에 그녀를 모시던 사람들은 계속해서 그녀를 높은 사람처럼 대하며 그녀를 모르던 사람들도 그녀의 행동거지 덕분에 그녀를 여느 거지와 동급으로 여기지 않는다. 더군다나 그녀의 뛰어난 지적 능력 덕분에 인도어를 쓸 수 있었고, 그것에 기인하여 도움을 받았으며 결국 재산도 되찾아 다시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어 원 지위로 복귀하게 되었다. 재미있게도 주변 사람들, 그녀 자신, 그리고 독자까지도 역시 그녀가 그렇게 될 줄 알았다는 반응을 보이게 된다.

사라는 동화 속 주인공으로 “독자들이 되고 싶어하는 인물”이다. 독자가 자신과 대입하여 꿈을 꿀 수 있게 하며 선입견 그 자체이지만, 현실적으로는 한 번쯤 살아 보고 싶은 삶이다. 반대로 미소는 독자들의 선입견과 반대되는 인물로, 그들이 “되고 싶진 않지만 동경할 수는 있는 인물”이다. 집을 위해 자신만의 행복을 포기한 많은 사람들이 그녀만의 행복의 기준과 그를 실천할 수 있는 과감함을 닮고 싶어 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한다면 그녀의 삶은 부정당할 수밖에 없다.

생각해 보면 항상 수동적이기만 했던 사라와 달리, 미소는 대단하다. 사회적으로 이해되지 않을 그녀만의 우선 순위를 가졌고 그에 수반되는 따가운 눈총들과 비난들에 연연하지 않는다. 타인의 시선 속에서 자유로운 삶이란 대단한 용기이므로, 그녀는 멋지게 보인다. 하지만 내가 그녀의 삶이 멋지게 보일 뿐 “멋지다”라 표현하지 않는 이유는 솔직히 말해 나는 영원히 그녀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리뷰들은 그녀의 삶을 멋지다고 말한다. 자신이 평생 할 수 없을 것 같은 선택을 해냈고 어찌 됐든 자신의 선택에 따라 잘 살아가고 있으니까 생긴 동경이다. 그런데 남들과 다르다고 모두 멋진 것은 아니다. “어쩌면 자의적으로 거지가 된 여자 홈리스”라는 일종의 고유 명사를 다르게 표현하려 노력했고 그것이 성공했다는 부분에서 미소는 영화 주인공으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공격받기 쉬우며 심지어 현실 탈피의 의지조차 없는 한심한 존재였던 그를 멋지게 보이게 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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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감히 말하겠다. 나는 솔직히 그녀가 좀 이기적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취향을 지키는 건 어디까지나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선 안에서이어야만 한다고 여기기에 자신의 것이 아닌 타인의 주거지에 기생하는 삶이란 겉보기엔 독립적이어도 결국 가장 종속적인 삶이다. 나가라 하면 나가야 하고, 뭘 하든 눈치를 봐야 하는 미소의 삶은 주체적이라고 볼 수 없다. 위스키와 담배에 만족하는 삶이란 요새의 트렌드인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과 근접해 보이지만 사실은 심하게 말해 노예의 삶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작은 현재의 만족을 위해 자신의 자유를 판 삶. 주거지란 다시 말해 개인이 자유를 확보할 수 있는 영역의 정도이며 개인의 취향이란 그 속에서만 우선 순위가 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누구도 미소를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지만, 미소는 당연하게도 타인의 영역 속에서 그의 간섭을 기꺼이 수용해야만 한다. 남의 둥지에서 깨어난 뻐꾸기는 원래 있던 둥지 속 아기 새들의 먹이를 뺏어 먹으며 자란다. 우리가 그를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미소를 바라본 것뿐이다. 인간에겐 함께 살아가기 위해 유지해야 하는 적정량의 거리가 존재한다고 한다. 그렇기에 사회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위해서라도 각자의 영역을 확보해야만 한다. 미소가 멋져 보이는 이유는 단지 지금의 사회가 그 영역 조금을 얻기가 너무 버거운, 각박한 곳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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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사는 곳이란 모두 집이 될 수 있는 것일까?
[내 집 마련 욕구에 대한 2001년→2016년 인식 변화
(단위=%, 자료=트렌드모니터)]


우리는 모두 집에서 산다. 그 곳은 온전히 내 것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몸을 누일 공간 조금 일수도, 혼자 살기엔 벅찬 궁궐 일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영역에서조차 자유로울 수 없다. 파도처럼 밀리고 밀려나는 것을 반복하며 그 속의 조개처럼 끊임없이 이동한다. 그것은 추억 때문 일수도 경제적 사정 때문 일수도 혹은 욕심 때문 일수도 있다. 이렇게 많은 경우의 수 사이 가장 최악의 상황에서도 결국 사라는 기숙학원에서, 미소는 친구 집에서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 갔다. 나는 가장 “나”다울 수 있는 곳이 바로 집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살았던 공간은 집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그 속에서 보낸 시간들 덕에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그들 스스로를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우리는 집이 있기에 “삶”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언제나 집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집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라와 미소와 또 다른 수많은 소공녀들은 그래도 어떻게든 어디선가에서 살아가고 있을 테지만, 그래도 그들에겐 “진짜” 집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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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혜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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