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1879년과 2018년 사이, 그 간극에 대해서 '노라이즘'

글 입력 2018.07.31 0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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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1879년과 2018년 사이,
그 간극에 대해서


희곡 <인형의 집>과 연극 <노라이즘>을 살피다



140년간 현실도, 작품도 나아진 건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연극 <노라이즘>은 '문제 제기에 그친 각색'이다. 나는 그 '문제'라는 것조차 모호하다고 느꼈다.

헨릭 입센의 대표작이자 '최초의 페미니즘 희곡'으로 평가받는 <인형의 집>을 각색했다기에 무척 궁금했다. 남녀 불평등의 인습에 반항하여 인간으로서의 여성의 지위를 확립하고자 하는 주의. 또는 그런 운동을 의미하는 '노라이즘'을 제목으로 한 만큼 현대의 페미니즘에 대한 통찰력 있는 시선을 기대했다. 하지만 연극 <노라이즘>은 1879년의 <인형의 집>과 별반 다를바 없는 스토리와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 성장해 나가는 '노라'의 모습을 찾을 수도 없었다.

원작을 해석한 것도 아니고 원작을 바탕으로 새로운 극을 창조한 것도 아닌, 이 작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연극을 관람하는 중간 중간 아쉬움이 남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정말 현실이 나아진게 없기 때문에 작품도 1879년의 것에서 더 발전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과연 페미니즘의 역사가 흘러온 지난 140여년의 결과가 이런 모습인걸까?

인상 깊었던 몇 장면을 통해 <노라이즘>을 리뷰하고 '현재의 페미니즘'을 살펴보고자 한다.


노라이즘_포스터.jpg



scene #01 돈 그리고 길듦 (feat. 모빌)


<인형의 집>과 <노라이즘> 속 주인공 '노라'는 남편과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산다. 노라에게 자기 자신은 없다. 가족을 위한 선물을 사고, 살림살이를 꾸린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단 하나가 있다면 그건 바로 '돈'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권력은 돈에 의해 결정된다. 돈을 버는 남자가 곧 권력인 시대인 가부장제 사회에서 노라로 대표되는 여자들은 그저 작은 종달새나 다람쥐로, 귀여운 낭비쟁이 혹은 바보로 여겨지며, 돈이 가진 권력에 길들여 진다. 노라의 남편 직업이 은행장인 것 역시 돈과 권력을 의미한다.

길들여진 노라는 '인형의 집'에서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에 충실하며 맹목적으로 살아간다. 연극 <노라이즘>의 무대는 바로 이 '집' 안인데, 노라와 남편의 관계를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노라는 이 집을 끊임없이 쓸고 닦고, 아이들과 남편을 위한 선물을 정리한다. 특히 아내를 길들이려는 남편의 모습을 의미하는 천장에 달린 '모빌'이 인상적이다. 남편은 아내 노라를 약하고 어리석은 사람, 혹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로 대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헨릭 입센의 <인형의 집>에서 노라는 남편의 인형으로 살다가, 결국은 '돈' 때문에 자아 각성을 이룬다. 남편과 가정을 위해서 해야만 했던 차용 증서 위조 사건에 보인 남편의 반응에 실망하면서 자신의 결혼 생활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기 때문이다. 여성의 경제 활동이 적었던 시기, <인형의 집>은 남편과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순응하는 여성상을 이상적인 것으로 여기던 당시 사회에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scene #02 결혼과 낙태


연극 <노라이즘> 속 노라가 자아를 각성하게 되는 부분은 <인형의 집>과는 조금 다르게 흘러간다. 어느날 노라를 찾아 온 친구는 이혼을 했다고 밝힌다. 안타까워 하는 노라와 달리 친구는 행복해 보이기만 한다. 안정적인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것만이 행복이라고 믿었던 노라에게는 꽤나 큰 충격이었을 거다.

작품 중후반, '아들'을 가지고 싶다는 남편의 압박 속에서 노라의 외마디가 터져나왔다. "그 누구도 아이를 갖는다는 게 이렇게 아프고 힘든건지 얘기해주지 않았잖아"라고. 결국 그녀는 힘들게 간직해온 '낙태'의 비밀을 밝힌다. '낙태'에 관한 논쟁은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뜨겁다. 태아의 생명권과 임산부의 자기결정권 사이에서 서로 의견이 돌고 돈 지 오래다. 어느 한쪽이 옳다 그르다 단정짓기 힘들지만, 여성에게 그들이 받을 고통을 외면한 채 '임신'이라는 의무만을 강요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연극 <노라이즘>이 말하고 싶은 바도 이와 같을 것이다. 단순히 '낙태 찬성'이 아니라,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에 충실하며 맹목적으로 살아온 삶과 그 인습을 타파하고자 하는 것이다. 마침내 자신의 고통을 깨닫고,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자기 발견'을 이룬 노라처럼 말이다.



scene #03 최고의 현모양처를 찾는 리얼리티 쇼


<노라이즘>은 헨릭 입센의 작품을 현재 우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미디어'에 대입시킨 작품이다. 은행장이 될 노라의 남편은 최고의 현모양처를 찾는 TV프로그램에 신청하고, 노라가 모르는 사이 그녀의 생활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된다. 애초에 이러한 구성을 기획한 건 좋은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연출가의 말처럼 연극 <노라이즘>에서 주인공 노라는 미디어에 상품화된 모습으로 각색되었고, 이는 미디어뿐 아니라 사람들이 여성을 어떤 시선으로 재단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를 연출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조금 미흡하지 않았나 싶다. 중간 중간 리얼리티 쇼의 패널들이 나와 '노라 부부'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은 불필요 했고, 솔직히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또한, 마무리 역시 흐지부지 끝나며 '미디어'와 '페미니즘'의 연결고리를 보여줄 수 있는 대사나 장치가 너무 부족했다. 실제 카메라 및 빔 프로젝터를 연결하는 등의 시도는 좋았지만, 이로 인해 연극 전반적으로 흐름이 끊기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아서 조금 아쉬웠다. 충분한 시간을 들여 스토리의 연결과 연출 방식에 개연성을 부여하고, 자신의 문제점을 극복해 나가는 노라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렸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노라이즘_웹전단.jpg



하나의 인간으로 홀로 서는 것


연극 <노라이즘>을 관람하고, 또 연극을 이해하기 위해 헨릭 입센의 명작 <인형의 집>을 읽으며 스스로 계속 질문했다.

그래서 페미니즘이 무엇일까?

내가 내린 결론은 '페미니즘이란 하나의 인간으로 홀로 서는 것'이다. 리뷰를 쓰면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남성을 배척하고 서로 싸우며 여성의 권리만을 주장하는 것은 페미니즘이 아니다. 남성이 아닌, 사회 규념과 싸워야 한다. 권리를 주장하기 전에 우선되어야 할 것은 스스로 주체적인 삶을 쟁취하는 것이다. 하나의 인간으로 홀로 서서 스스로 생각하고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사회와 나, 둘 중 누가 옳은지 확인해 보겠어요."라고 다짐하며 집을 나서는 노라가 되어야 한다.

이미 140여 년 전에 나온 결론을 또 다시 되새겨야 하는 현실이 씁쓸하다. 하지만 그것이 <노라이즘>과 같은 연극, 그리고 <페미니즘 연극제>가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주 조금씩 걸어나가고 있지만, 진정한 페미니즘이 자리잡을 때까지 모두 지치지 않길, 진심으로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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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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