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아빠의 ‘땅 노래’ [여행]

시골에 땅을 사달라, 거기 집짓고 살고 싶다
글 입력 2018.07.31 0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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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어르신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곳은 아주 산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 눈에 잘 띄지 않아 6.25 전쟁 때도 큰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언뜻 무릉도원이 떠오른다. 시골에서 유년기를 보낸 아빠는 도시로 나와 지금껏 생계를 꾸렸지만, 언제나 밭 가꾸고 벌 키우며 사는 것이 꿈이었다. 직장에서 퇴직할 시기가 가까워 오자 아빠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름하여 ‘땅 노래’다. 시골에 땅을 사달라, 거기 집짓고 살고 싶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이 노래는 우리 집에서 실질적으로 경제권을 쥐고 있는 엄마를 향했는데, 어찌나 간절히 또 집요하게 불리었던지 엄마는 나에게 연락을 할 때마다 ‘너희 아빠가 또 땅 노래를 부른다’며 하소연하듯 말했다. 그래서 결국 두 분은 산으로 들로 땅을 보러 한참을 돌아다녔더란다. 그리고 세상과 똑 떨어진 듯 이 비밀스런 산골짜기에 터를 마련한 것이다. 산으로 난 비포장도로를 굽이굽이 돌고 넘으면 그제야 모습을 드러내는 아빠의 집. 이곳은 아빠의 이상이 실현 중인 소우주다. 작은 집과 작은 텃밭, 작은 닭장. 그리고 그 세계를 호위하는 강아지 두 마리와 꿀벌 여러 마리가 있다.

이곳을 나는 좋아한다. 저 멀리 내다보면 겹겹의 산이 수묵화처럼 보이는 여기는 사람들의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곳이면서도 또 다른 자유를 주는 곳이다. 시골의 여름은 어떨지 궁금하기도 하고, 부모님이 보고 싶기도 해서, 봄 이후로 다시 찾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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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럭이는 호박잎


아빠의 텃밭에서 큼지막이 펄럭이는 호박잎과 굵고 튼실한 호박 줄기를 눈으로 따라가다가 단단하고도 유려한 곡선의 결실 -호박- 을 마주하면 감탄하게 된다. 방울토마토, 고추, 포도는 푸른빛을 잃고 서서히 물들어가고 있다. 자기 빛깔을 찾아가는 이 열매들을 보고 있으면 얼마나 아름다운지. 텃밭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는 봉선화가 무리지어 있다. 열매를 건드리면 톡하고 터진다는데, 아직 그 정도로 여물지는 않았나보다. 꽃잎을 조금 얻어서 그늘에 자리를 잡고앉아 발톱에 봉숭아물을 들였다. 이 붉은 빛이 여름 내내 발끝에 남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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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깔을 찾아가는 방울토마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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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숭아 물들이기에 필요한 준비물
- 꽃잎, 돌, 길게 자른 비닐, 물들일 발톱



다른 일을 하고 있는 아빠에게 내가 밭에 있는 식물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본다.
(다급하게 큰소리로) 이것 좀 봐봐! 아빠! 이건 뭐야?
그러면 성가시다는 투의 대답이 돌아온다. ‘이파리 보면 모르나! 냄새 맡아봐라, 방아 이파리!’
나는 방아와 마주한 것이다.

*

방아 잎에는 독특한 향이 있다. 된장찌개 같은 국이나 찜에 방아 잎을 넣으면 그 향이 요리의 맛과 어우러지는 것이 딱 내 취향이다. 그래서 방아를 키워 음식에 넣어 먹어보겠다는 확실한 목표의식을 갖고, 씨앗 가게에서 방아 씨앗을 따로 얻었다. 자취방 안에 화분을 마련해 시골에서 가져온 흙을 담고 거기다 방아 씨를 뿌렸다. 씨앗은 따옴표처럼 작고 귀여웠다. 삼시세끼 챙겨주듯 화분에 물을 주었다. 나흘쯤 지나서였나, ‘8’모양의 초록빛 싹을 발견한 순간은 감동 그 자체였다. 내 방에서 자기도 살아가고 있음을 증명해보인 귀여운 방아는 작은 잎을  한 쌍씩 더 틔워 올리며 키가 자랐다. 햇볕을 쪼이게 해주고 물을 챙겨주고 얼마나 컸는지 들여다보는 것은 내 중요한 일과 중 하나였다. 이름도 지어주었다. 그러자 열심히 키워서 이후에 많이 크더라도 내가 얘의 잎을 따서 먹지는 못하겠다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특별한 방아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주말에 일을 하러 나간 동안 물을 주지 못해서 말라버리고 퇴근 후 물을 주면 다시 되살아나기를 반복하더니, 끝내는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물이 아니라 또 다른 문제가 있었을 수도 있다. 슬픈 날이었다.

시골에서 본 방아는 내가 키우던 것과 차원이 달랐다. 이렇게 무성하게 자랄 수 있다니, 충격적이었다. 땅이 주는 힘을 온전히 받아 바람과 비와 볕에 직접 닿으며 살아가는 방아를 보고는, 그 에너지에 놀랐고 패배감이 들었다. 건방짐을 반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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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의 씩씩한 방아


그렇게 내가 충격에 휩싸여있는 동안 부모님은 분주하시다. 오늘 아빠의 고등학생 시절 친구 분들이 부부동반으로 이곳에 모여 놀다 가실 예정이라 한다. 부모님의 초대로 시골까지 먼 걸음을 한 동창 아저씨들은 반가운 인사를 나눈다. 와 이게 얼마만이냐, 40년만이다, 옛날 얼굴이 남아있네, 너 키가 큰 것 같다, 너는 배가 나온 것 같네 하며. 나는 40년이란 시간의 길이가 피부에 와 닿지 않아 이상한 기분으로 그 광경을 가만히 본다. 다 같이 식사를 하면서 옛 이야기는 끊이지 않는다. 담배 피우다 선생님한테 딱 걸려 혼났던 옛날 얘기를 하며 웃고 떠드는 이 아저씨들은 다시 고등학생이 된 것만 같다. 아빠가 ‘고등학교 때 담임선생님과 연락이 닿았는데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사신다, 오늘 우리 다 같이 모인 김에 이 자리에 선생님을 모시자’며 통보에 가까운 제안을 하자 흥겹던 아저씨들의 표정이 순간 굳는 것을 보고 웃음이 난다. 그렇게 자리에 함께하게 된 선생님은 이제 일흔을 넘기셨다. 고등학생들은 오랜만에 뵙는 선생님께 절을 한다. 선생님 저 부반장이었던 00입니다, 선생님 저는 xx입니다, 하며 소개하는 학생들을 보며 선생님은 과연 40년 전을 떠올려내실 수 있을까? 선생님과 학생들 모두 시간 앞에서 같이 나이가 들었다. 그리고 이제는 둘러앉아 어떻게 지냈는지, 무얼 하며 살고 있는지, 자식 자랑, 자식 걱정 같은 것들을 얘기한다. 아주머니들은 방안에 모여앉아서 남편들이 지금 딱 고등학교 다니던 10대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며 가볍게 흉을 보고는, 역시 무얼 하며 살고 있는지, 자식 자랑, 자식 걱정 같은 얘기를 한다.

소나기가 한차례 시원하게 내리고 난 뒤 맑은 밤하늘에 보름달이 떴다. 마당에 텐트와 모기장을 친 아저씨들은 술과 담소에 한창이다. 모임 이름을 정하자, 회칙을 정하자, 꽤 진지해 보이는 이 대화는 점차 맥락 없이 흘러간다. 취해서 별 의미 없이 주절거리는 아저씨, 친구를 어르고 달래 잠을 재우려는 아저씨... 그러다 모두 잠이 들고 벌레소리와 새소리만 들리는 깊은 밤이 오면 달빛이 머리맡으로 쏟아지는 것을 나는 보았다.

다음날 늦잠을 자고 일어나보니 세상이 눈부시다. 대충 씻고 선크림을 잔뜩 바르고 집 근처를 돌아다녀보았다. 태양은 완벽한 조명이다. 산에서, 나무에서, 풀에서 이보다 더 반짝이는 초록빛을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설레고 신이 난다. 눈앞의 식물을 본다. 조금 걸어가면 또 다른 작품이 있다. 이렇게 독창적인 세계를 가진 작가라니! 생존을 갈망하는 걸작들이 전시된 미술관에 온 것 같았다. 하지만 오만한 생각이다. 애초에 미술관이 자연을 흉내 낸 것이다. 옮기는 걸음마다 놀랍다. 이 순간을 기억하고 싶다. 사진을 찍었는데 성에 안찬다.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

아침식사를 끝낸 아저씨 아주머니들은 이제 떠날 채비를 한다. 아저씨 몇 분은 나에게 용돈을 쥐여주시기도 한다. 에이, 이런 거 안주셔도 되는데 하면서 감사한 마음으로 주머니에 넣는다. 방에 들어가니 서글서글한 인상의 한 아저씨가 벽에 기대앉아 하얀 접이식 부채를 차르륵 펼쳐서 부치며 아빠와 얘기를 나누던 중, 나에게 ‘성실한 남자를 만나야한다’는 조언부터 시작해서 고등학교 졸업 이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같은 반 동창들의 삶에 어떤 예상치 못한 반전이 있었는지 가볍게 풀어놓으신다. 아저씨를 둘러싼 분위기와 풍경이 인상적이어서 그 순간을 사진으로 찍어 남기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카메라가 끼어드는 순간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깨져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이런 순간을 새겨두었다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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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플의 힘을 빌어 스케치화를 거친 사진
- 아주머니,아저씨들 건강하셔야해요!


손님들은 가을에 다시 모일 것을 기약하며 헤어진다. 자녀들이 결혼할 나이가 되었으니 앞으로 결혼식장에서도 계속 보겠다며 즐거워한다. 모임이 파하고 이제 나도 도시의 집으로 돌아간다. 여유 가득한 공간에서 이야기로 빼곡한 시간을 길어갈 수 있어 감사한 여행이다.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잠결에 창밖을 본다. 시골 풍경이 아직 나를 쫓아온다. 도로 옆 전깃줄들이 줄지어 오선지를 이룬다. 이 길을 노래로 채워 넣을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수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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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 dbswnrl
    • 글에서 왠지 시골의 여유로움과 싱그러움이 느껴져요 너무 취향저격입니다... ;)
      영화 리틀포레스트 정말 좋아하는데 글이 영화와 닮은 것 같아요!
       저도 할머니께서 농사를 지으셔서 호박잎 진짜 좋아하는데 방아는 처음 들어보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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