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가상과 현실로 본 시대의 미학. 중세와 근대, 그리고 우리에게 남겨진 난제 [도서]

글 입력 2018.07.31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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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을 넘어 - 초월적 세계를 바라보는 중세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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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티노스(205 - 270). 고대 그리스


우리가 중세 예술에서 주목할만한 인물은 신플라톤주의자인 플로티노스다. 그는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어딘가에 완전한 세계가 있다고 보면서도 이데아(근원적인 일자로써의)로부터 자연세계가 번져나온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우리 세계가 불완전하다고 보면서도, 이 세계가 이데아의 복사본 내지는 그림자라고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플라톤과 차이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플라톤이 이 세계가 불완전한 이유를 완전한 세계(이데아)의 복사본인 데에서 찾았다면, 플로티노스는 그 이유를 완전한 일자가 그 성질을 간직한 채로 번져나온 데에서 찾았다.

가시적인 자연세계보다는 영혼이, 영혼보다는 정신이 더 진리에 가까운 것은 맞지만 플로티노스가 생각하기에 예술은 예술가의 정신에서 나오는 것이다. 플라톤이 생각하는 것처럼 예술이 이데아의 복사본인 자연세계를 또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렇기에 예술가의 정신에서 나오는 예술은 자연세계보다 더 고차원적이며 일자에 가깝다. 그러니까 플라톤에게는 이데아 > 감각세계 > 예술의 위계가 성립된다면, 플로티노스에겐 이데아(일자) > 예술 > 감각세계의 위계가 성립하는 것이다. 예술가는 자연세계에 있는 질료(재료)로 예술 작품을 만들지만, 형상(그가 만들고자 하는 형태)은 그의 머릿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예술은 단순히 자연세계에서 보이는 사물의 외관을 그대로 묘사하는 게 아니다. 예술가는 자기 '내면의 형상'에 따라 창작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플로티노스는 예술의 위상을 끌어올렸다.

따라서 플로티노스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예술은 시각 조건에 따른 우연적인 변화를 배제하고, 대상의 빛나는 측면, 다시 말해 감각적인 것에서 벗어나 일자에 더 가까운 정신적인 측면을 묘사하는 것이다. 뭔가 떠오르지 않나? 그렇다. 이집트 예술과 흡사하다. 그가 생각하는 예술은 오히려 우리가 쉽게 확인할 수 없는 사물의 본질까지 드러내는 식으로 자연을 보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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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타폴리나레 인 클라세 성당
원근법이 무시되어 그림 속 개체들이
공중에 떠있는 듯 하다


플로티노스 본인은 기독교 사상을 반대했지만 그의 정신은 후에 중세 예술의 핵심이 되었다. 저자에 의하면 중세 미학은 기독교적으로 해석된 플로티노스이다. 초월적인 일자, 신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빛, 정신세계의 아름다움을 담아내고자 했다는 점에서 중세 회화는 수적인 비례보다 질적인 것을 추구했고, 이에 따라 자연 모방을 벗어나 자유로운 구성을 취했다는 점에서 플로티노스를 계승한다. 자연의 모방이 아닌, 내면 형상의 실현.

중세의 성당 양식이 보는 이로 하여금 다른 세계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도록 지어지지 않았던가. 현실에서는 본 적 없는. 성경을 읽을 줄 모르는 이들도 신을 믿고 환상에 젖게 만드는. 이렇게 대상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구성은 곧 현대회화의 원리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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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주의 지배자 그리스도 >(모자이크)
몬레알레 대성당. 1182년


그러나 중세 후기의 예술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전복된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라 형상이 자연세계에 있다고 본다. 그의 생각은 이렇다. 자연세계는 신이 만든 것이니 자연세계에 신의 섭리가 불완전하게나마 녹아있다. 그러니 예술가가 다루는 질료 안에 그가 만들고자 하는 형상이 내재되어 있다. 따라서 자연을 모방하는 것에서 예술의 가치를 충분히 찾을 수 있다. 얘기가 이렇게 된다면 예술은 플라톤이 비판한 것처럼 모방의 모방일 뿐이지만 예술이 인간의 '이성적 행위'라는 것에서 중세 후기 예술은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신의 섭리가 반영된 성스러운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처럼 이데아와 같은 초월적 세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아리스토텔레스적으로 해석된 기독교는 자연의 질서 자체에 신의 질서가 있다고 보게 되었다. 플라톤으로부터 플로티노스, 그리고 이 글에서는 언급하지 않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로까지 전승되어온 미학적 사고방식이 자연과 감각을 하위적인 것으로 보고 (그보다는 더 진리에 가까운)정신적 형상을 자연의 질료를 활용해 실현해냈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을 계승한 아퀴나스는 자연 묘사의 의미를 되살려낸 것이다. 이렇듯 중세 기독교와 같은 시대의 새로운 재설정 작업은 그 전 시대의 관점을 어떻게 차용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고, 실현된다. 기독교 교리와 같은 새로운 문화는 기존 관점을 통한 해석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역시 미의 기준이 이성적이며, 객관적임을 전제한다. 미에 이러한 이해는 사실상 르네상스까지 계속 된다.



미란 무엇인가 - 객관과 주관의 갈등. 근대

르네상스에 접어들어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의 시대가 되었다. 다빈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아 과학적 관찰과 실험에 관심이 있었다면 미켈란젤로는 신플라톤주의에 영향을 받았다. 플로티노스가 주장했듯 미켈란젤로 역시 예술이 자연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 아닌, 예술가의 영감(내면적 형상)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본 것이다. 또, 미켈란젤로는 예술에 적용되는 보편법칙이 있다고 본 다빈치와는 달리 예술에 보편적인 법칙이 없다고 여겼다. 이것은 예술에 대한 최초의 근대적 관념이었다. 아름다움은 예술가의 내면에서 우러나온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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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 파울 루벤스. < 유아 대학살 >. 1637년
역동적이고, 입체적이고, 배경에 대상이 녹아있고,
그림이 바깥 상황과 연결되어 있는 듯 잘려있다


17세기의 바로크 시대에 접어들면 더욱 격정적이고 역동적인 표현을 가진 작품들이 등장하게 된다. 루벤스가 그 대표적인 예다. 르네상스와 고전주의 회화가 평면적이고, 윤곽선을 강조하고, 그림의 대상들이 배경과 뚜렷이 구분되어있다면 바로크 회화는 입체적이고, 윤곽선이 불분명하며 그림이 마치 바깥 상황과 연결되어있는 듯한 '열린 형식'을 갖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17세기의 작품이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에서는 푸생을 필두로 고전주의의 '이성적 예술'로의 복고를 주장하는 흐름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17세기 유럽엔 바로크 양식의 '감정의 예술'과 '이성의 예술'이 대립하고 있었다. 이렇게 예술은 점점 감성의 문제로 다뤄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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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 푸생. < 아르카디아의 목자들 >. 1640년
위의 그림에 비해 상황이 그림 안에 완결되어 있고,
정적이고 평면적 느낌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익숙한 시각적 쾌감으로써의 예술은 언제 등장하는 걸까? 저자는 영국의 취미론에서 그 시작점을 찾는다. 이 취미론은 칸트에서 완결되는데, 저자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가 예술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은 대부분 칸트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미 자체는 사물의 객관적 속성이 아니며, 주관의 판단에 불과하다는 것. 우리가 암묵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생각이 아닌가. 칸트는 이에 더해 예술은 그 내용의 목적성으로 판단되어서는 안된다고 본다. 이상적인 비례와 담고자 하는 내용을 중시한 고전 예술가들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지점이다. 이제 예술가는 진리를 전달하거나 규칙을 따르는 장인이 아닌, 스스로 규칙을 만드는 천재로서 이해된다. 근대로 넘어오면서 예술에 대한 기준이 객관으로부터 주관으로 넘어오게 된 것이다.



세계의 구성에 대하여
- 모리츠 에셔와 추상적 연역, < 그리는 손 >과 악마의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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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츠 에셔. < 도마뱀 >. 석판화. 1943년


저자는 매 챕터에 걸쳐 모리츠 에셔의 작품을 소개한다. 에셔는 네덜란드의 판화가로, 수학과 논리학의 난제를 다룬 작품들로 유명하다. 책에서 소개되는 에셔의 작품은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난해한 그림들부터, 무엇인가가 무한히 반복되고 순환되는 듯한 그림, 그리고 현실에서는 절대 성립할 수 없는 구조이지만 눈으로 언뜻 보기에는 자연스러운 그림들이 주를 이룬다. 에셔는 이를 통해 하나의 근원자로부터 추상적 연역의 방식을 통해 세계가 구성되어 가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서양 고대의 공통적인 사고와 맞아떨어지는 감이 있다. 다양한 형태의 피조물들은 근원적 형태의 도형의 모습을 기반으로 하고, 이들은 서로 만나고 없어지기를 반복한다. 자연이 그 근원의 본질을 반영하는 셈인 것이다. 자연은 이데아, 내지는 신으로부터 떨어져나와 그 모습을 간직하고, 그리고 예술가는 그것에서 역으로 세계의 근원을 추상해보고... 무한히 돌고 도는 와중에 세상과 예술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조금씩 변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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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츠 에셔. < 그리는 손 >. 석판화. 1948년
 

이렇게 예술은 가상과 현실이 섞여있는 데에서부터 그 분리로 이행했고, 완전한 가상을 가정해 현실에서 그것을 드러내고자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현실에서 그 완전성의 조각을 찾기도 했고, 마침내는 예술을 목적과 관계 없는 주관의 영역으로 보게 되었다.
 
그러나 저자에 의하면 우리에게는 아직 많은 난제가 남아있다. 우리는 객관성을 논하면서도 여전히 그림을 보면서 무슨 그림이 위대한 그림인지에 대해 누구나 동의할 합의조차 하지 못한다. 미에 대한 주관이 사람마다 다르다고 해도, 그 미적 지각이 어떻게 작동하는 것인지는 아직 제대로 정의되지 않았다. 객관에서 주관으로, 주관에서 객관으로 무한히 이행하는 이 끝없는 전쟁은 < 그리는 손 >과 같다. 주관과 객관 중 어느 한 쪽의 손만을 들어줄 수 없을 만큼 다양하고 복잡한 요소들을 갖고 있기에 예술은 더 어려운 듯 하다. 우리가 예술 작품에 대한 아이의 감상을 무시할 수도 없고, 그것을 비평하는 전문가에게 쉽게 동의하지 못하는 이유도 그 어려움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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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유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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