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나의 슬럼프에게 [음악]

그레이가 부릅니다. 하기나 해.
글 입력 2018.08.02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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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잡생각이 많은 편이다. 뭔가를 항상 열심히 하고 있긴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걱정이 많다.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이뤄낸 게 딱히 없네?' 라던가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아무것도 안되면 어떡하지?' 라는 식의 후회와 두려움은 잡생각을 낳고 기르는 일등공신이다.

저번 주에도 난 평소와 다름없이 그 놈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겉으로는 웃으면서도 계속 가슴 한 구석이 무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을 무렵, 그레이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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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그레이의 실물을 영접했더라면 참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그건 불발. 노래로만 만나는 데 만족해야했다. ^_^ 그레이의 < 하기나 해 > 라는 이 노래, 꽤 유명하기에 예전에도 종종 들었지만 그날따라 가사들이 가슴에 박혔다.
   

영원하길 바래
지금 이 젊음과 힘
또 영감과 느낌
계속 오래가길 바래
다들 영원한 건 없다고 말하지만
 
영원하길 바래
사랑하는 사람들과
돈과 명예 음악
내 자신에게 말해
쓸데없는 생각 그만하고
 
하기나 해
그냥 하기나 해
뭐든지 걱정만 많으면
잘될 것도 되다가 안되니까 그냥 하기나 해
 
하기나 해
그냥 하기나 해
어차피 생각대로 되는 것도 아니니깐
재밌게 즐기자구 그냥 하기나 해

   
대중음악같지 않았다. 오로지 나를 위해 만들어진 ‘민재음악’ 같았다. (착각은 자유다.) 내 하소연을 들은 그레이가 친오빠처럼 내 앞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착각은 자유다.) 건네는 조언 같았다. 덕분에 머리가 단숨에 맑아졌다. 뭐든지 걱정만 많으면 잘 될 것도 되다가 안 되니까 그냥 하기나 하면 된다는, 보편적이지만 너무 자주 잊고 사는 진리를 다시금 되새겼기 때문이다.
 

길지 않은 시간 안에 많은 것을 이뤄냈지
간절하게 원하는 걸
다 하고 살 수 있다는 확신
그 전까진 혼자 불안감에 봉착
닫힌 생각에 갇힌 채로 살았던 난 거울을 쳐다봤지
그때 뭔가 혼잣말 하고선
반년 만에 옥탑방에서
방 세 개짜리 아파트로 이사했지

   
여기까지 듣고 나니 내가 혼자 불안감에 봉착했던, 그 때 그 시절이 떠올랐다. 이번 년도 1월이었다.

 
 
나의 슬럼프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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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화 시나리오를 쓴다. 영화과도 아니고, 어디랑 계약하고 영화화를 전제로 쓰고 있는 프로는 더더욱 아니다. 그저 이야기와 영화를 좋아하고, 더 좋아하고 싶고, 궁극적으로 그것을 업으로 삼고 싶은 아마추어일 뿐이다. 하여 단편영화를 만들고, 장편 시나리오를 공부하고, 스터디를 하고, 뭐 그런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다고 믿고 싶은 대학생활을 보내고 있다.
 
2018년 초. 시나리오 스쿨에서 작법을 배우고 생애 첫 작품(작품이라 하긴 뭐하지만 이를 대체할 다른 용어가 생각나지 않는다.)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꽤 큰 슬럼프가 닥쳤다. 미리 말하자면, 시나리오를 쓴다는 것은 마무리를 맺기까지 (물론 개인차가 있겠지만) 평균 1년 이상의 시간이 걸리는 굉장히 길고도 지난한 작업이다. (사실 그 후의 수정 작업까지 포함하면 1년은 그냥 훌쩍 넘는다.)

나는 뭣도 몰랐다. 이렇게 힘든 일인 줄 정말 몰랐다. 무엇보다, 나름 재능이 있다고 생각해서 시작했는데 막상 일이 닥치니 신기루 같던 재능은 어느 순간 증발해버리고 노트북 앞에서 동태 눈깔을 한 나만 남겨져 있었다. 감도 안 잡히고 칭찬도 받지 못하니 오기가 생겼다. 그래서 알바할 때랑 잘 때 빼고는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밥도 책상 앞에서 먹었다. 하루에 12시간정도는 시나리오에 투자했던 것 같다. 하여 그 누구보다 빠르게 진도를 뺐지만 속도와 완성도는 절대 비례하는 것이 아니다. 한마디로 내 시나리오는,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형편없었다. 자괴감이 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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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중요한건, 힘든 일은 손에 손잡고 한 번에 몰려온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갑자기 명퇴를 하게 되셨다. 말이 좋아 명퇴지 우리 아버지는 아직 50대 초반이다. 나는 23살 대학생이고 내 동생은 19살 수험생이며 내년에 대학에 가야한다. 이 상황에 갑자기 수입이 없어졌다. 부모님이 싸우는 횟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아무런 잘못 없는 아버지가 스스로 책망하며 작아져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6개월에 최소 1,500만원은 든다는, 옛날부터 가고 싶었던 교환학생을 조용히 포기했다. 아르바이트에 목숨을 걸기 시작했다. 돈이 아까워 밥도 제대로 챙기지 않았다. 한숨을 습관적으로 쉬게 됐다. 가만히 앉아있다가도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쉽지 않은 나날의 연속이었다.

하루는 노트북 앞에 앉아 있다가 너무 답답해서 머리가 멍해졌다. 이렇게는 앉아 있어봤자 소용이 없겠다 싶어 타란티노 감독의 < 바스타즈 : 거친 녀석들 >을 봤다. 이 영화, 타란티노 감독 특유의 B급 정서가 녹아난 통쾌한 복수 스토리이다. 그런데 난 이 영화를 보면서 울었다. 아니, 사실 보면서 울었다기보다는 그냥 눈만 화면에 둔 채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며 울었다. 내면에서부터 허물어지는 느낌이었다. 아마 그 때가 내 슬럼프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가 아닌가 싶다. 두 번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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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결국 난 그 슬럼프를 이겨냈다. 상황이 해결된 건 전혀 아니다. 아버지의 재취업은 여전히 지지부진하며 시나리오 역시 한번 써봤다고 해서 그 다음이 조금 더 쉬운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개월이 지난 지금, 그 때 나를 그렇게 울리던 첫 작품은 (비록 누구한테도 보여주기도 싫을 정도로 낮은 완성도를 자랑하지만) 당당하게 ‘The End’라는 여섯 글자를 매달고 시나리오집에 실려 있으며 멍하던 나의 표정에는 생기가 돌아왔다. 나의 슬럼프가, 이제는 과거형이라는 말이다. 누군가 나에게 어떻게 극복했느냐고 묻는다면, 난 ‘그냥 계속 했어.’라고 답할 것이다. 힘들고 답답하고 짜증나도, 그냥 매일 매일 계속 하려고 난 노력했던 것 같다. 눈으로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고 머리는 책상에 매다 꽂으면서도 손으로는 계속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난 그렇게 차츰차츰 슬럼프를 과거로 흘려보냈다. 
 

6년동안 후회 없이 달렸으니
'하기나 해' 라고 난 말할 수 있지
89년생 뱀띠, 핑계는 대지 않기로
하고 만들기 시작한 음악
한시도 놓지 않았어
벌써 누군가의 마니또
오로지 내 얘기만 이 보따리에 담기로
내 미래를 점쳤던
어른들이 지금 내 통장을 열어보면
'억' 소리가 여러번
이게 마냥 부럽다면 너는 멀었어
그래, 난 아무것도 없었어, 그래
재현고 강당에서 너의 귀에
이 목소리가 들리기 까지
내 공책은 빽빽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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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습장이다. 지금 세보니 이렇게 끄적인 공책이 두껍고 얇은 것 모두 포함해서 7권이다. 시나리오와 글을 처음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게 작년 10월 즈음이니... 근 10개월 만에 7권이면 나름 그레이만큼의 SWAG은 가져도 되지 않나 싶다. SWAG!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보다 좀 더 든든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오늘, 과거의 나를 본받아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아보기로 했다. 자, 그럼 난 이제 하기나 하러 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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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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