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상한영혼을 위하여, 충분히 흔들릴 수 있도록

글 입력 2018.07.31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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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한 영혼을 위하여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의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후기를 쓰려고 새벽에 노트북을 켰는데 갑자기 나를 뒤흔드는 우울함과 버거움이 찾아왔다. 요즘은 자주, 이렇게 슬픔이 나를 잠식하곤 하는데 뚜욱 뚜욱 기척도 없이 떨어지던 눈물이 이 시를 읽으면 잠잠해지곤 한다. 올해 내내 한창 빠져있는 ASMR 유튜버 영상을 돌려보다가 ‘유서읽기’란 콘텐츠를 발견했다. 그저 잔잔히 구독자들이 보내어온 유서를 유튜버가 읽어내려가는 방식인데 가끔씩 이렇게 버거운 순간들이 찾아올 때 힘이 되어주더라. 이 시 역시 그 곳에서 알게 된 시인데 정신이 아득해질 때 가만히 들여다보면 희한하게 날뛰던 마음이 달래지고 가라앉는 그런 시이다.

시는 말한다.
아무리 상한 갈대여도 뿌리가 깊다면 밑둥이 잘리어도 새순은 돋더라. 하물며 뿌리가 없는 부평초조차 물을 만나면 꽃이 피고, 세상에 물이 없는 곳은 없더라. 결국 영원한 눈물과 비탄은 존재하지 않으며 이 또한 지나가리라.

담담하게 고통의 끝까지 가보자는 극단적인 이 시는 역설적으로 강한 위로가 된다. 결국 그 고통에도 끝은 있을 테니, 결국 다른 가능성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무너져도 흔들려도 결국은 끝이 난다는 그 말이 더욱 굳건해질 수 있는, 존버정신의 계기가 된다.

시를 보며 얼마 전 태풍에 부러져버린 영통의 500년된 느티나무가 떠올랐다. 학교 근처에 있어 오가며 산책길에 자주 마주치던 그 커다란 나무가 태풍에 허물어졌다는 소식은 당황스러웠다. 절대 쓰러지지 않을 듯한 굵은 몸통이 파사삭 부서진 나무의 잔해를 보면서 기분이 묘했다. 무너져버린 나무는 무너져버린 나였다. 다행스럽게도 뿌리가 살아있다고 한다. 그리고 뿌리 주변으로 새순도 돋아나고 있다고 한다. 나무가 제자리로 돌아오기까지 다시 500여 년의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래도 그 나무가 500년을 넘게 살아온 나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나무는 상한 영혼이다. 상한 영혼을 위해, 고정희 시인은 읊었다. 마음껏 흔들리라고, 그 흔들림의 끝에서 결국 뿌리는 살아남고 새순은 돋아날 것이라고. 뿌리가 없는 부평초마저 물을 만나 꽃을 피우리라고. 오늘도 세상엔 상한 영혼을 가진 이들이 넘쳐난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삶의 버거움에 허덕대는 사람들, 삶을 잠식한 슬픔에 무기력해진 사람들, 세상 앞에 약해진 모든 이들에게 이 시를 바친다. 상한 영혼을 위하여. 충분히 흔들릴 수 있기를.


[한나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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