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지대] 02. 스크린 속 여성 그리고 위스키와 담배

글 입력 2018.08.02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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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현실을 반영한다고 말한다. 맞다. 영화는 현실과 맞닿아있다. 하지만 그 프레임 속에는 보고 싶은 또는 보여주고 싶은 현실만 들어있기도 하다. 영화는 줄곧 대중의 인식을 형성하는 데 일조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영화는 본격적으로 선전을 위한 도구로 사용됐고 대중문화라는 포장 아래 이데올로기를 고착시켰다. 영화는 현실을 바탕으로 두고 있지만 어쩌면 그것조차 '만들어진' 현실일지도 모른다.

이는 우리 주변의 영화를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사각지대에서는 이번 글을 통해 영화 속 여성의 모습을 바라보고, 스크린 속에서 사라진 여성들을 만나보고자 한다.



영화 속 여성 그리고 '벡델 테스트'


세상의 절반은 여성인데 영화 속 세상은 전혀 다른 모습이다. 아직도 대부분 영화는 남성들을 중심에 세워 서사를 이끌어가게 하고 여성은 뒤에 배치해놓는다. 혹자는 이러한 주장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영화에 최소한의 젠더 개념이 반영돼있는지 가늠하기 위해 고안된 '벡델 테스트'가 현실을 자세히 보여준다. 벡델 테스트란 1985년 만화가 앨리슨 벡델이 만든 것으로, 남성 중심 영화가 얼마나 많은지 계량하기 위해 고안한 영화 성평등 테스트이다. 아래 만화와 테스트를 통과하기 위한 3가지 조건을 통해 이 테스트를 더 상세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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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서울국제여성영화제


1. 영화에 이름을 가진 여성이 두 명 이상 등장한다.
2. 여성들이 서로 대화를 나눈다.
3. 여성들의 이야기가 남자와 관련 없는 것이다.


벡델 테스트는 영화 속에서 여성이 적게 등장하는 현상을 지적하기 위해 고안된 테스트이긴 하지만 영화의 작품성이나 여성혐오의 척도를 나타내는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다. 영화 「그래비티」의 경우 주체적인 여성이 등장하는 대표적인 여성 영화로 알려졌지만 벡델 테스트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 반면 지난해 개봉한 영화 「군함도」는 벡델 테스트를 통과했지만 영화 속 여성 캐릭터가 폭력에 노출되고, 자극적으로 전시되기 때문에 여성 중심적인 영화라고 말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 테스트의 한계가 드러난다.

그러나 벡델 테스트는 위에 제시된 간단한 세 가지 조건도 충족하지 못하는 영화가 많다는 것을 가시화한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준다. 또한 영화 내에서 남성 중심 서사가 지배적임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영화계에서 아직도 젠더 개념이 부족하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나타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스크린 속 '여성'에 대하여


철학자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했다. 저마다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모두 여기에 존재한다. 하지만 영화 속 여성은 존재마저도 어렵다. 그들은 스크린 속에서 배제당하고 제거되며 자신의 이야기를 잃는다. 이름조차 갖지 못한 수많은 여성은 영화 속에서 범죄의 피해자로 그려지거나 희생자로 사라진다. 오죽하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출연할만한 영화가 없어 직접 메가폰을 잡은 '여'배우도 생겼다. 하지만 그 영화 안에서도 여배우는 '나'로 살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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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여배우는 오늘도」의 감독이자 주인공인 문소리는 '여'배우이다. 여배우 외에도 엄마, 아내, 며느리 등 다양한 수식어를 달고 산다. 다양한 수식어를 가지고 있지만 그의 역할은 한정적이다. 사람들에게 그는 '배우' 단 하나로 비치지만 실제 그 삶을 들여다보면 다양한 수식어 아래에서 갈등을 겪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남으로 인해 규정되는 이름들 속에 그는 자신의 모습을 잃는다.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선글라스라고 생각한다. 영화 속에서 그녀는 꾸준히 선글라스와 함께한다. 그녀는 매 순간 자신을 드러내고 매력을 표출하는 배우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선글라스로 자신을 계속 감춘다. TV 속 화려한 자신의 모습을 반가워하며 '엄마다!'라고 외치는 딸에게 "저거 엄마 아니야."라며 배우 문소리를 외면하기까지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나 자신으로 살 수 없어 힘들어하는 그녀에게 남편은 힘들면 하나라도 내려놓으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는 이렇게 대답한다. 시어머니도 하나고, 딸도 하나고, 작품도 일 년에 하나 정도 하는데 대체 뭘 포기해야 하냐고. 이처럼 「여배우는 오늘도」는 나와는 다른 세상을 살고 있을 것만 같은 배우마저 '나'를 버리고 사는 모습을 통해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을 여실 없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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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여기에 자신을 잃지 않는 여성도 있다. 영화 「소공녀」의 주인공 '미소'이다.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미소는 벌이가 시원치 않다. 하지만 궁핍한 생활을 할지언정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위스키'와 '담배'를 포기하지 않는다. 새해를 맞아 담뱃값이 2천 원 올랐을 때도 사치품에 가까운 위스키와 담배를 포기하는 것이 아닌 '집'을 포기한다. 위스키 한잔과 담배를 포기하지 못해 집을 나오는 미소의 모습은 보통 사람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행위로 다가온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이런 행위를 통해 대중이 '미소'라는 사람 그 자체를 기억에 남기는 데 성공한다.

이는 여성이 영화 속에서 단순 도구로 전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그저 '미소'라는 여성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미소'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이 서사를 끌고 나가는 영화라는 점에서 '여성'이 부각되기 마련인데 이 영화는 그러한 인식에서 벗어나 그 사람 자체를 비춘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그저 보여주기식으로 여성이 극을 이끌어가는 것이 아닌 그저 미소와 그녀가 사는 사회에 대한 영화인 것이다.

또한 미소는 영화 내내 그의 취향과 선택으로 정의된다. 위스키와 담배가 대표적이다. 전고운 감독은 '씨네 21'과의 인터뷰에서 미소가 포기하지 못하는 것 중 하나인 담배라는 소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담배는 이 사회에서 담배 피우는 여성을 너무 부정적으로 소비한다는 생각에 넣게 됐다. 「타짜」의 정 마담처럼 '센 여자'들을 설정할 때 꼭 담배를 쥐여준다. 실제 담배는 순한 여자도 착한 여자도, 그냥 피우는 기호식품일 뿐인데 말이다.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이런 설정을 통해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나 나름의 페미니즘적인 시각을 은은하게 반영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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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소재 하나부터 선택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미소가 '선택'을 할 수 있는 여성이라는 것이 반갑다. 그리고 그 선택이 어떤 클리셰(영화 속 진부한 표현이나 고정관념)로 끝나지 않아 다행이다.

"집은 없어도, 생각과 취향은 있어!" 자신을 쉽게 생각하는 남성에게 미소가 건넨 말이다. 분명 영화 속 여성에게도 생각과 취향은 있다. 아직 일부 영화만 이를 깨닫고 영화에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



'여성' 캐릭터가 아닌, 하나의 역할로


하지만 앞서 영화 「소공녀」가 보여주듯 영화계는 점차 변화하는 중이다. 조력자, 연인, 엄마 등 전형적이고 한정적인 여성 캐릭터에서 벗어난 영화들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영화에서 다양한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기 시작했고 여성 중심적인 서사도 하나씩 생겨나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 「오션스8」처럼 그동안 남자 배우들이 독식해온 범죄와 같은 특정 장르에 여성 중심 서사가 들어가기 시작했으며, 여성이 주연인 영화들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특히 여성이 주연인 경우를 찾아보기 힘든 히어로물도 변화의 움직임이 있다. 이미 영화 「인크레더블 2」는 여성 히어로를 앞세웠고 최근 마블 스튜디오의 수장 케빈 파이기는 더 많은 여성 히어로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작은 움직임들에 힘입어 앞으로 벡델 테스트를 통과한 영화들을 더 많이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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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규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영화 「소공녀」에서 미소를 규정하는 것은 위스키와 담배였다. 나만 해도 나를 정의할 수 있는 것이 너무도 많아서, 특정 기준만으로 나를 표현할 수 없을 것 같다.

영화 속 여성들도 몇 개의 기준으로만 정의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안다. 누군가는 현재의 영화 공식이 대중들에게 잘 먹히기 때문에 이런 영화가 나올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수요가 없기에 여성 영화가 나오지 못하는 건지, 여성 영화가 없기 때문에 우리가 남성 중심의 서사 속에 익숙해진 것인지 알 수 없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알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 연결고리를 우리가 끊어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저 뒤에 병풍처럼 서 있는 여성에게 손을 내밀어 무대 앞에 세울 수 있다.

그러니 영화 속 여성이 더 이상 자극적이고 폭력적으로 소비되는 굴레 속에 갇혀있지 않길 바란다. 여성 배우가 '여성'적인 캐릭터를 소화하기 위해 엔딩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는 것이 아닌, 그저 한 캐릭터를 표현하기 위해 연기할 수 있길 바란다. 이는 우리가 행동하면 바뀔 수 있고 영화계는 이미 바뀌고 있다. 취향과 선택을 내세워 나 자신을 보여주는 여성들을 스크린 속에서 더 많이 만나볼 수 있길 기대해본다.




[조수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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